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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미소년 뻬뺑과 공감능력자 콜드웰

대서양 항해의 중요 기항지 마데이라섬

“푸줏간 일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배달일도 하게 되었습니다. 안느의 소시지뿐 아니라 푸줏간의 고기에 대한 수요도 어마어마했지요. 어쨌든 고귀하신 나리들이 궁전이나 저택에서 짐승의 피를 보시는 것은 안 될 일이니까요. 사냥한 짐승은 예외지만요."

"고관대작님들의 저택으로 배달을 다녔군요."

"꼭 그런곳만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도 처음 그 때를 떠올리면 눈앞에 환한 빛이 쏟아져내리는 것같은 기분이다. 처음 베르사이유궁전의 문을 들어섰을 때.


"정기적으로 가는 배달처 중에서는 베르사이유궁도 있었습니다. 안느의 소시지는 궁에서 만든 것보다 낫다는 평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궁의 주방 뒷문으로 처음 들어갔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지요. 그 어마어마한 규모란."

"궁이란 곳은 주방마져도 엄청나게 화려한 곳인가보군요."


콜드웰 선장의 호기심 어린 추임새다.


"하하, 그럴리가요. 숯검댕과 음식물 쓰레기가 항상 있는 곳인걸요. 궁에서 화장실 다음으로 초라한 곳이 주방일 겁니다. 하지만 규모 하나만은 대단했지요. 화려한 것으로는 나중에 거울의 방을 보았을 때 정말 현기증이 나서 방향감각을 잃을 뻔 했습니다. 어찌나 번쩍이고 화려하던지요."

"흠, 그 유명한 거울의 방을 직접 보셨다니 부럽구려."


재력으로 보나 지위로 보나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콜드웰 선장이지만, 역시 궁정생활은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 남은 인생에도 궁정의 만찬 같은 것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하인이자 고용인이긴 하지만 궁정인이 되는 것은 이래서 보람도 있고 위신이 서는 일이다.


"거울의 방에 들어가기 까지는 우선 궁정의 정식 고용인이 되어야 한다는 숙제를 풀어야 했지요. 단순히 배달부로 만족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타고난 붙임성이 있는 편이라 궁을 드나들다 보니 궁문을 지키는 근위병들이나 주방의 하인들과도 말을 트고 친하게 지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궁에 한 번 들어가면 조금이라도 더 있으려고 재롱도 많이 피우고 그랬답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궁안의 생활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려고 했지요.”


콜드웰 선장이 묘한 웃음을 띄었다.


“장담컨데 근위병들보단 주방하인들, 그중에서도 여자들과 더 친했을 거요. 어릴 땐 상당한 미소년이었겠지요.” 


쑥스러운 척하기도 가식 같다. 선장의 지적은 정확한 사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여자들이 따르는 것은 타고난 팔자와 같은 일이었다. 궁의 하녀들은 평민이라도 외모가 뛰어난 여자들이 많았고, 이런 여자들도 나와 상대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선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솔직히 말해서 그렇습니다. 젊었을 땐 여자들에게 인기가 제법 좋았지요. 지금이야 뭐 나이가 들었고 결혼도 했지만··· 저를 유혹해서 밤을 보내려는 여자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아직 열서넛밖에 안 된 아이를 유혹하려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하실 지 모르지만 인간의 욕망이란 그런 거니까요. 제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는지를 아시니까, 제가 그런 면으론 상당히 조숙할 수밖에 없었단 건 이해하실 겁니다.”


콜드웰 선장이 계속해서 짖궂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 아름답고 달콤한 로맨스도 있었겠구려. 한창 호기심도 왕성할 때고, 하녀라곤 해도 궁정의 여인네들은 외모도 뛰어난 사람이 많으니까.”


콜드웰 선장의 짖궂은 미소엔 악의는 1그레인(grain)도 없었지만 나로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는 거지만 그때는 유혹에 넘어간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궁안의 그녀들 숙소에 제가 하룻밤을 머무른다는 것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선장님, 저는 사타구니는커녕 머리털도 제대로 나기 전부터 온갖 남녀관계가 벌어지는 곳에서 자랐습니다. ‘아름답고 달콤한’ 관계뿐 아니라 ‘추악하고 잔인한’ 결말들도 숱하게 보아온 터지요. 남자든 여자든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는 타고난 조심성이 갖춰져 있었다고 할 수 있지요. 당시로는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열정은 제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궁안의 사람들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영영 제 꿈이 멀어질까봐 두려웠지요.”


