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높이를 보면 안다
1++ 한우. 부위는 '설도'라고 부르는 부위다.
이 부위는 쉽게 말해 소의 엉덩이살이다. 엉덩이에서도 넓적다리에 붙은 부위다. 운동량이 많고 지방은 적다. 그래서 식감은 부드럽진 않은데 풍미는 최고. 유튜브 찾아보면 외국에서는 등심이나 안심보다 이 부위를 스테이크 최고로 꼽는 세프들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이 부위를 스테이크로 내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지만 호주 갔더니 럼프스테이크(Rump Steak)라고 해서 고급 스테이크하우스에도 꼭 있는 메뉴다. 물론 등심이나 안심보단 좀, 제법, 싸다. 그것도 장점이지. 우리나라에선 육회로도 쓰고 장조림으로도 쓰고 국거리로도 쓴다. 얇게 저며 양념불고기용으로도 쓰고. 아주 얇게 기계로 썰어내서 로스구이로 쓰는 경우도 있긴 한데, 요즘은 로스구이 자체가 거의 없는 추세다.
사실은 설도도 여러 부위로 나뉜다. 보섭살, 설깃살, 도가니살 등. 이 중에서도 풍미가 좋기로는 보섭살이 으뜸이다. 이 보섭살 부위를 정성스레 진공포장해서 숙성에 들어간다.
'탁월한밥맛 커뮤니티키친' 행사용. 숙성 기간이 2주가 체 안되서 엄청난 풍미를 끌어내긴 힘들겠지만 이 정도라도 안한 것과 한 것의 차이는 충분히 나타날 것이다. 단언컨데 풍미만 따진다면 등심보다 설도살이 낫다. 숙성과 상관 없는 부위 특성의 문제.
이것은 숙성은 아니고 테스트삼아 그냥 구워본 것이다. 현장에선 원가도 그렇고 정식 스테이크 버젼으로 나가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스테이크의 맛을 확실히 느끼자면 컷도 25~30밀리 컷이 필수. 덩어리 고기로 온 것도 있고(이것은 직접 커팅) 일부는 컷으로 왔는데 대략 25밀리 가까이는 되어보여서 다행이다.
확실히 많이 구우면 좀 질기다. 설도살이 구이용으로 환영 못 받는 이유를 알겠다. 하지만 이것, 템퍼 조절만 확실히 할 수 있으면 미디엄 레어나 레어 취향인 사람에게는 환상적이다. 이래서 럼프 스테이크가 인기구나 싶다(내가 갔던 호주의 레스토랑에선 미디엄이나 미디엄 월던 정도 템퍼라서 좀 질겼다만). 모든 일에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음식의 온도조절은 쉽지 않은 일이다. 쇠고기도 컷 두께나 세부 부위, 개체별 특성에 따라서 온도조절이 달라지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몇 도에서 몇 분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몇 번 구워보면 대략 감이란 게 있고, 익어지는 정도에 따라 고기가 눈에 보이는 반응을 보인다.
스테이크를 팬에 구울 때는 고기의 근섬유가 열에 의해 수축되어 높이가 솟아오르는 시점이 온다. 이 때가 레어에서 미디엄레어로 넘어가는 때라고 보면 된다. 겉은 완전히 익어보이고 거뭇하게 탄 자국까지 보이더라도 아직 내부는 열기는 조금 올랐지만 익는 온도에는 도달하지 못한 상태. 이 때를 조금 넘기면 미디엄레어로, 미디엄으로 나간다. 이걸 시간으론 얼마라고 이야기하긴 힘들고, 아까 위로 올라갔던 상태가 내려오기 시작하면 그 때가 미디엄레어, 완전히 내려오면 미디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더 익히면 원래 높이보다도 어깨가 한참 내려간다.
