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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이 부끄러움은 도대체 뭐지?

마리는 도대체 뭐가 부끄러운 거야?

솔직히 말해서 어안이 벙벙했다. 몇만 유로 정도라면 낼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베르사이유의 집을 처분한 돈과 할머니의 사망보험금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거의 고스란히 남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열심히 모아야할 정도의 돈이 10대 후반에 생겼다. 


하지만 대학에 가서도 돈을 막 쓰고 다니진 않았다. 학교 다니면서도 그냥 보통 학생들 같이 아르바이트도 하고, 가끔 맛난 레스토랑이나 고급 와인을 즐기는 것만 빼면 딱히 많은 돈을 쓰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저축을 하는 편이었다. 그냥 보통의 학생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이 년 넘게 여행을 하다보니 이제는 쓰는 돈이 훨씬 많긴 했지만 자원봉사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다니는지라 큰 적자는 아니다. 동유럽이나 동남아시아를 여행할 때는 현지 물가가 싸서 프랑스 현지에서의 생활비 정도도 안 드는 것 같았다. 여행에 필요한 정도의 돈은 앞으로도 몇 십 년이라도 낼 수 있다. 그러니 뻬뺑 할아버지의 필사본이라면 제값을 치루고 찾아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대인배시네요. 이것, 한국 돈으로 몇 천 만원이나 몇 억이라도 할 수 있는 건데.”

“돈은 상관없다니까요. 그보다 그 고문서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나 되도록 빨리 알았으면 좋겠네요. 마리의 실력이면 번역을 도와준다기보단 그냥 맡기는 게 나을 것 같긴 해요.”


그래. 안 받겠다는 돈을 줄 재주도 없고, 인생 기브엔 티이크라지만 꼭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지. 


“네, 이번엔 제가 빚진 것으로 해요 그럼. 조상의 발자취가 담긴 기록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꼭 되찾고 싶어졌어요.”

“당연히 마리가 가져야할 물건이에요.”

“감사합니다 무슈.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처음 뻬뻥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후로, 아니 그 이전부터도 계속 이걸 판 것을 후회했어요.”

“아, 맞아요. 7대조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블린에서 찾았다고 했지요.”


무슈는 정말 이 책에 대한 욕심은 없는 모양으로, 아니 정말 책의 내용이 궁금한 모양으로 급하게 화제를 돌려왔다.


“네. 어떤 연유인지 할아버지는 프랑스를 떠나서 영국으로 가셨더라고요. 그리고 당시 영국의 왕세자, 웨일즈 왕자였던 프레데릭 루이스(Frederick Lewis, Prince of Wales)의 궁정에서 요리사로 활동을 하셨어요. 그런데 그 프레데릭 왕세자는 트리니티 컬리지의 총장직을 역임하기도 했지요. 왕세자로서 식민지 대학의 총장이 되는 것은 어쩌면 그냥 명목상의 직위 같은 것일수도 있지만 왕세자는 제법 열심히 총장 역할, 그러니까 대학을 후원하는 역할을 한 것 같더라고요.”




그렇겠지. 더블린의 트리니티 컬리지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다. 우리로 따지면 경성제국대학 같은 느낌이랄까. 식민지 국립대학 총장의 임명권은 본국의 국왕에게 있었고, 대개 영국 본토의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들이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실은 이름뿐인 명예직 총장이 대부분이다. 더블린에는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총장들도 많을 것이다.


프레데릭 루이스 왕세자라면 예술사와 관련된 일을 하는 나로서는 알만큼은 아는 인물이다. 독일에서 와서 영국의 왕이 된 하노버왕가의 3대째 후손인 왕세자는 앞의 두 왕들이 영국 본토에서도 태어나지도 않고 영어도 유창하지 않은 왕들이었음에 비해서 고향은 하노버지만 청소년기부터 영국에서 보내서 국민들에게 익숙한 인물이었다. 영어도 유창하고, 특히나 군인왕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비해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인기가 높아서 국민들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말 그대로 '총아'였다. 국민들에게는 말이다.


가정적으로는 상당히 불행한 편이었다. 


