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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뻬뺑의 필사본, 주인을 찾아가다

대인배 허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후식으로 나온 와플에 사과잼, 정확히 말하면 꽁뽀뜨를 바르며 그녀가 말을 잇는다. 잼과 꽁뽀뜨의 차이는 뻬뺑의 필사본에 익히 강조된 바가 있지.


“트리니티 컬리지의 고문서라는 것은 옛날 책이나 필사본 같은 것이 아니라 대학과 도서관의 운영을 위해서 작성되었던 행정문서 얘기에요. 보관은 잘 되고 있지만 학문적이거나 역사적인 가치라는 면에서는 이미 많이 연구가 되어서 근래에는 관심 갖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문서들이지요. 저는 좀 다른 관심사가 있어서 시간 날 때마다 찾아보았어요.”

“다른 관심사라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그야 물론 먹고 마시는 이야기지요. 대학의 행사를 치르면 파티도 하고, 혹은 학생들의 컬리지나 교수들의 관사에서도 식사나 연회를 하니까, 거기에 대한 기록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그리고 물론, 상당한 자료를 발견했어요. 무슨 채소, 무슨 고기, 무슨 술을 어떤 가격에 얼마나 사들였다는 식의 단순한 장부기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재미있는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어요."


나도 갑자기 구미가 확 당겨서 나도모르게 주제에서 이탈을 해버린다.


"재미있는 정보라면 예를 들어 뭐가 있을까요?" 


마리도 정말 재미있는 주제라는 듯 눈에 빛이 돈다.


"요즘 세상에서는 그런 것도 먹나 싶은 것들을 당시에는 잘도 먹었더군요. 예를 들어 가축의 뇌나 고환은 당시에는 절대 버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같은 문서라도 들여다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는 게 문헌학이기도 하지요.”


그럴 것이다. 단순히 식재료 구입장부라고만 해도 거기에는 상당한 정보가 들어있을 것이다. 공급자의 이름이나 지역, 당시의 가격, 지금은 별로 쓰이지 않지만 당시에는 흔하던 재료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 등, 음식문화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자료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다.


“그건 정말 엄청난 자료겠군요.”

“네. 이제는 역사나 문화연구도 단순한 문헌연구보다는 과학이나 통계학 같은 다른 학문들과 결합해서 새로운 방법과 성과가 많이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것은 연구비 지원을 잘 받는 교수님들한테나 가능한 것이고 저 같은 학부생들은 역시 문헌자료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지요. 이렇게 남들이 별로 관심을 안 기울이는 정보가 대량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쌓여있는 곳이라면 뭔가 재미난 게 있을 줄 알았어요. 덕분에 인턴십이 끝나고는 학부생으로는 드믈게 권위있는 학술지에 실릴 논문을 쓰기도 했고요.”


의기양양하고 티없이 밝은 웃음이다. 내가 알던 베르사이유의 붉은 장미 아가씨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웃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환하고 티없는 웃음 같은 것은 나로서는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저렇게 구김도 그늘도 없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혹은 그건 그냥 외모일 뿐일까?


“그건 정말 대단한 성과군요. 학부생이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다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남의 빛남을 보고도 내 안의 그림자를 찾는 그런 마음이다보니 아마 말에 영혼이 서푼 정도밖엔 담기지 않았을 것이다. 일찍이 가족들을 차례로 여의고 천애고아가 된 마리의 사연에 생각이 미치자 내 마음이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그러고보면 저 밝음은 타고난 것이나 행운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분명 상당한 마음의 경지라는 데까지 이르렀다.




“진짜 대단한 성과는 따로 있어요. 바로 오귀스뜨 뻬뻥 할아버지에 대해 알게 된 거죠.”


오귀스뜨 뻬벙이라는 이름에 내 마음이 급하게 현실로 돌아온다.


한편 마리의 미간은 묘하게도 약간 찌푸려졌다.


“무슈, 이 콩포트는··· 뭐죠? 익숙한듯 하면서도 새로운 맛이네요?”


이거야말로 오늘의 최고의 서프라이즈겠다.


