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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해적 드레이크, 해군 제독이 되다

Prelude to the Age of Great Pirates

브리스톨에서 나와 콘월을 포트사이드(port side, 좌현방향)에 두고 대서양은 비교적 얌전했다. 먹구름도, 풍랑도 본 적이 없고 항해하기 적당한 순풍이 부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세인트주드호의 뱃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파도에 배가 좀 기우뚱했다고 대굴대굴 굴러서 처박힌 것만으로도 웃기려고 몸개그를 하나 싶었을 거다. 그런데다가 심지어 엉엉 대성통곡을 했다니,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았겠지..

 

큰 배를 타고 난바다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 ‘뱃사람의 다리’는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대성통곡은 이야기가 다르다. 뭔가가 서럽고 복잡해서 나도 못 참는 울음이 터져버리긴 했지만 에티켓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우아한 로코코의 궁정인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건 대참사다. 


스타일을 구긴 정도가 아니라 아주 짓뭉게버렸다. 그것도 내 손으로.


더 안좋은 일은 이 배의 선원들이 이제부터 나를 얕잡아볼 거라는 거다. 


어디서나 약한 존재로 찍히면 인생이 괴롭다. 물론 나는 주먹이든 꾀든 언변이든 절대 약하지 않다. 내가 태어나고 파리의 빈민가에서 겪은 싸움만 하더라도 수십 차례는 된다. 아이들 싸움이라고 무시할 것이 아니다. 빈민굴 아이들은 말 그대로 아귀같은 존재라서 싸움이 시작되면 적당히 끝나지 않는다. 아니, 주먹으로 못 이기면 속임수와 모략도 서슴지 않는 것이 이런 아이들이다. 그런 아수라장을 해치고 온 나라 싸움은 즐기지는 않아도 환영이라는 느낌이지만. 


어른이 되면 더욱 무서운 것은 ‘평판’이라는 것이지. 


모르겠다. 내가 찾아다니며 변명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빈민가 출신의 수석요리사가 되었을 때도, 영국 궁정의 프랑스 요리사로서도 수근거림과 비방은 삶의 일부 같은 것이니까. 약하다고 보면 이래저래 집적대고 괴롭히는 녀석들이 생길 테니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되긴 한다. 


결국 실력으로 이겨나갈 수 밖에. 주먹실력이 아니라 요리실력으로 말이다. 누가 뭐래도 최고 요리사인 나는 어디서나 인기가 높았다. 뒤에서 수근대는 녀석들이야 찌질한 질투꾼 놈들로 상대할 가치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걸리기만 해봐라.


***************************


배가 프랑스와 스페인이 접한 비스케이만 부근을 지날 때에는 확실히 파도가 달라졌다. 다행히 이때쯤은 나도 ‘뱃사람의 다리’를 가지게 되어 균형 잡는 데는 별 문제는 없었지만.

여느때와 같이 스태프들과 함께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다. 


“전원 갑판으로 집합!”


1등항해사인 해밀턴(Hamilton)의 목소리가 울렸다.


“갑판으로 집합!”

“집합!”

“집합!”


선원들이 복창을 하며 일손을 놓고 갑판으로 집합했다. 나도 어리둥절하지만 하던 일을 멈추고 갑판으로 따라갔다.


“어이 주방장. 눈치껏 내 뒤만 잘 따라다니쇼. 별 건 아닐거요.”


페드로가 나름 나를 챙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시키지 않아도 페드로 뒤를 잘 따를 판이다.


“포트 사이드에 수상한 배 발견이다. 아직은 어떤 배인지 파악되지 않았지만 프랑스나 스페인의 배일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하도록. 각자 업무에 복귀하고, 상황이 진전되면 다시 통보하겠다.”


해밀턴 1항사의 말에 선원들은 다시 제 자리로 흩어졌다. 술렁대며 돌아서긴 했지만 크게 동요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톱(Top, 마스트 가장 높은 곳의 파수대)의 파수꾼이 뭔가 발견한 모양이오. 여기가 영국 배 입장에선 좀 위험하긴 한 곳이오. 프랑스와 스페인의 바다라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 아니잖아?”

