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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혼술 손님(슬픈 아버지)

어쩌면 중요한 건 따로 있을지도 몰라요

며칠 전엔 혼술 손님이 오셨다. 강릉으로 이주하기 전부터 게하에서 낯을 익혀서 벌써 몇 년, 특별히 친하다곤 할 수 없어도 확실히 지인의 범주엔 들어가는 분이다. 그래서인지 오픈 이튿날에도 들리시더니 곧 한 번 오마셨는데 정말로 또 며칠만에 오셨다.


요즘은 매일 낮술로 막걸리 두 병씩 마시고 집에 들어가신다는데 장수막걸리는 너무 달고 주문진동동주는 너무 시다고, 적당한 술이 없겠냐기에 홍천강탁주를 시음시켜드렸더니 좋으시단다. 안주로는 뭘 해드릴까 했더니 동남아 스타일의 국수 생각이 난다 하셨다. 마침 쌀국수는 없어서 난으로 대체해도 괜찮겠냐 하니 흔쾌히 좋다 하신다. 술을 오픈해 드리고, 방어 초절임을 서비스로 우선 내어드리고는 요리에 들어갔다.

  

<난>


마침 어제 쓰고 남은 반죽이 있어서 다행. 다같은 발효지만 빵보단 난이 그래도 발효가 덜 까다로와서 하룻밤 지난 반죽도 훌륭히 쓸 수 있다. 어쩌면 이쪽이 더 나은 맛 같기도 하고.


혼술하러 오신 분이지만 모르는 분도 아니고, 오랜만에 뵌 지라 업데이트도 하느라 들락날락 하면서 대화가 끊어졌다 이어진다. 어서 끝내고 와서 같이 한 잔 하시자는데 이날은 달리 또 준비가 있어서 식재료 다듬던 중이다. 아니라도 한두 잔 분위기야 맞춰드리지만 같이 대작을 할 수는 없는 일. 혼자 하는 집이라 술에 취해선 도저히 해나갈 수 없다. 나도 술을 마신다는 그런 날은 따로 작정하고 잡아야 한다(예약시 참고).


<동남아식 해산물 커리>


이것은 상당히 플레인한 편의 커리다. 버터로 채소를 볶고 새우 페이스트를 추가로 넣어서 감칠맛과 약간의 쿰쿰함을 더한 것 외에는. 이 쿰쿰함이 마음에 드셨는제 다음에는 더 강한 효과를 주문하신다. 물론입니다. 기억해둘께요. 오시는 손님마다 Preference Sheet도 작성하고 있어요.





이런저런 일이 다 마무리 되도록 혼술을 하신다. 홍천강탁주를 한 병 더 드시더니 그 다음엔 희양산막걸리를 또 한 병 시키셨다. 나도 일이 마무리되고, 달리 예약손님도 없어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술은 받아두고 예의상 홀짝만 하는 정도.



사업이 잘 안 되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져있다 하신다. 사실 그게 어제오늘 일이 아님은, 이 몇 년 사이에 주고받은 간단한 이야기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얼마나 '잘 나가는' 분이었는지는 그날 처음 알았다. 그것도 여기 강릉에서. 잘 나갈 때 오만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며 후회섞인 푸념. 가정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아서, 이제 소원이 한 가지 있다면 빨리 사업적으로 재기해서 단란한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신다. 잘못한 것이 너무 많으시다고 한다. 듣는 나도 마음이 짠하다.


잘못한 것이 많으시다면 사모님이나 자녀들한테 사과하신 적은 있냐고 여쭤보았다. 정식으로 표현해서 사과를 한 적은 없으시단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문제보단 사과를 먼저 하시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주제넘긴 하지만 충고를 드렸다. 하지만 사과도 본인이 다시 재기를 하고나서 할 수 있는 것이지 지금의 자기 모습으로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사과는 받는 사람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하는 거지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가부장제의 아버지들은 이렇다. 사람이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할 때 경제적인 성공은 필수적인 요소가 결코 아니다. 특히나 상대방이 경제적인 방식으로 보상을 요구하는 게 아닐 때에는 말이다. 그러다가 사과할 기회마져 놓치면 어쩌시려고...


이미 충고로 충분히 주제넘었으니 그 이상 더 권하진 않았다. 그냥 빨리 본인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일이 잘 풀려서 행복한 가정을 다시 찾으시길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돈보다 중요한 것은 사과하는 마음인 것 같은데, 사과도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한다는 식으로는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막걸리 세 병에 얼근하게 취해서 해지기 전에 돌아가셨다. 우리집 술값들이 현재 녹록지 않은 경제적 상황인 그분께는 좀 부담이  될 수도 있는데 그 다음주에 또 전화가 와서 오시겠다 한다. 고마운 일이고 다행한 일이다. 그날은 마침 예약 손님이 있다 했더니(원테이블이라 예약손님이 합석을 원하시지 않는 한 예약은 끝) 다음에 오시겠다 한다(그리고 그 다음주쯤 또 오셨다). 어서 빨리 일이 잘 풀리시길. 행복한 가정을 찾으시길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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