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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미식천재 마리 뻬뺑!!

마리, 허린이 준비한 음식의 마음을 먹다

애피타이저라고 할 계란찜과 스파클링 막걸리의 뒤로 본격적으로 음식이 나오기 시작한다. 

파올로가 나무접시 위의 감자전을 한 조각 앞접시에 서브해준다.


“강원도는 감자의 고장입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산이 많은 이곳은 쌀이 귀했고 감자를 많이 먹었지요. 감자를 쪄서 먹는 것이 가장 흔한 경우였지만 가끔은 이렇게 기름을 두르고 전을 부쳤지요. 쌀보다 귀한 것이 기름이었던 당시엔 이런 정도도 제법 호사에 속했답니다. 강원도 사투리로는 감자'적'이라고도 합니다.”


보통의 강원도 감자전은 감자를 갈아서 부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전분성분이 엉겨붙어서 보들보들하고 쫀득한 식감을 낸다. 이런 스타일의 감자전에서 담백한 감자전분의 맛을 잡아주는 것은 보통 양파와 쪽파 같은 것을 썰어 넣은 간장이다. 


내 경우에는 감자를 채칼로 쳐서 길쭉하게 잘라서 올리브유에 약불로 천천히 부친다. 


유전자 조작 대두가 들어갔다고 100% 확신할 수밖에 없는 콩기름은 쓰지 않는다. 콩기름은 향도 별로고, 유전자조작까지 해가면서 작물을 양만 많이 생산하면 된다는 식의 초국적기업 돈벌이를 거들어주고 싶지 않아서다. 


말이 좀 샜는데, 이렇게 채친 것을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부치면 아주 바삭한, 튀김 같은 감자전이 나오게 된다. 튀김과 달리 높은 온도에서 튀겨내는 것이 아니라 약불로 은은히 수분을 날리는 것이 포인트. 불과 접촉이 가까운 전은 강불에 부치면 충분히 바삭하게 되기 전에 다 타버린다.


이 감자전 위에 주문진 특산의 오징어젓을 올리고 그 위에는 또 치즈, 그뤼에르나 숙성된 체다나 혹은 파르마산 같은 향이 강한 치즈를 갈아서 올리면 완성되는 것이 ‘주문진식 감자전’이다. 치즈는 향만 느껴지도록 살짝 올린다. 


“와, 놀라움의 연속이군요. 이런 스타일의 감자는 처음인 것 같네요. 뢰스티와 비슷한 데 바삭한 것이 거의 감자튀김 수준이네요. 너무 맛있어요. 이건 오징어젓이죠? 이 치즈는··· 꽁떼 치즈군요!”

“네 맞아요. 오징어젓의 강한 감칠맛과 매운맛을 꽁떼 치즈의 강한 풍미로 짝을 맞춰주는 거지요. 감자전의 담백한 맛은 그런 풍미를 운반하는 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정말 좋아요. 이런 강한 풍미의 조합도 재미있지만 이 감자전은 결코 배경이나 운반선 정도의 역할에만 머무는 것 같지는 않네요.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아이스크림콘도 맛있어서 더 먹고 싶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오징어젓과 꽁떼 치즈라니··· 이건 정말 의외이면서도 잘 어울리는 조합이네요. 감자전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 둘의 만남을 이어주는 소개자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의례적인 “맛있다, 훌륭하다”가 아니라 이런 창의적인 표현을 들으면 음식을 한 쪽도 정말 기분이 좋아지게 마련이다. 이 음식이 먹는 이에게 ‘생각’과 나아가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음식이 사람에게 뭔가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언제나 경이롭고 뿌듯한 일이다.


파올로가 막걸리를 또 한 잔 서브한다.


“이 집에서 담근, 하우스 막걸리입니다. 쌀과 물, 누룩으로만 만든 술입니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감자전의 진정한 배경이다. 이 막걸리는 단맛도 쓴맛도 신맛도 튀어나오지 않게, 밸런스가 잘 잡히고 피니시가 긴 것을 중점에 두고 만들어서 2년 정도를 저온에서 숙성시킨 술이다. 합성감미료의 저가막걸리에 익숙한 입맛에는 이게 뭔가 싶을 수도 있는, 백지불경 같은 맛이다. 


하지만 정신을 모두어서 느껴보면 이 모든 맛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서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감자전과 오징어젓, 치즈의 강한 풍미와 기름은 모두 이 술이라는 유장한 흐름에 실려가는 요소들이다. 마리는 한 모금을 마시고는 고개를 갸웃 한다.


“이런 술은 처음인 것 같네요. 한국 술들은 막걸리든 소주든 다들 단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복분자주 같은 과실주에다가 추가로 뭔가 당분까지 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런 담담한 맛은 처음이에요."