콜드웰 선장이 짖궂은 미소에서 눈을 약간은 크게 뜨고 조금은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별력 있는 청년, 아니 소년이었군요. 우리 배의 나이만 들고 철없는 녀석들이 뻬뺑씨만 같았어도 말이요···” 

“그래도 궁안의 여성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서, 말하자면 관리는 좀 했지요. 말상대가 되는 것뿐 아니라 가끔은 꽃을 꺾어주거나 여분의 소시지나 베이컨을 쥐어주거나 하면서요. 궁안의 모든 인연이 어떻게든 저를 궁안으로 이끌어줄 가능성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저에게도 이들 하녀들이 소중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이 원한 방식은 아니었겠지만요.”


시간은 이제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선장과는 보통은 저녁식사(프랑스인 다운 긴 저녁식사긴 해도) 자리의 한담인데 오늘은 마데이라 와인을 곁들여 꽤나 길어졌다.


“이 다음부터가 더 흥미진진하겠군요. 그런데 늙은이는 이제 피곤해서 말이요. 내일은 입항하는 날이니까 이제 슬슬 잠을 자두는 게 좋을 것 같소.”

“아 네. 쉬십시오. 이야기를 나눌 날은 많이 있겠지요.”




세인트주드호는 새벽 안개가 걷히자마자 입항을 시도했다. 


우선 접안할 곳을 정하고 깃발로 신호를 한다. 그리고는 배의 돛을 모두 감아올리고 타력으로 접안지까지 접근하는 것이다. 작은배라면 이것으로 그만이다. 접안시에 혹 힘조절을 좀 실패해도 큰 충격은 없다. 하지만 세인트주드호 정도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1000톤이나 되는 덩치는 속도 조절을 잘 하지 않으면 소꿉장난감 같은 다른 배들은 물론이고 접안시설까지 다 박살을 내고 배가 뭍으로 올라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큰 세인트주드호지만 선장의 노련함과 선원들의 팀웍, 그리고 비교적 넓고 평탄한 푼찰항의 지형 덕에 큰 어려움 없이 접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보기보다는 훨씬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게다가 사실은 오늘 새벽에 약간의 사고가 있었다. 랜디라는 선원이 술에 취해 뭔가에 기분이 상해 난동을 부릴 때였다. 덩치도 크고 성질이 사나운 편인데다가 술이 취해서(항상 술에 취해있는 편이긴 했지만 그날은 심했다) 다들 손을 못 대고 있을 때였다. 선장이 정면으로 직접 다가가 목덜미를 잡고 뺨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랜디? 술이 많이 취했군. 내 말 들리나?”


누군지에게도 모르게 욕설을 퍼부으며 물건을 마구 던져대던 랜디가 순간 기세가 급하게 수그러들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손발을 마구 놀리던 것을 멈췄다.


“랜디. 오늘은 한 잠 자고 쉬게. 깨어나면 나에게 와. 천천히 얘기를 해보자. 이제 일단 들어가.”


그 몇마디에 거짓말같이 어깨를 늘어뜨린 랜디는 얌전하게 아랫층 갑판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겁을 먹었을 뿐이요. 키우는 개나 고양이도 흥분할 때가 있지요. 가만히 안아주고 다독이면 일단 진정이 되지 않소? 사람도 다르지 않아요. 아마 가족이나 그런 문제로 고민이 많은 모양이오. 일단 들어봐야 알겠지요.”


어안이 벙벙한 내 표정을 보며 선장이 싱긋 웃었다.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바다 사나이들이다. 내가 너보다 세다라는 걸 보여주는 것으로 서열 정리가 되는 이 사회에서 굳이 위세 떠는 것이 없이도 선원들을 휘어잡는 능력은 아마도 공감력이 바탕일 것이다. 선장의 얼굴을 보다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공감력이 뛰어난 사람인지 느끼게 된다. 표정이 풍부하고 대개는 부드럽다. 단호해질 때나 사람을 꾸짖을 때도 욕설을 하는 법이 없는 것은 뱃사람으로서는 오히려 상식 밖의 일이다. 기분이 나쁘거나 야단을 칠 때도 조금 천천히 힘을 주어 말하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뿐, 그것으로 거친 선원들이 고분고분해지는 일은 몇 번이나 보았다.


