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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파리의 아트딜러 허린, 강릉으로 은퇴

그리고 베르사이유의 붉은 장미를

나이가 들수록 세월은 빠르게 가고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커지기만 한다.


처음 영국에서의 유학생활로 시작해서, 유럽 이도시 저도시의 예술품 시장 곳곳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내 부띠끄를 시작하면서 파리에 정착한 것까지 하면 이국생활이 어언 이십년이다. 


보통의 회사원이거나 하다면 아직 은퇴할 나이는 아니지만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도 생기고 하던 일은 이제 정말 할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띠끄로 일을 하면서 고소득을 올리려면 리스크를 부담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선을 잘 지킨다고는 해도 상당한 정도의 위험도와 스트레스가 있는 일이기도 하고, 보상이 적지 않다 한들 항상 누군가를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이라는 것도 피곤했다. 고국이 그립기도 했고. 


모아둔 돈이라면 평생 먹고살 걱정을 안 하는 정도의 소박한 고민은 이미 벗어난 이야기다. 인생 백세라는데, 설마 그렇게나 살까. 그래도 80년은, 어쩌면 90년을 넘게 산다고 볼 때 절반 정도 남은 후반기를 제법 괜찮은 인생을 살 정도의 재산은 모았다. 


파리의 아파트만 처분해도 남부럽지 않은 한 재산이다. 거기에 이래저래 개인적으로 수집해둔 컬렉션이 그 아파트보다는 더 가치가 나갈 것이고, 장기투자로 해둔 주식의 가치만도 당장 처분하자면 세금이 걱정될 정도의 가치다. 한마디로 내게 돈 걱정은 없어서가 아니라 많아서 하는 것이다. 


이런 정도 재산을 만들려고 제법 땀나게 살아왔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즐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운 기분. 이것이 항상 ‘을’의 입장에서 일하는 서비스업의 섭섭함인가. 이제는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보자 싶었다.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이라.’ 


흠. 갑자기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지 싶었다. 


열심히 달리기는 했다. 제법 성공도 했다. 그런데 실은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른다. 은퇴계획을 세우다 보니 이게 나의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 욕구에 대해서도 찬찬히 성찰해볼 여유도 없이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라면 진작에 해결이 되었는데, 뭐에 그렇게 쫓겨서 살아온 걸까. 후회는 없지만 후회할 여유도 없어서였던 걸까.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는 생각이 든 건, 구체적인 방향은 없어도 변화에 대한 욕망이 나를 당기는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우선은 파리 생활을 정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파리는 정말 환상적인 도시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가득하고, 도시 구석구석에 쌓인 추억도 있다. 루브르나 오르세 말고도 미술관, 박물관이 수두룩하다. 작은 곳에는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작가들의 작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안목 있는 사람에게 충분히 감동을 주고 공부가 될만한 작품들이 즐비하다.


파리의 레스토랑들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미슐랭 별의 갯수 따위가 문제가 아닌, 정말로 훌륭한 음식들을 창조하고 서브하는 레스토랑들이 바닷가 모래알만큼 많다. 그들 중 많은 곳의 셰프나 메뜨르도뗄들과 친구를 맺기도 했지. 이제 그들과 만나기 어려워지겠다고 생각하니 조금 센치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파리를 사랑하지만, 지금까지가 딱 우리가 어울리는 시기였다 싶다. 이제 다른 욕망이 생겨버린 나에게 파리는 너무 화려하고 바쁜 곳이다. 한때 그 화려함을 동경했지만, 이제는 환상이 사라져버릴 정도로 익숙해져버린, 사랑은 하지만 친구로서가 더 어울린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런 관계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어디로 갈까?