표면이 수축하면서 안에는 아직 수분(육즙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그러시던가)이 남아있는 상태. 이 때는 고기 부피의 총량이 거의 유지되는데 옆으로 퍼지기엔 표면이 다 익으면서 오히려 수축하고, 비교적 움직임이 자유로운 수직방향으로 팽창한다. 속이 익기 시작하면 내부의 근섬유 수축이 수분을 밀어내기 시작해서 부피가 줄어들고 다시 높이가 내려온다. 웰던 정도로 익으면 이 수분이 너무 많이 빠져서 부피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육질은 퍽퍽해진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스테이크의 어깨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어느 시점에서 불을 끄고 레스팅을 시키는 것이 미디엄레어에서 미디엄 템퍼를 잡아내는 요령.
레스팅이 필요한 건 열에 의해 수축되었던 근섬유들이 어느 정도 식으면서 다시 이완되는 과정을 통해서, 수축에 의해 쥐어짜졌던 육즙(이건 진짜 육즙)이 다시 내부 공간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팬에서 스테이크를 구웠다면 레스팅도 팬에서 하는 것이 육즙을 좀 더 잘 빨아들이는 세팅이다. 물론 시간은 렉에다 늘어놓는 것보다 제법 더 걸리고, 육즙을 빨아들인다는 것도 무슨 스펀지 물빨아들이듯이 하는 것은 아니고 기본적으로 고기 내부의 육즙에 대한 이야기. 게다가 펜에는 여열이 남아있어서 불을 원하는 정도보다 조금 일찍 끄지 않으면 순식간에 오버쿡으로 간다.
이건 열 확산(diffusion)공식인데, 쉽게 말해서 뭔가를 어느 정도로 열로 어느 시간 익히면 그 열이 어느 정도 뭔가의 안에 침투하는가의 공식이다. 익힘 정도의 공식이라고도 하겠다. 우리는 고기 익히는 데 쓰고 있지만 반도체 제조나 대수층의 오염이 확산하는 문제, 원자력발전에서 중성자 확산의 계산 등에 쓰이는 어마어마한 공식이다 ㅋㅋ.
인터넷에 보면 명문대 학생들이 이 공식을 응용해서 만든 스테이크 익히는 시뮬레이터도 있다. 하지만 현장에선 이런 거 들여다볼 시간도 없고, 무엇보다 D(확산계수)는 부위와 개체에 따라 천차만별. 그러니까 많이 구워보고 감을 익히는 수밖에 없다. 물론 감은 정밀과학이 아니다. 새로운 화구, 용기, 고기에 따라서 조금씩 다 다르다. 그러니까, 이 '어깨높이의 비유' 정도로 정확하고 실용적인 지침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것. 독자 여러분께 나름 큰 선물 하나 드리는데 요리 하시는 분들은 두고두고 응용하면서 점점 더 기술과 감각이 좋아질 숫돌 같은 지침이라고 자부한다.
말이 길어졌는데, 스테이크 익히는 법을 이해하면 그 후에 볶음이나 팬구이 요리에 응용할 요소가 엄청 많으니 요리에 진심이라면 이 방법은 꼭 익혀두시길.
당간, 그렇게 기가막히게 타이밍을 맞춰 구워낸 고기는 맛도 식감도 기가 막히네(사진은 촬영을 위해서 t값이 커지면서 '어깨가 내려간' 상태). 임플란트 한다고 이가 몇 개 없는 상태인데도 씹는 데 부담이 없고, 오히려 안심 같은 부위보다 이 식감이 더 맘에 들기도 한다. 풍미는 진짜 등심보다, 안심보다 보섭살이다.
숙성을 하게 되면 처음엔 좀 단단해지지만 어느 시점에선 부드럽다기보단 쫄깃한 식감이 나는데, 그렇게 먹으면 정말 맛있겠다. 탁월한밥맛 커뮤니티 키친이 개업하게 되면 정규메뉴로 올려볼까 싶다.
그러니까 탁월한 밥맛 커뮤니티키친에 놀러오세요.
7월 25~27일.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 11 204호, SALT.
위 건물 204호로 오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