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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가장 성공한 해적, 헨리 에이브리 선장

It ain't over till it's over

“헨리 에이브리(Henry Avery)란 이름을 아시오?”

“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해적인가요?”

“해적이지요. 아주 유명한 해적. 그리고 아마 일생이 해피엔딩으로 끝 난 몇 안 되는 해적일 거고.”


해적과 해피엔딩이라. 그러고보니 이제까지 해적의 엔드게임은 뭔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교수대에 내걸려 본보기로 까마귀밥이 된 해적들은 응당한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런 결말을 바라고 해적질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겠지. 그러고보니 해적들도 나름 자기 동기와 목적이, 나름의 커리어 전략이 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선원이란 힘들고 위험한 직업이요. 농사를 짓거나 하는 것에 비해서 가능성은 있지만 실제로 항해를 통해서 제법 신분을 갖추게 되는 사람은 천의 하나, 만의 하나 정도요. 나머지는 술과 바닷바람에 젖어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어디선가 풍랑을 만나거나 병에 걸려 죽는 거요.”

“아, 그런 것까진 생각 못해봤습니다. 바다의 사나이란 멋진 일이다라고 막연히만 생각하고 있었지요.”

“뱃놈들 중에 제 집 침대에 누워 곱게 죽는 사람도 드믈 정도니까.”


며칠 바닷바람을 맞았다고 들떠있던 마음이 착 가라앉는 소리였다. 선장은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부를 얻는 것으론 역시 무역이 최고지만 대양을 오가는 배의 선원이 되는 것조차도 쉽지 않소. 너도나도 인도나 아메리카 무역에 참여하려고 하지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극히 소수지요. 물론 100톤짜리 배로도 운이 좋으면 대서양 왕복이 가능하지요. 크리스토퍼 콜럼부스가 탔던 산타 마리아호가 150톤 정도였지요. 하지만 그런 크기의 배라면 위험도도 그만큼 크다오. 배의 적재량에 비해서 선원들의 수나 보급품의 필요량을 생각해보면 가성비도 처참할 정도고요.”

“세인트주드호 같은 큰 배는 항구에서도 별로 본 적이 없긴 하군요.”

“이 배는 천 톤이 넘는, 본격적으로 무역용으로 건조한 배요. 이 배에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긴 하지만 일단 그 이야기는 넘어가고 헨리 에이브리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선장은 나이든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주절주절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스타일이 아니다. 맺고 끊음이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대화를 이끄는, 영국 신사 같은 면모가 있었다.


“에이브리 선장도 본래는 해군출신이오. 헨리라고 하지만 잭이라고도 하고 존이라고도 하고, 에이브리라는 성도 원래는 에브리(Every)라고도 하고. 해군에 입대할 때의 이름은 확실히 헨리 에브리였던 모양이지만, 하여튼 행적이 복잡한 사람이오. 본인이 일부러 신원을 숨기기 위해 이런저런 가명도 쓰고 했던 모양이오.”

“하지만 전설적인 해적선장이라면 아는 사람들이 많았을텐데요. 같이 배를 탄 선원들을 비롯해서요.”

“그렇지요.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고 에이브리 선장은 성공한 해적이라는 거요.”

“성공한 해적!”


나도 모르게 장단을 맞춘다. 콜드웰 선장은 이야기꾼을 했어도 성공했을 것 같다. 평소에는 담담하다가도 이야기가 고조될 때에는 목소리에 감정과 힘을 실어 빠져들게 하는 재주가 있다.


“에이브리 선장은 그 전에도 그 후로도 아무도 못한 일을 해냈소. 바로 무굴제국 아우랑제브 황제의 선단을 털어버린 거지요. 6명의 사략선장이 연합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오. 무굴선단은 25척이나 되고 기함은 이 세인트주드호보다도 두 배 이상 큰 배였단 말이오.”

“그런 배는 상상도 안 갈 정도입니다. 어떻게 그런 배를, 아니 대선단을 공략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 전설이 된 거겠지요. 그 한 번의 약탈로 빼앗은 금은보화가 50~60만 파운드라고 하니 대단한 돈이지요. 이건 술김에 나온 허풍이 아니라 보험회사에 청구된 금액을 기준으로 얘기하는 거요. 그 정도면 세인트주드호 같은 큰 배라도 수십 척은 살 수 있을 돈입니다. 하지만 성공은 그걸로 끝이 아니오.”