“실은 그 콩포트, 오귀스트 빼뺑의 수고에 실린 레시피를 바탕으로 만든 겁니다. ‘로코코의 사과’라는 제목이더군요. 비지땅뎅 아니 요즘말로 피낭시에 속에 넣어 굽는 것인데 그건 너무 어렵더군요. 역시 제과는 유튜브 보고 따라하는 정도로는 쉽지 않아요. 거한 식사를 한 후니까 와플 반죽도 그에 맞춰서 최적화를 했습니다. 식사 후니까 미국식으로 바삭한 와플을 만들었지요. 실은 아까 티타임의 스콘에 발라먹었던 것도 이것이었어요.”

"네에? 이게 오귀스뜨 할아버지의... 로코코의 사과요?"


마리의 얼굴이 놀람을 거쳐 순식간에 울듯이 변했다.


“아, 그런 음식이었군요. 이것이 바로 로코코의 사과... 너무 감동적이에요.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아요.”


울상을 지으면서도 남은 와플을 씩씩하게 베어먹는 마리.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어느새 커피와 와플은 다 먹어치웠다. 

원래 프랑스식으로는 치즈 플레이트와 브랜디 같은 독하고 향기로운 술을 마시는 것이 마지막 코스인데 프랑스에 오래 살아도, 치즈를 나름 좋아하는데도, 마지막에 치즈라는 것은 어쩐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커피와 와플로 마무리를 하려했는데, 이야기 흘러가는 것이 어쩐지 여기서 끝내기가 아쉽다.


“어때요 마리,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는 것 같은데 우리 한 잔 더하면서 이야기를 할까요? 돌아갈 때는 차로 모셔다 드리지요.”


마리가 잠시 고심하더니 말했다.


“무슈, 내일은 아침 일찍 일도 있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차피 우리 이제 자주 만나게 될 테니 이야기는 다음에 만나서 더 하기로 해요.”

아쉽긴 했지만 더 권할 수는 없다. 강권은 실례이기도 하고, 이미 베르사이유에서 한 번 집적대는 아저씨로 찍힌 적이 있으니. 아니 마리가 그렇게 표현한 적은 없지만 뭔가 내 느낌이 그런지라 말이다.


“그렇군요. 파올로, 마리양을 시내까지 모실 차를 준비해줘요.”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아직 버스가 다니는 시간이니까 버스를 타고 가겠어요.”

“사양할 것 없어요.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것도 한참일텐데, 막차 시간이 아슬아슬 하지 않나요?”


마리가 핸드폰을 슬쩍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하하, 네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시간에 맞겠는데요. 무슈, 차보다 정류장까지 같이 걸어가시지 않을래요? 오귀스뜨 할아버지의 이야기 말고 제가 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 이야기는 오늘 꼭 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달빛은 가로등이 필요없을 정도로 환하게 비추고 여름밤의 바닷바람은 한낮의 더위를 식혀 산뜻하다. 식사 후에 이런 길을 좀 걷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더구나 마리와 함께라면 더욱.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까지 하니까 사양할 수도, 사양할 이유도 없는 길이다.


“그래요 운동삼아 좀 걸어볼까요?”

“네, 운동이 중요하죠.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지만 저같이 엄청나게 먹어대는 경우엔 운동 없이는 곤란하거든요.”


안 그래도 좀 궁금해지기 시작했던 부분, 먹성은 보통 사람 수준이 아니게 좋은데 날씬한 몸매도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에 대해서 마리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약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어서 가도록 하지요. 시골의 버스는 일정보다 일찍 끊기기도 하니까요.”

“그래요. 이제 나가도록 해요. 무슈 파올로, 오늘 정말로 고마왔어요.”


마리는 상냥한 인사를 파올로에게 남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게 예의이기도 했지만 파올로가 오늘 보여준 요리와 술들, 그리고 완벽한 서빙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만큼 인상이 깊었으리라. 진정한 감사와 존중이 느껴지는 인사다.


“마리씨 같은 손님이 자주 오시면 좋겠네요. 또 뵙겠습니다.”


파올로도 예의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것··· 마리씨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파올로가 화려한 금빛 바탕에 붉은 사과가 그려진 포장지에 쌓인 작은 상자를 건냈다.


“어머 감사해요. 이건 뭔가요?”

