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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드디어 명품산업의 무대 베르사이유로

궁정이 무대가 되는 국가 기간산업

혹자는 루이14세 폐하께서 프랑스의 사치품들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키우기 위해 베르사이유궁을 짓고 화려한 파티를 열었다고도 한다. 그런 의도라면 베르사이유는 멋진 성공이다. 


앙리2세 폐하때만 해도 이탈리아의 일개 공작가에서 시집온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 이탈리아어로는 까떼리나 데 메디치)가 데려온 요리사며 정원사들이 파리에 일대 문화충격을 가했었다고 한다. 

프랑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1류 문화국가는 아니어서, 처음에는 뭔가 별난 짓들을 벌이는 ‘이탈리아 상인의 딸’ 취급을 하며 무시하던 궁정이 전부 이탈리아의 풍습을 따라하기 까지는 채 몇년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1세기, 루이 14세 폐하에 이르러 프랑스의 문화는 세계를 선도하는 화려한 꽃을 피운 것이다. 베르사이유궁이야말로 그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루이 14세 폐하께서는 화려한 것을 즐기셔서 궁정에서도 화려한 꾸밈이 존중받았다. 장중한 바로크 양식의 샤토는 물론이고, 미로와 같은 거대한 정원에 운하까지 파서 뱃놀이를 즐길 수 있는 규모의 궁전은 지금까지도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베르사이유에서도 가장 유명한 거울의 방을 만들기 위해서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대형 거울의 제작 기술을 가지고 있던 베네치아와 격렬한 첩보전을 치렀다. 당시 대형거울 제조는 첨단산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에서 이 기술을 유출하는 것은 반역죄로 다스리고 장인들은 공화국의 엄격한 관리를 받았다. 혹시라도 외국으로 몰래 도망갈 경우를 대비해서 가족들까지 연좌제로 처벌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의 베니치아 유리장인과 그 가족들이 프랑스로 모셔져왔고, 이들은 거울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베르사이유에서도 무도회나 연회를 개최하는 용도로 지어진 ‘거울의 방’은 전세계에 유리제조의 중심이 프랑스로 옮겨왔음을 보여주는 쇼룸이 되었고 베네치아와의 유리전쟁에서 승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품질이야 프랑스나 베네치아나 비슷했지만, 베르사이유궁의 거울의방에 초대된 외국의 귀족이나 외교관들은 그 화려함에 압도되어 베네치아의 거울은 아예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풍조가 되어 귀족들도 왕의 총애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과 부인들의 차림새부터 저택이며 베푸는 연회의 화려함 등에 아낌없이 돈을 썼다. 단순히 허영심을 채우고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루이왕 폐하께서는 이런 화려함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연회에서 멋진 드레스나 머리장식이 국왕의 총애와, 그에 따른 관직과 영지의 하사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힘 닿는대로 사치를 하는 것이 풍조가 되었다.


이러다보니 평민 출신이라도 머리를 만지거나 옷을 만드는 사람들 중 일류로 이름이 난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존경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무슈 샹빠뉴(Monsieur Chmpagne)라는, 평민 출신의 헤어드레서의 일화는 유명하다. 


하루는 어느 귀부인의 머리를 만지면서 그가 말했다고 하다. 


“너 같은 코를 가진 애는 말이지, 내가 아무리 머리를 잘 해줘도 이쁘게 보이진 못할 거야. 알지?”


평민이면서 귀족부인에게 존대(vous)도 아니고 반말(tu)을 써가며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귀부인은 울면서 살롱을 뛰쳐나갔다던가. 그 후로는 외모에 자신이 없는 여인네는 무슈 샹빠뉴를 기피했다고 한다. 


제 손으로 손님을 쫓아낸 샘이지만 무슈 샹빠뉴는 전혀 섭섭할 것이 없었다. 이미 스스로 응대하기엔 넘치도록 손님이 많기도 했거니와, 이제는 무슈 샹빠뉴에게 머리 손질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미모를 인정받는다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해서 외모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귀부인들은, 아니 외모에 자신이 없더라도, 무슈 샹빠뉴에게 머리를 하기 위해서 웃돈을 얹어 내고 선물 공세를 퍼부었다고 한다. 어쨌든 최고로 아름다운 여인네에게는 왕의 총애와 더불어 두둑한 은상이 돌아가기 때문에 귀부인들 입장에서도 충분히 투자할만한 돈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남편 입장에서도.




