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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행복치 = 경험치 - 기대치

행복해지는 여러가지 방법


“그거 아시오? 행복은 경험치에서 기대치를 뺀 값이란 것.”


콜드웰 선장이 갑자기 알쏭달쏭한 소리를  툭 던진다. 순간 응대를 못하고 머리속으로 경험치와 기대치란 추상적인 단어로 덧샘 뺄샘을 시도하고 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가 된다는 말도 있지요. 늘 하다보면 선원들이 당연하게 생각한다오. 남은 보급품을 처분한 돈으로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지만 이걸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게 하는 것은 뭔가 내 실수였나 하고 있소. 이제부터는 이 보너스를 안 준다면 나를 돗대에 메달지도 모르겠소.”


선장이 농담을 섞어 의미있는 말을 던졌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다.


“그러고보니 저도 경우는 다르지만 궁정요리사로서 비슷한 것들을 느꼈지요. 아무리 화려해도 계속 그 이상을 원하는 궁정의 분위기를 말입니다. 계속 더 화려하고 기이한 것을 추구하는 궁정의 중독증세엔 아주 지쳤었지요. 화려함을 위한 비용은 결국 백성들을 쥐어짜서 나오게 되는 것이니 그에 대한 죄책감도 느꼈고요. 정작 귀족들이나 마담 뽕빠두르 같은 분들은 쥐어짜면 나오는 것을 당연한 걸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요. 선장님 말씀하신 등식대로 하자면 이분들의 행복은 쥐어짜는 액수가 커져야만 늘어나겠군요. 기대치는 줄어들지 않..., 아니 오히려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겠군요. 프랑스왕국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건 뱃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요. 함선의 척수부터 시작해서 장비 같은 것이 점점 영국을 따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오. 이제는 프랑스 연안도 영국이 진입하기 어려운 지중해 방면에서나 프랑스가 좀 기를 펴지 대서양쪽으로는 완전히 제해권을 넘겨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국 왕세자를 모시고 일하기도 했지만 나는 역시 프랑스 사람. 언제나 마음속으로는 프랑스가 잘 되길 기원하고 응원하고 있다. 프랑스를 위하는 마음은 또한 왕 폐하를 위하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점점 부르봉 왕가의 존재가 프랑스에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도 해서 마음속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시던 선왕 루이 14세 때와는 달리 지금은 왕실 자체를 아예 폐지하자는 과격한 주장도 나오고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영국과 같이 의회의 권한을 강화해서 왕실을 견제해야 한다는 정도는 이미 궁정의 고용인인 나같은 사람도 듣고 있는 이야기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들의 의견은 분명 일리가 있다. 나도 때로는 왕실이란 것이 없는 편이 나라를 위해 더 다행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이 들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소리를 하는 볼테르나 디드로 같은 사람들을 왕실에서도 사치의 핵심이라고 할 마담 뽕빠두르가 후원한다느니 하는 것은 이상하지만 말이다.


생각이 마담 뽕빠두르에게로 이어지자 새삼 분노가 치밀고 어쩌지 못하는 마음의 질주에 말을 잃게 된다.

그런 분위기를 알았는지 선장이 또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던진다.


“나는 그보다 뻬뺑씨가 하선하고 난 후가 걱정이라오. 이제 배 위에서도 육지의 선술집보다 더 좋은 음식을 먹는 게 익숙해졌을 테니 영국으로 돌아갈 항해, 또 그 다음 항해들이 걱정일 수밖에 없소.”


선장이 농담인지, 칭찬인지, 불만인지 모를 말들을 역시 구별이 안 가는 기색으로 늘어놓는다. 일단 뭔가 생각이 나자신으로 돌아오며 말문이 풀린다.


“아, 저···, 그거라면 페드로를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번 항해에서 먹었던 음식은 대부분 페드로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선 전까진 좀 더 잘 가르쳐두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어쩔줄을 몰라 주절거렸다.