언제나 하고 싶은 일은 바닷가에 사는 것이었다. 바다가 없으면 호수나 강이라도, 하다못해 작은 실개천이라도 눈에 보이는 곳에 살고 싶어서 지금도 세느강을 내려다보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마 섭섭함의 원인 중 하나는 이것일까? 세느강은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한국이라면 '세느천' 정도로 불러야할 것 같은 아담한 강이다. 파도가 넘실대고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와 비교할 수는 없지. 이제 어딘가로 간다면 바닷가로 가고 싶었다.


한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어도 이상적으로 그리는 삶은 있었다. 적당히 호젓한 곳에 살면서 요리도 하고 글도 쓰고 여행도 다니는 생활 말이다. 성년이 되고는 항상 여기저기 외국에서 떠돌며 정신없이 바쁘고 약간은 비밀스러운 생활을 한 터라 나름으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라이프 스타일은 조금은 은둔형이다. 성격상 사람 만나는 것을 특별히 즐기지도 않는 편이다. 남들은 내가 꽤 사교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전부 비즈니스 스킬의 일부로 체화한 페르소나다. 나의 본성은 사람을 자주, 많이 만나는 걸 전혀 즐기지 않는다. 


조용한 곳이 좋다. 어디에 살까? 마르세이유(Marseille)나 니스(Nice) 같은 남프랑스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또 프랑스야 하는 생각이 동시에 일어난다. 레반테(Levante, 동지중해)의 크레타(Crete) 같은 섬에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 스코틀랜드의 야성적인 파도와 거친 바람도 아직은 즐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르망디나 브르타뉴 같은 곳의 어촌마을에서 적당한 배라도 한 척 사서 고기잡이라도 배워볼까, 직접 잡은 고기로 요리도 하고··· 그런 곳들도 좋긴 한데, 역시 내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강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 돌아가자 한국으로!




요모조모 검토해본 결과 한국에서 정착하기로 결정한 곳은 강릉이다. 나는 서울 토박이로, 강원도나 강릉과는 아무 연고가 없다. 하지만 천진하게 탁트인 바다, 그 푸른 색에 마음에 끌렸다. 산을 즐긴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설악산과 오대산을 비롯한 명산이 가깝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고, 양양공항이며 고속철도가 잘 되어 있어서 서울이나 외국으로 가기도 편한 곳이다. 올림픽을 치룬 국제도시고 최근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있어서 지방도시 치고는 도시 분위기가 개방적인 것도 좋았다. 


시내가 아닌 조금 나간 바닷가 소읍에서 역시 바닷가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아침이면 어시장 나가서 물 좋은 생선도 사와 요리하고, 오후엔 향기로운 커피(강릉은 커피의 도시다!)를 마시며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저녁엔 바닷가를 산책하거나 낮에 하던 읽기와 쓰기를 계속한다. 여름엔 날씨만 허락하면 매일 나가서 바다에 몸을 담그고 겨울엔 찬바람을 맞으며 바닷가 모래밭을 걷는다. 요트를 사지는 않았지만 요트 조종도 배워서 때때로 친구들이 찾아오면 배를 빌려 같이 바다로 나가기도 한다. 이럴 때는 선상에서 낚시로 잡은 고기들을 직접 요리해서 작은 파티를 여는 것이 기쁨이다. 그것도 지루하면 외국의 친구들을 보러 훌쩍 놀러가기도 한다.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진 이상적인 생활이다. 


그러기를 한 1년이 넘게 하니 이제 이것도 좀 지겹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 평온하고 예상대로의 생활이라는 점만 빼고는 매우 만족스럽다. 어쩌면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은 이런 판에 박힌 바닷가 은퇴생활이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깨달아가고 있던 시기쯤이었다. 오귀스뜨 뻬뺑 셰프에 대한 내 관심이 살아난 것은.

 



프랑스에서 돌아올 때 이사 서비스를 통하지 않고 직접 챙겨들고 온 물건 중 하나가 오귀스뜨 뻬뻥의 노트였다. 일단 값어치 자체가 남에게 보증 없이 맡길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이건 내 것이 아니라는 의식이 여전히 있었다. 본의 아니게 남의 물건을 습득했다는 느낌이랄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뭔가 내가 사기꾼이 된 것같은 기분이다. 아트딜러로서 오래 일하면서 제값을 못 받은 적은 있어도 안 준 적은 없다고 자부하는데 말이다.