북독일 출신의 군벌로 성공한, 한마디로 ‘독일병정’ 스타일의 선대들에 비하면 이 왕세자는 어릴 때부터 병약해서 군사적으로는 애초에 커리어가 싹수도 안 보이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부모의 기대는 옅었고, 나중에 태어난 막내아들 윌리엄 왕자(후에 컴벌랜드 공작)는 어릴 때부터 이미 군인으로 재능이 보여서 네 살에 이미 기사 작위를 받을 정도였다고 하니 기대치가 눈에 띄게 달랐을 것이다. 


프레데릭 왕세자는 그 대신이라고 할지,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스스로 음악이나 회화에도 조예가 깊었고 여러 예술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특히나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의 인재들을 초빙해서 영국에 소개하는 일에 열심이라 ‘영국 로코코 문화의 창시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병약한 몸이라서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 요절했고 왕세자의 아들이 조지3세가 되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했어도 문화사에서는 중요성이 충분한 사람이다.


“프레데릭 왕세자라면 대학 총장직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겠지요. 예술과 문화의 후원자로 이름이 높았으니까요. 아버지와의 사이가 악명높게 안 좋은 것도 있고요.”


프레데릭 왕세자 이전의 총장은 조지 왕세자, 그러니까 아버지인 조지2세의 왕세자 시절 타이틀 중 하나가 트리니티 컬리지의 총장이었던 것이다. 


하노버 왕가의 부자관계는 대대손손 험악하기로 일관이라 아들들은 무엇이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거나 혹은 아버지와 경쟁해서 이기려고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우리나라 사도세자 같은 변고가 없었던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프레데릭 왕세자의 경우도 군사적인 재능으로는 아버지를 결코 따라할 수 없으니 문화예술로라도 아버지를 이겨보려고 온 힘을 다했을 것이다. 사실 이 경우도 그렇게 성공적이진 못했는데, 본인이 충분한 부와 권세를 누리기 전, 그러니까 왕이 되기 전에 요절한 탓이 가장 크긴 하다. 하지만 아버지 조지2세의 경우 헨델 같은 당대를 넘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날린 예술가들과 연결이 되었지만 왕세자는 그런 행운을 맛보지 못한 탓도 있다. 


글쎄, 요리계의 오귀스뜨 뻬뼁이라면 헨델 못지않게 대단한 사람이지만 이제까지 문화계는 음악은 높이 쳐주어도 요리는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부터는 세상이 변하면서 그 평가는 바뀔 지도 모르겠다.


“프레데릭 왕세자는 총장이 되자마자 더블린을 방문해서 취임식을 했어요. 그리고 그 때 수행해서 취임식 연회를 준비한 사람이 바로 오귀스뜨 할아버지인 거에요. 그 취임식의 기록에서 뻬뺑이란 성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하지만 뻬뺑이란 성만 가지고 알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부정하는 게 아니라 전문가 입장에서 검증을 해보는 것 뿐입니다만..."


실은 나도 이 검증이 실패했으면 좋겠다. 필사본의 저자 뻬뺑이 바로 그 뻬뺑이었으면 좋겠다.


"아, 물론 그렇지요. 뻬뺑이란 성은 카롤링거 왕조의 성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베르사이유에 돌아와서 평소엔 가지도 않는 교구성당의 출생-사망자 명단을 확인해보고 알았어요. 이분이 진짜 뻬뻥가의 조상이라는 걸. 오귀스뜨 할아버지의 기록은 없었지만 6대조인 삐에르 할아버지의 출생기록에 ‘오귀스뜨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삐에르 할아지부터는 저에게 이르기까지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으니까요.”


하지만 오귀스뜨라는 이름도 무척 희귀한 편은 아니니 알 수 없다... 라고 하려는 참에 마리가 가슴을 내밀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 필사본, 이 내용까지 합쳐지면 완벽하지요. 프레데릭 왕세자의 요리사이자 필사본의 저자, 오귀스뜨 뻬뺑. 마리의 6대조 삐에르 뻬뺑의 아버지이자 이런 이력을 가진 사람은 마리 뻬뺑의 7대조가 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빙고! 그렇다. 