혹자는 베르사이유궁을 비롯한 화려한 스타일이 귀족들의 힘을 줄이기 위한 왕의 책략이었다고 한다. 그 의도 또한 확실히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머리를 장식하거나 드레스를 만드는 데에 드는 비용이 영지의 1년 수입을 넘어가는 경우가 생기면서 수많은 귀족들이 가산을 탕진하고 영지를 팔아넘기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스의 수공업과 상업이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된 것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런던이나 비엔나, 마드리드 같은 다른 왕국의 귀부인들은 이 프랑스의 ‘모드(Mode)’를 하루라도 빨리 따라하는 것으로 자랑과 위신을 삼았고, 프랑스의 사치품은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했다. 


파리의 최신 모드를 선전하는 방법으로 고안해낸 것이 인형이다. 인형에 드레스며, 머리장식이며, 구두며, 속옷까지 실제와 차이가 없는 정교한 옷과 장신구를 치장해서 세계 각지로 수출을 하면 이 인형을 보고 주문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 인형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할 때의 이야기다.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프랑스 물품의 수입을 금지하고 프랑스 상선의 교역로를 봉쇄하는 정책을 취했다. 전쟁 당사국으로서 당연한 조치였는데 이 조치에 런던의 귀부인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바로 파리 모드를 전달해주던 인형마저도 금수대상이 되면서 런던의 여인네들은 일종의 공황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들이 머리를 모아 의논한 것은 이 인형에 한해서만은 금수조치를 철회해달라는 청원을 접수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자식을, 형제를 전장에 내보내 싸우고 있는 여인네들의 청원으로서는 어쩐지 한가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프랑스의 문화상품이 세계 각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샹젤리제를 중심으로 들어선 상점가는 밤에도 대낯같이 불을 밝힌 상점들에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미모의 젊은 점원들이 여자라면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것들을 판매하고 있다. 참고로 이렇게 밤에도 쇼핑이 가능한 가로등이라는 것도 파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눈이 부실 정도의 화려한 드레스, 단지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전체적인 인상을 바꿀 정도의 브로치나 모자, 자연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들만 모아 배합한 향수, 얼굴을 백랍같이 만들어주는 화장품 등은 오로지 이곳 파리의 상점가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파리에 오게 되는 귀족이나 부자들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짬을 내어 반드시 이곳에 들러서 누이, 어머니, 연인들에게 줄 선물을 사야만 한다. 파리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아마 가정의 평화를 보장받지 못할 테니까.


가끔은 프랑스의 미래는 군사력보다도 이런 문화산업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전쟁에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하고 부유한 왕국이니까 이런 산업도 꽃이 필 수 있는 것이겠지만, 먼 미래에는 총칼의 힘보다도 이런 문화의 힘이 더 강해지지 않을까, 그랬으면 하는 마음으로 상상해 보는 것이다. 

무언가로 다투어야 한다면 힘보다는 아름다움으로 다투는 것이 '문명개화' 아니겠는가.




베르사이유의 이야기가 길어졌다.


베르사이유궁은 이렇게 ‘무대’로서 설계된 장소이기 때문에 대체로 개방된 공간이었다. 침소와 집무실이 있는 샤토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지만 궁의 정원이나 숲은 특별한 행사가 있거나 하지 않을 때에는 거의 제지하는 사람이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드나들지만, 그래서 높으신 분들이 보기엔 눈이 찌푸려질 차림새나 언행의 사람들도 돌아다닐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궁을 폐쇄한 적은 없다. 나 같은 꼬마들이 드나드는 것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궁에 도착하자마자 화려하고 광활한 정원과 바로크 양식의 장중한 건물들을 보며 정신없이 베르사이유를 탐했다. 하지만 궁이 좋다고 무작정 헤매고 다닐 수는 없다. 일단 밥벌이와 잠자리는 해결을 해야하니까.


베르사이유궁 인근에는 당연히 궁에서 일하거나 궁에 물품을 대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제법 번화한 거리가 있다. 왕의 총애를 받거나 받는, 혹은 미움을 받는 귀족이라도, 베르사이유에 저마다 저택을 마련해두고 이곳을 오가기 때문에 이곳은 부유층이 모여사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사는 곳은 확실히 분리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걸어갈 거리에 있는 건 사실이었다.

 

“베르사이유에 사는 것은 파리의 거리에서 사는 것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습니다. 파리에서 쓰던 모든 기술들은 여기서도 잘 통했지요. 저는 또래보다 힘도 세고 눈치도 빨라서 잔심부름이든, 물긷기나 나무하기 같은 힘든 일이든, 뭐 급하면 소매치기나 좀도둑질도 잘 하는 편이라 걱정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첫날밤만은 숲에서 이슬을 맞으며 추위에 떨어야 했는데, 그게 가장 큰 고생이었던 정도니까요.”