책에 나오는 옛날 레시피라도 한 번 재현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샀지만 여기저기 좀먹고 얼룩이 진 필기체의 고전 프랑스어 사본은 얼마간 격렬하게 내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후로는 좀처럼 손을 내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필사본을 산 얼마 후 폴란드로, 러시아로, 중국까지 좀 길게 출장을 다녀온 후부터는 자연스럽게 서가에서 먼지만 받아내고 있었다. 온몸의 탈진을 감수할 격렬한 몰두를 하기엔 이미 내 일상생활이 충분히 격렬했기 때문이다. 


남의 돈 벌기가 쉬운 곳은 없다. 


파리의 제법 근사한 아파트 할부금을 갚고, 좋은 와인과 음식을 즐기는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자면 그만큼 간단치 않은 일들을 해내야 했고, 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유 같은 것은 애초에 별로 없는 생활이었다. 마음 한구석에야 좀 더 힘을 쏟아 책의 내용을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지만 세상엔 ‘열심히’만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다. 프랑스 사람이라도 뭔가 고전문학에 대한 교육을 단단히 받아야만 제대로 독해가 가능할 이 노트는 그렇게 일상으로 침몰했다. 가끔 의식의 표면으로 거품이 올라오긴 했지만.


베르사이유궁의 궁정요리사가 직접 쓴 책이라니, 이 정도면 몇 만 유로, 마케팅을 좀 잘 하면 그 이상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물건이다. 가격이 너무 높으니 진짜로 이걸 그냥 내가 차지하고 팔아버릴 수는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베르사이유의 빨간 장미 아가씨에게 못할 짓이고, 스스로 정한 상도덕에 어긋나는 짓이기도 하다.


베르사이유의 마르셰 노트르담에는 그 후로도 끌리는 대로 몇 번을 갔다. 혹시 다시 만나게 되면 책을 돌려주려고 항상 가방속에 책을 넣어서 갔지만 그 앳된 아가씨는 다시 보지 못했다. 그때 말한 계획대로 어디 멀리 여행을 떠난 모양이다. 나에게 연락은 물론 오지 않았다. 


읽을 여유는 없어도 내용만은 궁금한 고문서와 매력적인 눈웃음의 베르사이유 소녀는 한 쪽이 생각날 때마다 다른 한쪽도 따라서 의식의 수면위로 끌어올리며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바쁜 일상이 흘러갔다.




한국에 돌아와서 유럽의 예술과 미식, 역사에 대한 글을 구상하고 있는 중에 뻬뻥노트를 다시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궁정의 생활상과 유명인들의 모습, 음식과 연회 등에 대한 정보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이 고문서는 위대한 요리사가 직접 쓴 훌륭한 1차 사료인 것이다. 

번역해서 출간할 가치가 있을 것 같은 직감도 들었고, 그러다보면 베르사이유에서 만났던 그 노트의 주인, 빨간 새틴 드레스의 아가씨와 다시 연결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선 집필작업의 일환으로, 이 노트를 번역해보자 싶었다. 그저 나 혼자 보자는 것이 아니고 번역출판을 염두에 두었으니 전문성을 가지고 정확히 번역해야 한다. 따라서 나 혼자 씨름해서 될 일이 전혀 아니고 도와줄 사람이 꼭 필요하다. 그것도 프랑스 원어민 정도로는 부족하고, 문학이나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라야 할 것 같았다. 내 프랑스어가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으니 한국어는 잘 못해도 상관이 없고, 위에 말한 정도의 사람이라면 영어는 당연히 잘 할 것으로 본다. 