우리나라엔 족보가 있지만 유럽의 경우에는 이렇게 성당의 출생-사망 기록을 뒤지는 것이 조상을 찾는 지름길이다. 가문에서 편찬하는 족보는 유럽의 경우는 우리같이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발간하는 문화도 없고, 있더라도 아마도 이런저런 가필, 윤색도 많았을 것이다. 그야 뭐 우리나라도 비슷한 사정이겠지만.


하지만 교구의 기록은 성당의 사제가 행정적 이유로 작성하는 것이라 상당히 객관적인 사실 위주라는 것도 특징이다. 대부분의 사람의 경우에는 이름과 출생, 세례, 결혼과 그에 따른 가족관계, 사망일 같은 것들만 기록되지만 지역에서 명망이 있거나 사람들에게 기억될만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간단한 코멘트가 달리기도 한다. 지금은 온라인화가 된 자료도 많지만 누락된 경우도 많아서 이런 자료들도 ‘보물찾기’를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원광(原鑛)일 것이다.


“그건 정말 확실한 정보군요. 사실 저도 한국에선 양반이라고, 유럽식으로 말하자면 귀족가문 출신이라고는 하는데 7대조 할아버지가 누군지는 대부분 전혀 모르고 살지요. 족보라고 가족사를 기록한 책이 있으니 찾아보면 알겠지만, 요즘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못 보았어요. 사실 그게 진짜 저의 조상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고요."

"하지만 기록이 있다면서 왜 진짜 조상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거지요?"


그야 뭐, 기록 자체가 믿기 어려우니까. 신분에 대한 열망을 민주공화국 국민인 마리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비슷할 것이다.


"왕조가 무너지고 사회가 근대화가 되는 과정에서 족보를 사거나 지어내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제 경우도 이야기로라도 들어서 아는 조상의 이야기는 증조부 정도이고 그 전에 우리 집안의 누가 뭘 했는지는 알 수 없어요. 진짜 귀족 가문이면 그런 얘기가 전해올 법도 한데 말이죠?”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그건. 한국의 귀족들은 가족사를 기록한 책이 있다는 거죠?”

“하하. 요즘 세상엔 족보가 없는 가족은 거의 없을 걸요? 100여년전만 해도 패밀리 네임, 한국말로 성도 없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지금은 다들 성을 가지고 있지요. 순식간에 모두 귀족이 된 걸까요? 자기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서 족보를 사던, 짓던 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이야기지요. 어쨌든 이제 우리는 민주공화국에 사니까 그런 건 상관없지만요. 그보다 마리의 이야기를 더 듣고싶군요.”




이 남자는 이렇게 해박한 지식이 있어서 이야기하는 즐거움이 있다. 만나면 바보 같은 소리나 늘어놓는 남자아이들도 지겹고 다짜고짜 돈자랑부터 하는 아저씨들은 더 싫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대화를 할 수 있고 예의도 바른 사람이라면 환영이다.


“아, 네. 실은 이 문서의 내용이 조상 중의 누군가가 쓴 것이란 정도는 알고 있긴 했어요. 그걸 알면서도 팔아버렸다는 건 정말 철이 없었단 얘기죠.”

“그러니까 그건 마리의 흑역사인가요?”


흑역사. 그렇지, 아무것도 모르는 10대 소녀시절이었으니. 실은 이 필사본 말고도 팔아없에고 후회한 것은 꽤나 목록이 길다. 젠장, 무안한 마음에선지 나도 모르게 걸음이 더 빨라진다. 


“그래요 흑역사. 부끄럽네요. 어쨌든 막상 트리니티컬리지에서 오귀스뜨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되니까 아마 이 문서는 그 분이 쓰신 게 아닐까, 여러가지로 미루어볼 때 거의 틀림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어요. 18세기 당시의 궁정요리사의 생활과 요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드믄 문서라는 점도요. 문화며 역사에 대해서 배우고 나서야 진정한 가치에 눈을 뜬 거지요.”


정보가 머리 속에든 핸드폰 속에든 저장되어 있다고 다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정말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의 마음과 연결 되어야지. 마리에게 그런 가치를 아는 마음이 생기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는 게, 그 정도 세월이 지나도록 아직도 이 고문서와 툭 끊어짐 없이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게 경이로울 뿐이다.