“야성이 살아있는 소년이었던 거군요. 그래 첫날밤 고생 후에는 어떻게 되었소?”

“거리로 나가서 무작정 가게에 들어가 일손이 필요하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이런 곳이라면 사람 구하는 가게는 항상 있게 마련이고, 특히나 아이들은 더욱 환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른보다 힘은 약해도 손이 빠르고 몸이 유연한 아이들이 필요한 일은 늘 있었거든요. 무엇보다 아이들은 품삯이랄 게 거의 없이 부릴 수 있으니까요.”


콜드웰 선장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아이라고 그냥 부려먹는다는 건 말이요···. 하긴 내가 어릴 땐 아이들을 납치해다가 팔아먹는 일도 비일비재했던 것에 비하면 나아진 것이긴 하지만··· 뱃사람들 중에선 특히 그런 경우가 많았소. 요즘은 그래도 같은 기독교도라고 하면 노예로 팔지는 않으니까 발전이라면 발전이랄까.”

“아이들을 선원으로··· 그런 일도 있었군요. 저는 아이들을 유괴하는 일이 가끔 있긴 하지만 어차피 그런 아이들은 어느 귀족집에 팔려가서 하인이 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실은 당시의 저로서는 받아주는 곳이 왕궁이기만 하다면 유괴를 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심정이었지요."

"하긴 가난한 집에서 자라느니 부잣집 하인이 되는 게 나을 수도 있지요. 일단 먹고 입는 것은 확실히 해결이 되니까요."


콜드웰 선장이 다시 혀를 찼다. 차라리 범죄의 대상이 되는 것이 행운이라는,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괴를 당하기는 제가 눈치가 너무 빨랐을 겁니다. 그걸 기다리고 있을 일도 아니고요. 몇 군데 문을 두드리지 않아서 어느 푸줏간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일단은 저에겐 나쁜 조건은 아니었지요. 이곳에선 소, 돼지를 잡고 난 부산물과 가공품을 제법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거든요.”

“다행한 일이었군요. 그러니까 거기가 베르사이유 궁정요리사의 시작이었던 게군요.”

“네. 바로 그렇습니다. 거기서 처음 요리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된 것 같습니다. 소와 돼지를 도축하면 정육은 바로 팔려나가지요. 하지만 내장, 피, 기름, 이런 것들은 수요도 많지 않은데 고기보다 훨씬 빨리 상하는 부위지요. 이 남는 것을 알뜰하게 가공하는 것이 푸줏간의 주부인 안느의 일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을 도와주며 처음으로 칼을 다루는 법, 여러가지 고기 부위와 채소의 이름 및 쓰임새, 허브를 배합하고 밑간을 하는 법 등을 익힐 수 있었지요.”

“안느라는 분이 말하자면 첫 스승이었군요.”


그러고보면 안느를 만난지도 꽤나 되었다. 지금쯤이면 70살은 넘었을 텐데, 살아는 있을까? 베르사이유에서 직위가 높아지면서 궁밖 출입도 더 어려워지고 바빠진 탓이라고, 게다가 지금은 아에 프랑스에 있지도 못하는 신세니까..., 그렇게 핑게를 대보지만 기회가 있을 때 찾아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안느는 저를 참 귀여워해줬어요. 안느에게 이런저런 육가공제품을 만드는 법을 배운지 몇 달 만에 좀도둑질이며 싸움질은 딱 그만두었습니다. 그만두자고 생각해서라기보단 식재료를 다루고 요리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일들은 시시하게 느껴졌거든요. 안느가 만든 소시지를 드셔보신다면 제 말뜻을 이해하실 겁니다. 지금도 소시지는 제가 자신있어하는 요리입니다. 궁정에선 그다지 대접받지 못하는 서민요리라서 써먹을 기회가 많지 않긴 하지만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처음 배를 탔을 때가 생각이 나는군요. 나는 선장집에서 태어나서 아버지로부터 일을 배워서 그런 우여곡절은 없었지만, 처음 키를 잡았을 때의 느낌이란 것이 아직도 생생해요. 살아있다는 그런 느낌, 그런 느낌 때문에 내가 아직도 이렇게 배를 몰고 있는 거겠지요. 어언 오십년이요 처음 그날로부터.”


콜드웰 선장의 미간 사이가 좁혀지고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다. 공감과 회상이 동시에 떠오르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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