요즘은 사람 구하기가 편리한 세상이다. 꽤나 까다로운 조건이긴 하지만, 전문가들을 중개하는 플랫폼에 위의 몇 가지 조건을 입력하고 “프랑스 고문서 번역에 도움을 주실 분을 찾습니다. 요리나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이면 더 즐겁게 같이 일할 수 있겠습니다.” 라고 코멘트를 달았다. 물론 프랑스어로. 

강릉이라는 도시가 제법 국제적이라 여러나라 사람이 많이 오고 체류하는 곳이다. 그러니 오래지 않아 누군가는 찾을 수 있겠지 했는데 역시 프랑스어 번역을 하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는 모양이다. 고전문학이라서 더 그런 것 같다. 검색해도 나오는 사람이 없어서 음 어쩐다··· 하다가 또 일단 접어두었다. 

안 되면 말고.

강릉 생활, 나의 생활이 좋은 점은 어디에 과하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거다. 




아이디 ‘tourdepepin’이 나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은 공고를 올리고 3~4일 정도 기다리다가 이렇게 반쯤 포기를 하고, 또 그로부터도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의 일이다. 


‘뻬뺑의 여행(tourdepepin)?’


갑자기 머릿속에서 뭔가 격렬한 물보라가 있었다. 


‘아니, 내가 뻬뺑의 노트를 번역하려는 건 어떻게 알고? 아니아니, 누구한테 말을 하거나 SNS 같은 곳에 올린 적도 전혀 없는 일인데, 그걸 알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이건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이런 우연이 있다고? 해킹이라도 당한 건가? 아니 해킹을 하려고 해도 내 머릿속에 직접 해킹을 하지 않고서야 이걸 어떻게 안다고?’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리고 정보를 더 구해야 한다. 세상에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고 논리적으로 가지런하지 않은 일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일을 처리하면 어딘가 탈이 나게 마련이다. 이럴 때는 더 많은 정보를 통해서 명확한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만이, 그 정도가 어렵다면 되도록 많은 데이터를 축적해 두기라도 하는 것이 습관이다. 만약 충분한 정보를 얻어서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일은 차라리 진행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다'가 조심스러움에 대한 속담이라면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건너건 건너지 않건 일단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야 결정할 수 있다. 그런 것이 내 몸에 벤 태도다.


말이 길어졌는데, 이 경우엔 아주 간단하게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 사이트에서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프로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프로필에는 아주 최소한의 정보만 담겨있었다. 네이티브로 프랑스어 사용자고 그 외에 영어, 스페인어를 유창한 수준으로 잘 할 수 있다는 정도로, 크게 참고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프로필에 올린 사진을 보니 모든 의문이 단박에 풀렸다. 베르사이유 마르셰 노트르담의 그 앳된 아가씨, 5월의 붉은 장미 같던 그 마드무아젤이다!

단박에 메신저에 응답을 하고 바로 첫 약속을 잡았다. 


"조금 멀더라도 저희 집으로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요일은 상관 없고 일주일에 한 번, 3시간 정도가 좋겠습니다."

"이번주 토요일 오후에 어떠세요. 3~4시쯤?"

"4시가 좋겠네요. 지도 보내드릴께요."

"네 그럼 토요일 4시에 이 지도로 찾아갈께요."

"네 여기가 좀 외져서 불편한데, 혹시 차 없으시면 차를 보내드릴까요?"


시골은 대중교통이 불편하다. 강릉이야 아주 시골은 아니지만 주말의 읍면 단위 대중교통은 평일보다도 적어 제법 불편하니까.


"아니에요. 제가 정시에 맞춰가겠습니다. 토요일날 봬요. 감사합니다."

"네 그럼 토요일에 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세한 것은 만나서 얘기할 작정이다. 반가운 마음도 있고, 내가 놀란 만큼 조금 놀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아마 내가 몇 년 전 마르셰 노트르담에서 낡은 노트를 사간 그 사람인 줄은 모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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