이런 건 주방장으로서도 배워야할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 주방도 거칠고 험한 노동의 연속이다. 날붙이와 끓는 기름과 불 같은 것이 사방에 널려 있어서 자칫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쉽다.  게다가 남자들만 있는 곳이라 분위기는 때로 살벌해진다. 거친 녀석들을 통솔하기 위해서라도 나도 거칠게 나가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해서 때론 욕설도 퍼붓고 때론 말 그대로 엉덩이를 걷어차 내쫓기도 한다. 


콜드웰 선장을 보니 그런 방법이 능사가 아님을 알겠다. 결국 공격성은 두려움에서 나온다는 것, 좋은 것을 배웠다.


배의 선장은 배위에서는 사법권도 쥐고 있다. 형벌에 따라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생사여탈권까지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선원들도 작당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일은, 특히나 대양항해에서는 전혀 드믄 일이 아니었다. 


해도에도 안 나오는 곳을 탐험한다거나 해적이 들끓는 해역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동기부여가 필요한 일이고, 일단은 동의해서 항해를 시작했다가도 뭔가 좀 안 풀리면 중간에 마음이 바뀌는 일도 어찌보면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니 선장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선원들의 마음에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두려움을 심어주려는 편인데 콜드웰 선장은 별로 큰소리를 내는 법도 없다. 보통의 노인네가 저런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는 당장 만만히 보고 돗대에 매달겠다는 녀석이 나올 것만 같은데, 선장은 욕설이나 폭력 없이도 완벽하게 선원들을 통솔하고 있다. 물론 일생 쌓아온 업적과 명성이 바탕이 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마데이라는 대서양을 건너오가는 배들의 중요 기항지 중 하나다. 카디즈나 브리스톨, 리스본, 마르세이유 등이 최종목적지이긴 하지만 마데이라나 카나리아제도의 여러 항구들에서 이렇게 숨을 한번씩 돌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야 순풍을 타고 1주일 남짓한 시간이 걸렸지만 대서양 건너편에서 몇 달이나 걸려 여기까지 왔는데 기항을 안 한다면 내가 선원이라도 반란을 일으켜 선장을 몰아내고 싶을 것 같았다. 하물며 이곳은 마데이라 와인의 산지로 유명한 곳 아닌가, 내가 마데이라의 이름을 아는 것도 바로 그 마데이라 와인 덕이다.  프랑스 와인에야 비하겠을까만··· 


마데이라에서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이다. 잉글랜드에서 실어온 화물인 유리제품 및 금속공예품, 총이나 시계 같은 공산품과 브랜디 등을 일부 처분하고 선창에 공간을 만든다. 


마데이라는 아메리카에서 팔릴만한 것이라고는 노예 정도 말고는 별 것이 없다. 콜드웰 선장은 노예는 절대로 취급하지 않는 방침이기도 하고, 그나마도 제대로 노예무역을 하는 치들은 서아프리카 해안까지 가서 직거래를 하기 때문에 이곳 마데이라의 푼찰항은 주로 두 달 이상은 걸릴 대서양 횡단을 위해서 휴식도 취하고 보급품을 사모으고 하는 활동을 하는 곳이다. 선창의 여유공간도 대부분 보급품으로 채워진다.


보금품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콜드웰 선장은 식료품과 술에 관한 것은 나에게 일임해서, 페드로 및 몇 명의 선원들과 함께 물건을 조달하기 위해 자유롭게 푼찰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마데이라는 상당히 큰 섬이지만 본래 무인도였다고 한다. 300년쯤 전부터 이민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섬이다. 초기에는 사탕수수 재배가 중심이었고, 전설로는 초기 이민자 중에서는 크리스토퍼 콜럼부스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콜롬부스가 여기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지만 대서양 항해 중에 기항을 했던 것만은 확실한 사실인 것 같다.


콜럼부스는 여기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대서양 건너에다가 사탕수수 농업을 전했다. 종자만 전한 것이 아니고 노예농법을 함께 전했다. 콜럼부스는 카리브해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렸고, 그 결과 지금은 원주민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하는 일이 그렇게나 큰 돈벌이가 된 것이었다. 


우월한 기후조건과 무자비한 노예 노동을 기반으로 한 아메리카의 사탕수수 농업은 비싼 운송비에도 불구하고 마데이라나 다른 지중해 섬들보다 훨씬 효율적인 것으로 판명이 났다. 그전엔 이 마데이라나 카나리제도, 동지중해의 키프로스 등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다고 하는데, 이제 유럽에서 사탕수수 농장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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