“글쎄. 페드로와 뻬뺑씨의 차이가 몇 주 더 노력한다고 메워질 정도는 아닐 것 같소. 같은 음식을 할수록 뻬뺑씨의 솜씨가 더 그리워지기만 하겠지요.”


선장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러면 어째야 하는지,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몰라 정말 꿀먹은 벙어리같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선장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스턴(후미)쪽으로 걸어갔다. 나도 선장에게 절로 이끌려 스턴쪽으로 이동했다. 


“이럴 때가 위험할 때요.”


바다는 위험은 커녕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더위를 식혀주고 석양은 아름답게 바다를 물들여가고 있는 저녁때다. 하지만 알겠다 무슨 이야기인지.


“바다란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주방에서도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도 서로들 방심하지 않도록 주의를 하지요.”

“그렇지요. 조직을 지휘하는 입장에선 순탄할 때도 어려울 때를 미리 걱정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그런데 지금 위험은 그런 조심하는 태도의 문제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것이오."

"구체적인 위험..이요?"


항해 중반에 대단치 않은 폭풍을 만나서도 선원을 잃었던지라 선장이 진지하게 위험을 말하자 온 몸에 긴장이 곤두선다.


"우리가 너무 빨리 바다를 건넌 탓이라고 할 수도 있소. 이보다 2~3주 정도는 더 걸리는 게 보통인데... 햇빛이 뜨거워도 여긴 나름으론 아직 겨울이라 바다가 거칠 때지요. 이맘때가 카리브해에서는 가장 바람이 변덕일 때라오. 늦여름에서 가을의 허리캐인 시즌같이 강한 바람은 아니지만 그 바람의 변덕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소. 이 배는 덩치가 커서 바람을 잘 받으면 이렇게 눈깜짝할 사이에 바다를 건너지만 카리브해에 가면 수많은 섬들 사이에 있는 산호초만해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라오. 그런데 바람은 북동에서 남동사이로 수시로 방향이 바뀌지요. 차라리 한겨울이 되면 조금 편차가 줄어드는데 말이지요.”

“그렇군요. 그래도 크게 걱정할 것은 없겠지요? 초행길도 아니고 하니까요.”


배에 좀 익숙해졌다고 마음을 놓을만 하면 이렇게 위험요소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글쎄, 확률은 적어도 한 번 사고가 나면 모든 것이 끝이라서···. 일단 카리브해에서 처음 기착할 네비스(Nevis)항은 나로서는 익숙한 곳이라 산호초의 위치 같은 것은 잘 알고 있소. 갑자기 미친듯이 바람이 방향을 바꾼다면 알아도 소용이 없겠지만··· 그래도 시간을 많이 벌었으니 천천히 조심스럽게 들어갈 여유가 있어서 괜찮을 거요. 뭐든 서두를 때 문제가 되는 법이거든요.”


듣고보니 내가 걱정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배위의 일은 대개는 그렇지만.


“그거야 저로선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이니 저는 선장님만 믿고 크리스마스 음식이라도 만들어 보겠습니다. 지금 계산대로라면 네비스 입항할 때쯤이면 크리스마스인데, 선원들도 이날은 즐겨야겠지요. 그야 크리스마스 전에 입항하면 제일 좋겠지만, 네비스항의 선술집보단 배의 크리스마스 음식이 더 좋아서 배에 남겠다고 할 정도로 해보겠습니다.”

“하하, 배의 음식이 좋아 하선을 안 하겠다는 선원의 이야기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는 걸. 하긴 베르사이유의 궁정요리사가 일개 상선의 갤리에서 주방장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도 처음이긴 하지요. 빼뺑씨 꼭 부탁하오. 보급품도 많이 남았으니 그럼 이번 크리스마스는 나도 같이 술창고를 개방하고 즐겨볼까 합니다.”

“맡겨주십시오. 선장님은 안전한 입항을, 저는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책임지는 것으로 하지요.”