마리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어찌보면 꼭 극지의 설원 같아요. 개성도 없고 생명력도 없어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도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지요. 아니, 그 설원 자체가 생명체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실은 얼음장 밑으로 수많은 생물들이 살고있는 곳이지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장엄한 생명의 현장, 극지의 끝이 안 보이는 설원. 오징어젓과 치즈의 풍미 같은 것은 그 설원을 채우는 작은 동식물들 같은, 이건 자칫 강한 풍미에 사로잡혀서 좁아질 수 있는 감각의 범위를 확장시켜주는 느낌이네요.”


이번엔 정말 놀랐다.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본 것 같이 의중을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감칠맛이 강한 음식은 어필하기는 좋지만 혼자만 튀어서 코스 전체의 조화를 해치기도 쉽다. 그래서 이렇게 담백하고 유장한 술을, 그것도 한 박자 뒤에 페어링한 것은 바로 감칠맛에만 붙들려서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는 우리의 감각을 초월해보자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 바로 다음 순서가 담백한 생선회이니만큼 더욱 그렇다.


“마리, 놀랐어요. 제가 파올로와 나눈 대화를 듣기라도 한 것 같군요. 그 북극의 설원이라는 비유는 없었지만, 바로 그런 마음으로 패어링한 술이에요.”

“이렇게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음식이라니, 무슈는 어쩌면 무서운 분인지도 모르겠어요.”


‘무서운 분’이라니, 그 말이 부슨 뜻인지 멍해질만큼 천진하고 명랑한 표정으로 마리가 말한다. 잠시 멍하고 있다가 갑자기 뭔가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뭔가 너무 과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맛난 음식을 먹어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마리를 보니 금방 사라졌다.




이 다음은 오늘 코스의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생선회다. 


한국식으로 큰 접시에 한두가지 어종을 푸짐하게 내오는 것이 아니라 일본식 산뗀모리(三點盛)에 가깝게 개인마다 작은 접시에 어려가지 어종을 소량으로 담아주는 것이다. 지금은 한여름이라 사실 횟감용 생선이 맛난 철은 아니다. 


그래도 대표적인 횟감인 광어가 우선. 거기에 강릉 주문진에서 빠지면 안 되는 오징어회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아주 상식적인 이철의 이곳의 횟감들.


비장의 캐스팅은 가시가 많아 잡어 취급을 받지만 사실 이 철에는 에이스라고 할 수 있는 횟대다. 여름의 횟대, 혹은 횟대기는 철도 아닌 광어, 우럭보다 훨씬 낫다. 이 철의 횟대는 회로 먹어도, 구워먹어도 맛있고 값도 싸다. 살이 금방 물러지는 횟대는 활어회를 떴다. 지느러미도 가시, 몸속에도 수많은 가지, 거기에 위험해보이는 노랑과 검정의 조화, 점액질이 많기로는 아귀 못지 않은 생선이다. 한마디로 손질하는 입장에서는 짜증날 정도다. 그래서인지 횟감으로 잘 안 쓰이고 가격도 싸다. 잡어취급이다보니 어부들은 횟대를 살려서 잡아오려는 노력을 안 하는데 내가 아는 배의 선장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다. 


오징어도 활어만 회로 먹는 것이 좋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단백질이 변성된 잡내가 나기 시작하니까. 나머지 회들은 숙성을 잘 해서 충분히 감칠맛이 올라왔을 것이고 식감도 다양하게 배치를 했다.

거기에 회는 아니지만 고등어를 초절임한 것과 문어를 우선 숙회로 데친 것을 가볍게 굽고 소스를 뿌린 것이다. 


“간장이나 초고추장, 겨자 같은 것은 필요하시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하면 준다는 얘기는 원래는 필요 없도록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여러 종의 음식을 소량만 늘어놓은 것은 이 다양한 맛을 다 느끼라는 이야기다. 겨자나 초고추장맛으로 먹는 음식들이 아니고 각자가 다 개성과 가치가 있는 맛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꼭 필요하다면 이런 양념장은 옵션으로 준다는 것이다.


“음, 이제까지 나온 음식들을 보면 그런 것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 그보다 이번엔 또 어떤 술이 나올지가 기다려지는데요?”

“이번엔 맑은술, 청주입니다. 오미자가 들어간 쌀술입니다.”


오미자는 말 그대로 단맛, 쓴맛, 짠맛, 매운맛, 떫은맛이 다 있다는 열매로 한국이 원산지이다. 흔히 오미자라고 하면 설탕에 우려낸 청을 연상하는데, 그건 음료로 마실 때 얘기고 술에 적당량을 넣어서 이 오미가 은은히 균형을 이루게 하면 음식이 무엇이든 제 역할을 하게 된다. 