“아니 그보다 더 큰 성공도 있답니까?”

“물론이오. 이제 에이브리와 그 부하들은 영국과 인디아, 두 나라 공통의 지명수배자가 된 거요, 유럽과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두 나라의 해군과 관리들, 뿐만 아니라 현상금 사냥꾼들까지도 어떻게든 에이브리 선장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거요. 세상 어디에도 숨을 데가 없는 도망자 신세라는 거지요.”


딴은 그렇다.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뭘하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정착해서 맘놓고 돈을 써볼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금은보화도 써야 재산이지 먹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알겠소? 성공이란 끝까지 마무리를 잘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오. 이 정도면 세상에 안전한 곳이나 안전한 때란 아예 없어지는 거요. 이런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에이브리 선장을 팔아넘기고 자신은 사면을 받는 거니까 말이오."

“그 정도면 잘 때도 부하들이 의심스러울 정도겠군요."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요. 애초에 여섯명이나 되는 사략선장이 에이브리를 우두머리로 추대했다는 것부터가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거요. 사략선장 여섯이 같이 합동작전이라니, 그런 일은 그 후로도 일어난 적이 없소. 다들 제잘난 맛에 살고, 의견이 안 맞으면 말보다 칼이 먼저 나오는 인간들이니까요."


하긴 그렇다. 주방에서도 통솔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꽤나 여러가지 기술과 사람을 읽는 능력이 필요하다. 하물며 해적선에서야. 


"그럼 에이브리 선장은 어떻게 했다는 겁니까?”

“우선은 원래 본거지이던 마다가스카르를 떠나서 카리브해의 뉴프로비던스로 숨어들었소. 바하마제도라고 부르는 섬들 중 하나 말이오. 당시만해도 영국의 힘이 카리브해에선 잘 미치지 않았으니까 은신처로서는 괜찮은 곳이었소. 인디아의 무굴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오. 식민지 경쟁에는 끼지 못하던 덴마크는 여기서 장물아비 같은 역할을 해주며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해적들 입장에서는 금융시스템을 이용할수도 있고 말이오. 수수료라는 건 말도 안  되게 높았지만, 그런대로 돈을 만지며 살 수 있었소.”

“그렇다면 뉴프로비던스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 그런 겁니까?”


질문이라기보단 단순한 반응이었다. 


“그럴리가. 잡범이라면 모를까, 헨리 에이브리는 이제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소. 무굴제국이 정식으로 동인도회사에 항의를 했기 때문이오. 동인도회사는 이 사건으로 무굴제국과 거래단절에 가까운 처분을 받아서 파산 지경에 이르렀고 이건 대영제국의 무역 절반이 날아갔다는 이야기요. 정부에서도 결코 눈가아 줄 수 없는 일이지요. 게다가 이름뿐인 상태지만 뉴프로비던스는 영국의 식민지이기도 했소. 지사가 거주하는 나소(Nassau)에는 군함 한 척도 없고 인구래봤자 남녀노소 다 합쳐서 100명도 안 되긴 했지만.”

“이름뿐이라지만 그래도 영국 관리가 있는 뉴프로비던스로 향한 이유가 뭘까요? 프랑스나 스페인 식민지로 가는 게 더 안전하지 않았을까요?”

“일단 신분을 숨기고 숨어들었지요. 선장의 이름은 벤자민 브릿지맨(Benjamin Bridgeman)이고, 자신들은 무허가 노예무역선일 뿐이라고 말이오. 그리고 지사에게는 두둑한 뇌물을 안겼고 말이오. 이름뿐인 지사라도 어지간한 범죄에 사면권이 있어서 사면을 얻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을 거요.”

“그럼 거기서 사면을 받았습니까?”


내가 또 단순하게 반응했다.


“역시 사면을 해주기엔 너무 거물 범죄자였소, 신분을 숨기고 숨어들었다 한들 결국 알려지게 마련이지요. 본국에서 당장 체포하라는 전령이 왔소.”

“아, 그럼 체포되었나요?”