내가 가슴을 탁탁 치면서 자신있게 말했다. 선장은 말없이 미소를 띄우더니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는 선실로 내려갔다. 


배 위에서 근사한 크리스마스 파티라니, 베르사이유에서의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한숨부터 날 일이긴 하다. 하지만 어딘가 신이 나고 의욕이 솟는 것을 보니 이렇게 제약이 많은 상황에서 뭔가 해내는 걸 좋아하는 게 내 성향인가보다.




실은 믿는 구석은 많았다. 


무엇보다 행복치 = 경험치 - 기대치라는 콜드웰 선장의 공식이다. 


베르사이유 같은 화려한 파티를 할 능력은 없지만 배의 선원들도 베르사이유의 귀족나리들은 아니다. 일반적인 평민가정의 생활을 생각해본다면 칠면조 구이 정도만 나와도 감격할 것이다. 일단 기대치가 낮으니 행복치를 올리기 쉽다.


칠면조가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순조로운 항해 덕에 소도 한 마리 남았고, 달걀도 많이 비축해 두었다. 밀가루, 와인, 기름과 설탕 등의 식재료도 풍부하다. 채소는 다 먹어치운지 오래지만 그래도 양파와 마늘만은 아직도 풍부하다. 


우선 소를 잡아서 해체를 지시했다. 실은 나는 소를 잡는 것은 물론이고, 부위별로 정형하는 것도 해본 일이 없다. 안느의 푸주간에서 일할 때에는 너무 어려서 소잡는 일 같은 것은 경험해보지 못했다. 피를 보는 흥분이 묘하게 좋아서 구경은 많이 했지만 아이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후로는 궁 안에 들어앉아 도축되고 잘 정형된 고기를 받아서 요리를 했고 말이다.


반면 장거리항해를 여러 번 한 주방장인 페드로는 소잡는 것과 그 소를 정형하고 발골하는 것에 상당히 능숙하다. 소 정형하는 칼을 따로 챙길 정도니 말이다. 


그리고 또 챙기는 것. 이번에도 나에게 이죽거리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소 한마리 잡을 줄 모르면서 먹는 입만 발달해서는··· 이래서는 왕궁의 개나 다를 바가 없잖소 셰프님.”


듣자면 화가 나는 얘기고 사실도 아니다. 먹는 입만 발달하다니···, 요리하는 손은 인정 안 하는 건가? 하지만 그냥 웃어넘기고 만다. 페드로와도 이런 정도 농담은 그러려니 할 정도로 서로 이해하게 되었고 신뢰도 쌓였다. 살아온 곡절을 들어보면 이런 정도 못된 입버릇으로 달래진다면 얼마든지 들어주겠다 싶은 정도다.


“그래 페드로. 나도, 선원들도, 선장님도, 영국과 프랑스의 국왕님들도 다 네 덕에 먹고산다. 빨리 소나 잡아다오.”


나도 제법 빈정거림을 담았는데 페드로의 정신구조는 나름 편리한 데가 있어서 이럴 때는 또 칭찬으로 듣는 것 같다. 말꼬리도 안 붙이고 신이 나서 소를 잡으러 달려간다. 




크리스마스 음식에 대해 호언장담을 하긴 했지만 실은 대단한 것을 할 것은 아니다. 쇠고기를 시즈닝을 잘 해서 숙성시킨 후에 직화에 구울 작정이다. 단순한 요리지만 소금과 후추의 간을 적절히 하고 숙성을 잘 시키면 감칠맛이 폭발한다. 거기에 참나무와 올리브나무가 섞인 장작의 불향이 배면 호화로운 느낌을 주는 대단한 요리가 된다. 요리란 재주를 많이 부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기본을 잘 갖추면 된다는 내 지론을 증명해주는 요리기도 하다. 