“아까 드셨던, '로코코의 사과'의 꽁뽀뜨 부분입니다.”

“어머 정말 너무 감사해요. 안그래도 정말 특이하고 인상깊은, 계속 생각이 날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고마워요. 잘 먹을께요.”

“또 만들어둘테니 다 드시면 언제라도 말씀하세요.”


마리는 정말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파올로의 목을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기까지 할 정도로. 파올로의 표정이 약간 멋적은 빛을 띠며 조금 붉어지는지 어떤지 싶다.




이 사람, 무슈 허린은 흥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사이유에서 처음 본 날은 별로 주목하지 못했지만. 교양도 있고 스타일도 있다. 키도 크고 어딘지 아이 같은 인상도 있는, 제법 귀엽게 생긴 아저씨다. 무엇보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게 좋고 음식과 예술에 대해서도 수준 높은 취향이 있는 게 마음이 쉽게 통할 것 같다.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더 하고싶지만. 버스가 끊길 시간이니까. 차를 내준다거나 혹은 제법 근사한 저택 같은 이 집에서 재워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초면에는 너무 신세지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뭔가 재미있는 책은 아껴읽고 싶은 마음 같이, 좀 더 자주 만나면서 천천히 알아보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니까. 


음, 그나저나 진짜 버스 시간이 빠듯하네. 걷는 속도를 좀 높혀볼까. 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말을 던졌다.


“무슈, 실은 아까의 문서 말이에요, 그 문서를 좀 볼 수 있을까요?”

“아 물론이에요. 애초에 번역에 도움이 필요해서 사람을 찾은 거니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보아야만 하지요.”


실은 본론은 그게 아니다. 나답지 않게 조금 쭈삣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숨을 깊이 들이마쉬고 다시 얘기를 건낸다. 


“음, 실은··· 저에게 되파실 수 있어요?”

“그럽시다. 되판다기 보다는 마리씨가 가져가세요. 애초에 너무 헐값에 산 거라 미안했어요.”


허무할 정도로 선선한 대답이다.


뻬뺑 할아버지의 필사본은 18세기의 고문서이고 작성자가 확실한데다가 심지어 당대의 일류 요리사다. 시골교구의 신부나 하급관료 출신의 연대기작가와는 신분이 다르다. 게다가 요즘같이 생활사나 미시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상황에서 음식과 연회, 궁정문화 등에 대한 정보가 가득할 이런 책의 가치는 상당히 높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몇 만 유로, 수집가들의 경쟁이 붙는다면 십만 단위로 올라가는 것도 허황한 얘기가 아닐 정도다. 

그걸 선선히 주겠다니, 이 사람 허린, 보기보다도 더 엄청난 부자인 걸까? 


아니면 나에게 환심이라도 사려는...?


나는 나란히 걷다가 이 사람을 다시 쳐다보았다. 키가 제법 커서 올려다보아야 한다. 내 눈빛이 의식이 될텐데 그저 선선히 돌려주마고 하고는 앞만 보고 걷는다. 뭐지 이 쿨함은?


“그거, 상당한 가치가 있는 걸 모르실 분도 아닌데 그냥 주신다는 거에요?”

“얘기했잖아요. 애초에 제 값을 치르고 산 것도 아니고, 나에게는 마리에게 만큼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정 미안하면 번역을 도와주는 것은 그냥 해달라고 할까도 생각해봤지만, 나에게 그런 정도 돈이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네요. 마리는 유산을 물려받았다지만 쓰기만 할 수는 없을 거고, 타지에서 생활하면서 이런저런 돈이 필요할테니까, 그래서 일을 하는 거겠지요? 그러니 공짜번역 제안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네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돌려받는 것도 분명 경우가 아닌 것 같았다. 뭔가 안간힘을 쓰는 이상한 느낌으로 다시 구매를 제안해본다.


“그래도 돈을 주고 팔았으니 되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냥 돌려주시는 건 아닌 것 같네요.”

“저는 파리에서 예술품을 취급하는 일을 했어요. 아트 딜러 일을 오래 하다보면 그런 느낌이 있죠. 물건은 제 주인을 스스로 찾아간다는.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해요.”


뭐야 이 사람! 감동해야 하는 상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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