“글쎄, 군함이라면 확실히 전쟁중이 아니면 적대행위를 안 하겠지만 해적들은 그런 것 안 가리는 녀석들도 많으니까요.”

“해적?”

“그렇수다. 해적. 비스케이만은 예로부터 해적으로 유명한 동네요. 우리는 사실 비스케이만 바깥으로 대서양을 항해하고 있긴 하지만, 스페인의 빌바오며 프랑스의 라로셸을 근거로 해적질을 하는 녀석들은 아메리카나 인디아까지도 가니까요.”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라면 프랑스던 스페인이던 공권력이 미치는 곳 아닌가? 해적들이 그렇게 마구 날뛰어도 되나?” 

“해적이 있다니 뭐 배만 띄우면 해적들한테 다 뜯기고 그러는 줄 아쇼. 넓고넓은 바다에서 해적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오. 그러니 공권력도 해적을 잡기가 쉽지 않은 거지요. 혹시 해적이든 뭐든 만난다고 해도 뭐, 일단 충분히 근접을 해야하는데 배가 눈에 띄는 것은 최소 몇 해리 전이거든요. 지금도 우리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이지 않소. 톱에서 파수꾼이 망원경으로 둘러보다가 무슨 배인가를 발견한 거지요. 그 정도면 순풍을 타고도 두어 시간은 걸릴 거리요.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군. 그럼 우린 안전한 거냐?”


페드로가 나를 보고 낄낄거리며 놀리기 시작했다.


“안전하지 않으면 울기라도 하시려고?”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화를 내면 더 우스워질 것 같아 참았다. 이 녀석 좀 더 본격적으로 날 놀려봐라. 그 핑계에 한 번 뻬뺑의 주먹맛을 보여주마···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걱정 마시우. 기본적으로 세인트주드호 정도 되면 해적선과는 체급이 달라요. 개와 소 정도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요. 게다가 바람 방향도 남서행인 우리에게 유리하고. 아마 별일은 없을 거요. 소집은 일단 주의를 주기 위한 절차 정도요.”


그렇다면 안심이다··· 라고 생각하다가 보니, 해적이라 이건 재미있는 걸. 잘하면 겁쟁이 이미지도 지울 수 있겠다. 아니, 이 배 위에서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해적을 상대로 하는 게 여러가지로 좋겠는데?


************************


세인트주드호의 뱃사람들 중에서도 질투꾼들이 나올 환경은 잘 조성이 되고 있다.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선장은 가끔 나를 불러 독대를 하고 식사를 한다. 요리며 궁정이며 정치 이야기를 나누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다른 선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디서 굴러먹던 울보 겁쟁이놈의 요리사가 하늘같은 선장님과 겸상으로 독대라니 싶은 거다. 일반 선원들보다도 간부급 선원들이 더 씩둑꺽둑 하는 눈치다. 주방장도 간부급 선원이긴 한데, 항해사나 조타수 같은 역할에 비하면 허드렛일 하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게 배의 문화다.


어쨌든 해적에 대해서 더 알아두고 싶어서 선장과의 식사 자리에서 이번엔 내가 더 질문이 많았다.


“선장님. 낮의 그 해적선 말입니다.”

“해적선?”


선장이 금시초문이라는 투로 잠시 미간을 모았다.


“아 낮의 그 배, 그 경보 말이군요. 해적선이라기에 난 또. 그 배는 우리랑은 방향도 다르고 충분히 정체를 파악할 정도로 가까워지기도 전에 시야에서 사라졌소. 해적선은 아마도 아닐거요.”


이런. 오버했군. 해적선을 만나면 명예회복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보니 무조건 해적선이라고 간주를 해버렸다.