다양한 맛과 식감의 해산물을 먹을 때 곁들일 술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 상당한 탄산도 느껴지는, 오미자의 고장 문경의 오희라는 술이다. 아까의 샴페인 막걸리도 있지만 실은 맑은 빛과 은은한 탄산으로 볼 때 이 오희가 진짜 샴페인에 더 가깝다.


“으음? 이건, 이건 뭘까요? 다양한 맛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요. 그런데 그 균형은 정적인 균형이 아니고, 꼭 팽이가 돌아가는 것같이 다이나믹한 균형이네요. 한국에서 회를 먹으면서 왜 이렇게 간장과 고추장으로 범벅을 하나 생각하긴 했었는데, 여기서는 술로 장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네요.”


이쯤되면 내 귀에 도청장치라도 달려있나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도 아니라면 마리는 그냥 맛난 것 좋아하고 예쁜 음식사진 찍어서 올리는 것 좋아하는 젊은 처자가 아니라 음식료 분야에서 대단한 내공을 갖춘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음, 오귀스뜨 뻬뻥의 후예라니까, 역시 타고난 재능이 큰 것일까?


“마리, 문헌학을 공부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꼭 경력이 오래된 셰프나 소믈리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네요. 이건 우연히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아니에요.”

“제 7대조 할아버지는 유명한 요리사였죠. 그냥 유명한 정도의 요리사가 아니고 루이 15세의 수석궁정요리사였어요. 베르사이유궁의 모든 연회를 책임지던 분이었죠. 그런 피가 흐르고 있어서인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도 요리를 하셨어요. 기억도 안 나는 어릴 적 일이지만, 식당집 딸의 입맛이란 게 있겠죠?"

"그렇겠군요. 타고난 능력에 아주 어릴 때부터 영재교육이랄지." 

"식당집 딸만 아니라 낙농가의 손녀이기도 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농장을 운영하면서 버터와 치즈를 옛날 식으로 만들던 분이었고요. AOC 제도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조부모님의 부모님들이 만들던 방식으로 소를 키우고 치즈와 버터를 만드셨어요. 곡물 사료를 너무 많이 먹이고 항생제 맞혀서 키운 우유는 기름지기만 하고 다양한 풍미가 없다고 하셨지요. 몇 대째 내려오는 레스토랑이나 와이너리 같은 것은 아니지만 조상님들은 농사도 지으시고 가공품도 만드시고 그런 일들에 많이 종사하셨다고 해요. 그런 집안의 딸이라 그런지 먹고 마시고 사람들이 모이는 일이라면 왠지 좋아하고 금방 배우는 것 같아요.”


피는 못 속인다던가. 특히나 미각은 나이가 늘면서 발달되는 측면도 있지만 오염되는 면도 있다. 강한 단맛이나 조미료의 인공적인 감칠맛에 길들여지면 담담하고 미묘한 맛은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할머니 손맛의 비밀은 미원이라는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그런 맛들에 길들여져 살아온 세월이 이미 몇 세대에 걸치다 보니 미식가로서 가장 중요한 혀와 코가 강한 자극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많은데, 마리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감각에 다양한 경험까지 가지고 있는, 가히 미식천재라고나 할 그런 사람이다.




오늘의 만찬은 마리를 좀 놀라게 해주려고 이런저런 연출을 했고 상당히 성공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 번 내가 놀라줄 차례인가? 놀래키는 것도 장난, 놀라주는 것도 장난. 그러고보면 나도 생각보다 장난끼가 많은 사람인 건가?


“조상님이··· 오귀스뜨 뻬뻥 할아버지가 루이 15세 때 베르사이유궁의 수석 요리사였다고요?”

나도 그 정도까진 필사본을 읽어 아는 내용이지만 짐짓 장단을 맞춘다.

“네 그래요. 사실은 저도 비교적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에요. 대단한 귀족집도 아니고 7대조가 뭘 했는지를 누가 알아요? 대학을 다니던 때에 오귀스뜨 할아버지에 대해서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대학에서 문헌학과 언어학을 전공했다고 했지요?”

“네. 제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아일랜드에서였어요.”

“하지만 영국의 대학에 갔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대학은 영국으로 갔는데 졸업반 여름방학에 더블린의 트리니티 컬리지 도서관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어요. 거기서 도서관의 오래된 문서를 뒤적이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요.”


아하 그렇게 연결이 되나.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제 다음 요리가 나올 차례다. 그냥 맛난 것만 먹는 것이 아니고 음식을 통해서 서로 마음이 통해가고 있다.


마리와 함께 하는 오늘의 만찬은 어쩌면 평생 최고의 식사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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