선장의 이야기에 몰입하다보니 생각을 하기보다는 자꾸 그 다음, 다음을 찾아서 단순한 질문만 던지게 된다.


“그럴리가. 지사가 100명이 넘는 해적을 어떻게 체포하겠소. 술집에서 취해있던 몇몇을 빼고는 다들 달아났소.”

“그럼 다음 행선지는 어디인가요?”

“그걸 아무도 모르오. 그게 바로 성공이지.”


선장이 빙그레 웃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하! 절로 무릎을 쳤다. 하지만 아직은 의심이 들었다.


“선원들도 전부 사라졌나요? 어디선가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거나 한 건 아닐까요?”

“그건 확실히 아니오. 선장의 배인 팬시(Fancy)호는 버려두고 다른 배들을 타고 뿔뿔이 흩어졌소. 아메리카 식민지로 간 축들은 운이 좋았소. 대부분 두둑한 뇌물로 사면을 얻는 데 성공했으니까. 반면에 영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대부분 잡혀서 징역을 살거나 사형에 처해졌소. 술집에서 취해서 너무 수다를 떨었거나, 금은방에서 너무 큰 액수의 보석을 한 번에 팔려고 하다가 의심을 사거나 해서요. 본국에서는 뇌물 같은 것은 먹히지 않았소. 본국이 더 청렴해서라기 보다는 앞서도 말했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무굴제국과의 무역을 계속 하려면 반드시 책임자를 색출해내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오. 사실 그때 처형된 사람들이 전부 에이브리 선장의 부하인지도 확실치 않다고 하오.”

“부하들은 그렇다 치고 정작 에이브리 선장에 대해서는 작은 실마리도 없습니까?”

“글쎄···”


선장의 눈이 먼 곳을 보는 것 같았다.


“에이브리 선장이 사라지고 얼마 후에 책이 한 권 나왔소. 해적에 대한 책은 대인기라서 계속 나오지만 이 경우에는 여러가지로 믿을만한 디테일이 있는 책이었소. 꼭 현장에서 본 사람 같이 말이오. 재판기록에 나오는 에이브리 해적단의 이야기와도 일치하는 것이 많아서 다들 이 책의 저자는 해적단의 일원이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말이오. 그 책에는 에이브리 선장이 다이아몬드를 팔려다가 사기를 당해서 가난 속에서 죽었다고 말하오.”

“하지만 가난속에서 살더라도 현상수배범인 것은 달라지지 않으니 현상금 사냥꾼이 모여들었을 텐데요.”

“바로 그거요. 아무래도 그 책의 이야기는 사실일 것같지 않소. 하지만 그 책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사람들은 에이브리 선장이 죽었다고 믿게 되었소. 그만큼 신경쓰는 사람이 줄어든 거요. 내가 에이브리 선장이라면 돈을 주고라도 그런 결말을 써달라고 했을 거요.”


확실히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지명수배자로서는 사라지는 게 최선이다. 내 예감에는 에이브리 선장은 이름과 신분을 바꾸고 어디선가 잘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었을 것같다.


“헨리 에이브리, 혹은 에브리가 내가 아는 가장 성공한 해적이오. 신나게 바다를 누비며 크게 한 탕 해서 이름을 높이고 돈도 벌고, 나중에는 편안히 죽었다. 이런 인생이라면 한 번 모든 걸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오. 근래의 해적들은 전부 헨리 에이브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일 거요. 한 번 사는 인생을 누가 소작농이나 도시의 하층 노동자 같이 살면서 흘려보내고 싶겠소. 해적이라는 건 꿈이 있는 직업인 거요. 성공모델도 있고.”


과연. 해적이란 것도 한 번 사는 인생을 잘 살고싶은 욕망의 분출이기는 여느 직업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상식적인 직업에 비해서 훨씬 진취적이고 멋진 일이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하긴 법이라는 것도 나으리님들이 자기들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라는 것은 많이 지켜보아 왔다. 국왕이나 귀족이나 3부회의 부르주아나, 자기들끼리야 엄청난 이해관계의 다툼이 있지만 거리의 빈민이나 소작농들에 대해 진정 관심이 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마레지구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궁정의 화려한 삶을 살게 된 나는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어느새 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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