“아, 네 그렇군요. 그 배가 아니더라도 해적선에 대해서 여쭙고 싶은 게 많습니다.”

“호, 해적에 관심이 생기셨소? 하긴 카리브해에 들어가면 오늘보단 훨씬 해적선이 가깝게 느껴질 거요. 어느 정도 사전지식이 있는 게 좋겠지요. 그래 해적에 대해서 뭐가 궁금하시오?”

“그냥, 다 궁금합니다. 선장님은 해적을 만나보신 적이 있겠지요?”


콜드웰 선장의 미간이 다시 좁혀졌다.


“그 이야기는 다시 할 기회가 있겠지요. 일단 해적들의 비즈니스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보겠소. 해적이라고 다 같은 해적질이 아니라오.”

“넵.”

“프랜시스 드레이크경의 이름은 들었을 거요. 해적출신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해서 기사 작위를 받고 해군 제독까지 된 사람이지.”

“프랜시스 드레이크경이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영국이 자랑하는 전쟁영웅이지요.”


그야 내가 영국사람은 아니지만 프랜시스 드레이크라면 유럽 전역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참하게 격파했다는 영웅담은 영국의 적국에서도 모를 수가 없는 큰 화제로 전승되어오기 때문이다.


“아시는군. 드레이크경의 이야기를 길게 하자면 끝도 없지만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도 원래는 해적이자 노예상인 출신이라오. 카리브해에서 스페인배들을 주로 털었지요. 나중에는 파나마를 공격해서 점거하기도 했고 말이오. 파나마는 스페인제국의 신대륙 식민지의 부가 모이는 곳이라 이 때 큰 부자가 되고 명성도 얻었소.”

“나포하고, 약탈하고... 하지만 스페인을 상대로 했으니, 영국에서는 영웅이 되었겠군요.”

“바로 그거요. 스페인이든 프랑스든 적국과 전쟁시에는 해적질도 영웅적인 행위가 되고 해적이 해군으로 취급받는 거요. 당시의 엘리자베스 여왕께서는 드레이크경을 높이 사서 배도 하사하시고 그 배로 세계일주를 명하셨지. 3년이 걸린 세계일주는 그대로 스페인 식민지와 스페인 배들에 대한 공격이었소. 당시만해도 카리브해는 물론이고 태평양으로도 스페인 말고는 유럽의 배가 거의 안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보이는 배를 털고 정착지를 공격하면 되는 거였소.”

“그건 스페인 입장에선 해적, 영국 입장에선 해군, 혹은 탐험이군요.”

“바로 그렇소. 그 세계일주를 통해서 영국도 태평양와 인도양의 바다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그 몇 년 후의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퇴한 것은, 뭐 사실 폭풍이 가장 큰 역할을 하긴 했지만도. 어쨌거나 부제독 프랜시스 드레이크경이 영국 해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전투니까요. 드레이크경은 국민영웅으로 살다가 죽었소. 아마 그렇게나 존경받은 뱃사람은 그 후로도 없을 거요. 스페인 사람들에게야 천하의 악당이고 해적이었지만.”


아하, 이건 해군을 해적에게 외주를 주는 시스템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렇다면 지금도 지금도 그런 이쪽에서 보면 해군, 저쪽에서 보면 해적인 뱃사람이 많겠군요.”

“그런 뱃사람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건 국가 군사 시스템의 일부라오. 전시에 적국의 배를 약탈해도 되는 면허장(Plaque)을 발급해주는 정도니까. 이런 면허를 받은 해적을 프라이비티어(Privateer, 사략해적)라고 하오. 자국이나 중립국의 배는 건드리지 않고 전시에는 해군의 지휘하에 군사작전에 동원이 되는 조건이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왜들 다 해적들을 미워하지요? 템즈강변에 교수대에 메달린 해적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면허장이 없는 해적의 이야기도 해야겠군요.”


그렇지. 해적이라면 역시 면허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강도질을 해야지.

이야기가 점점 흥미로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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