“인연이란 참 놀라운 거지요? 몇 년이나 세월이 지나서 지구 반바퀴를 지나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하지만 이렇게 사연이 깊은 물건들은 반드시 주인을 찾아간다는 게 제 믿음이에요.”


아티팩트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물건들은 오랜 시간이 걸려도 제 주인을 찾아간다는 것이 아트딜러 생활을 하면서 갇게 된 믿음이다. 반대로 제 주인이 아닌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어딘지 말썽을 부려 풀려나려는 성향이 있다고나 할까. 터무니없는 이야기 같지만 이쪽 업계에는 '행운의' 어떤 물건도 있고 '저주받은' 어떤 물건도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행운템과 불운템이 주인이 바뀜에 따라서 역할이 바뀌는 경우도 있고.


“아, 정말 신기한 일이에요. 이 필사본이 저를 끌어당긴 걸까요? 어쨌든 이건 제가 책임지고 번역을 해드릴께요. 혹시나 책으로 출판을 하신다거나 혹은 다른 용도로 활용할 때의 모든 권리는 무슈가 가지셔도 되요. 저는 그냥 이 책만 가져갈께요.”

“음, 어떻게 활용할지는 모르지만 의외로 재미있는 내용일 수도 있으니, 그래요. 출판이든 어떤 식으로든 비즈니스가 된다면 그 부분은 제가 책임지고 추진하고 수익은 마리와 제가 반씩 나누기로 해요. 그보다 빨리 번역이 보고싶네요.”




무슈 허의 숨이 좀 달리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완만한 내리막이긴 했지만 거의 1킬로미터 정도를 걸었다. 이건 말 안 한 거지만 사실 나는 대학때까지 육상부에서 중거리 달리기 선수로 뛰었기 때문에 건장한 청년도 나와 걷기나 달리기를 하면 쉽게 감당을 못 한다. 이 아저씨, 50은 되어보이는 것 같은데 이 정도로 따라오는 건 솔직히 놀라운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걱정마세요 무슈. 제가 무엇보다 이 번역을 우선에 두고 빨리, 정확하게 해낼께요. 저기 버스가 오네요. 전 갈께요.”


멀리서 버스가 오는 것이 보였다. 시골버스는 오르내리는 사람이 확실치 않으면 휙 정거장을 지나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빨리 뛰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작별인사로 프랑스식 비쥬를 했다. 시간 여유가 있었으면 이 키 큰 남자가 허리를 조금 숙여서 볼을 맞대었으텐데 급한 김에 폴짝 뛰어오르다보니 그의 볼에 입을 맞춰 버렸다. 아 이런, 이렇게까지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약간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버스를 타러 뛰어가는 바람에 내 부끄러운 기색은 못 보았겠지만. 아, 혹은 부끄러워 달아나는 것으로 보인 건 아닐까? 설마···


안전하게, 딱 맞춘 타이밍에 정류장에 도착해서 손을 흔들었다. 아니었으면 아마도 그냥 지나쳤을 버스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급하게 차를 세웠고 나는 단 걸음에 폴짝 올라타서 자리에 앉았다. 창밖을 보니 무슈 허는 정류장까지 거의 다 따라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표정은 기분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이어서 되려 내가 생각이 많아졌다. 확실한 건 기분이 좋거나, 혹은 예의상이라도,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는 거다.


‘갑작스레 볼에 입을 맞추어서 화가 나기라도 한걸까. 이상한 여자애라고 생각을 하진 않을까. 아 진짜 입을 맞추려고 한 건 아닌데···’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왜 숨이 가쁜 거야. 하고 생각을 하다 새삼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혼자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부끄러울 건 또 뭐람?’


부끄러운 이유를 스스로 찾을 수 없어서 더 당황스러웠다. 이건, 도대체 뭐란 말야. 입술에 입맞춘 것도 아니고, 이런 정도로 부끄러울 건 뭐냐고. 프랑스에선 친한 사이에는 남녀 불문하고 볼에 입맞추는 게 전혀 어색한 일은 아닌데··· 뭔가 점점 생각이 꼬이는 기분이 들면서 애꿎은 입술만 문질러 댔다. 


마치 내가 기습적으로 입술에 키스라도 당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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