더위에 상하기 쉬워서 무엇보다 고민인 내장은 소시지로 만들 작정이다. 이거야말로 소년 시절부터 갈고 닦은 내 기술과 경험으로 무엇보다 자부심을 가지는 분야다. 나는 소의 내장을 청소하는 더럽고 냄새나는 일도 기쁘게 할 수 있다. 게다가 여기는 신선한 소금물을 무제한 쓸 수 있으니 일하기도 한결 쾌적하다. 


속은 무엇을 채울까. 배에 남은 모든 재료를 다 활용해서 다양한 소시지를 만들 것이다. 밀과 귀리 같은 곡물과 소의 피와 자투리 고기를 다져넣는 것은 기본적인 버젼이다. 올스파이스로 향을 낸 소시지 같은 것은 선원들은 커녕 베르사이유의 나으리들도 못 드셔보신 것일 게다. 올스파이스는 모든 향신료를 합친 것같은 향이 난다는 향신료다. 카리브해가 원산이라고 하고 후추나 정향 등에 밀려서 그다지 많이 쓰지는 않는 향신료다. 가격은 후추에 버금가게 비싸다. 하지만 이런 대양무역선에서는 의외로 향신료가 흔해서 올스파이스라면 부족하지 않게 쓸 수 있다.


한 번도 안 해본 생선살로 속을 채운 소시지를 해볼까. 비리고 약한 생선살을 제법 두터운 소의 내장속에서 어떻게 조화시킬까, 이건 쉬운 문제는 아니겠군.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니 뭔가 의욕이 샘솟는 느낌이다.


거기에 남은 마데이라 와인이며 맥주를 잔뜩 마시게 해준다면 선원들은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이 정도로도 충분하겠지만,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없어서는 크리스마스가 아니지. 밀가루에 달걀을 넉넉히 넣고 맥주로 반죽을 했다. 쓴 맥주는 케이크 반죽을 부풀리기 위해서 조금만 쓴다. 이게 홉이 적고 보들보들한 프랑스식 맥주라면 좀 넉넉히 넣으련만. 맥주반죽에 설탕을 넉넉히 넣고 잘 치대서 부풀린 다음에는 이 케이크에 들어갈 ‘비장의 무기’를 만든다. 


비장의 무기란 ‘로코코의 사과’의 소박한 버전이다. 마데이라에 도착했을 때 남은 사과를 가지고 만들어 둔 것이다. 본래는 갖가지 향신료를 듬뿍 써야하지만 그나마 여유가 좀 있는 것은 올스파이스뿐, 하지만 올스파이스가 다양한 향을 내주어서 굳이 여러가지 향신료를 안 써도 상당히 맛이 난다. 거기에 스타 아니스 정도를 넣었다. 약간 찐득할 정도로 졸인 것은 내 취향은 아니지만 덕분에 장기의 항해도 잘 버텨주었다. 이것을 반죽에 넣어서 케이크를 만드는 것이다.


기왕에 부풀려 두었던 반죽에 럼주와 나의 비장의 무기를 넣고 밀가루를 더해서 다시 반죽을 하고 숙성을 한다. 한 번 다시 부풀리는 것이 포인트. 두 번 부풀린 반죽은 부드럽고 폭신한 질감을 준다. 입안에서 뭉게구름이 피어났다 지는 기분일 거다.


같은 음식이라고 해도 솜씨에 따라 맛은 천양지차. 거기다가 선원들은 평생 상상에서나 먹어봤을 음식들도 있다. 게다가 하선해서 먹자면 돈이 꽤나 들 것이다. 항구의 술집들은 애초에 가격이 좀 터무니없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술이라도 취한다면 주머니 속에 든 걸 홀딱 빼앗기고 기억도 못하는 일도 비일비재다. 뱃사람들이란 거칠기나 하지 흥정을 한다거나 하는 일들은 다들 잼병에 가깝다. 


이 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는 크리스마스. 파티는 성대하고도 추억이 될만한 것으로 하고 싶다. 이 정도 크리스마스 파티면 아마 오귀스뜨 뻬뺑이 배를 떠나고 난 후에도 크리스마스만 되면 뻬뺑 타령을 할 정도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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