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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메뜨르도뗄의 책임감

자존심에 목숨을 건 직업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급발탁이었다. 


주방에서 20년 넘게 일한 쟈끄(처음 나를 궁에 채용하라는 이야기를 전달한 그 자끄다)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질투를 했지만, 사실 나말고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자명해졌다. 


선대와 같은 불호령이나 후한 상급은 없었지만 마담 뽕빠두르는 언제나 폐하의 기분에 따른 평가를 주방에 알게 했다. 꼭 불호령을 받지 않아도 뭔가 인사고과가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라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인사고과를 떠나서 선대같이 갑자기 다이아몬드나 비단옷이 내려오는 것은 아니라도 급여보단 훨씬 큰 것이 은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에 누구든 마담 뽕빠두르의 의견에 촉각을 세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담 뽕빠두르가 폐하께 속삭이는 이야기대로 왕국이 돌아간다는 것이 세간의 정설이니까.


누가 뭐래도 폐하의 심기를 살피고 폐하를 위해 모든 것을 세심하게 준비한다는 면에서는 마담 뽕빠두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약간은 우울증을 타고 나신 폐하의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서 음식이며 공연이며 여러 손님들을 초대한 만찬이며를 기획하는 것이 그녀의 주된 일이다. 


하물며 폐하의 취향에 맞춰서 젊고 아리따운 여자들을 소개하는 일까지 챙기고있다고 하니 말 다했겠다. 그래서 마담 뽕빠두르는 '생선' 말고도 '뚜쟁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 같다. 그에따라 폐하께서는 일종의 정서적인 의존 같은 것이 생기셨는지 공공연히 새로운 정부와 만남을 가지시면서도 마담 뽕빠두르와의 관계는 더 돈독해지고 있다는 평이다. 실은 이 부르봉 왕가의 남자들은 어딘가 여성에 대한 정서적 의존증이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장군과 대신, 추기경들도 마담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가까이 지내보려고 하던가, 혹은 어떻게든 그녀와 폐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온갖 모략을 꾸미거나 하는 정도다. 그러니 하인들이야 뭐 말할 것도 없다. 마담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막 로띠셰가 되어서 만족 이라는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만족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결국은 궁정의 하급 고용인일 뿐이었지만 아직 젊기도 하고, 궁에 들어오기 전의 삶을 생각하면 매일 식사때마다 드리는 감사기도는 진정으로 넘쳐났었지요. 당시엔 아직 신앙심이란 것이 남아있을 때입니다."

"그럼 지금은 신앙심이 없단 애기요? 아, 참고로 저는 대대로 카톨릭 신자이긴 합니다만 교회 따지는 가지도 않고 물론 헌금같은 것도 내지 않지요. 바다 위에 사는 인생의 특권이랄까요."


선장이 먼저 자신의 '신앙고백'을 한 것은 자칫 민감한 질문에 편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한 배려일 것이다. 프랑스는 카톨릭과 신교의 항쟁에서는 일단 카톨릭이 우위인 상태로, 앙리4세 폐하께서 낭트 칙령으로 신교 신앙을 용인하셨지만 선대의 루이 14세 폐하께선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칙령을 철회하셨다. 그 후론 신교도들은 프랑스에서 내놓고 박해의 대상이 되어서 신교도 국가인 잉글랜드나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지방 등으로 사람들이 이주해나가고 있다.


"사실, 저의 신앙이란 것은 그냥 남들이 다 믿으니 저도 믿는다는 것이었지요. 제대로 교회를 가거나 세례를 받은 적도 없습니다. 제 출신을 생각하면 이해하시겠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 사회, 그것도 신앙에 엄격한 궁정에서 계시면서 신앙심을 버리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궁정생활이 결정적이겠지요. 한 사람으로선 이해할 수 있지만 신앙심 깊다는 국왕이나 귀족들 뿐 아니라 때로 성직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어진 결혼을 무시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으니까요."


콜드웰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도 납득할만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신앙을 버리는 것은 때로 목숨이 위험한 일인데 사람들이 바람을 좀 피운다는 이유로 믿음을 버린다는 것은.


"궁정의 하인이 되면 높으신 분들의 여러가지 사정을 알게 되지요. 회의 자리에 음식이나 술을 가져다 드리는 과정에서 원치 않더라도 많은 것을 보고듣게 되니까요. 친애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국왕폐하시지만 솔직히 전쟁이나 세금 문제 등을 논하실 때는 백성들은 그저 세금을 내고 농산물을 생산하고 군인이 되는 부품들, 숫자들로만 보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귀족들은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어도 절대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도요. 한마디로 우리같은 사람들은 목숨도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주님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 교회의 믿음 아닙니까? 저로서는 도저히 이런 모순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신교도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았고요. 신을 믿는다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졌습니다."

"세속의 인간들에게 실망한 사람들은 많지만 그럴 경우 다른 신앙을 찾거나 하는 법인데 뻬뺑씨의 경우는 상당히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거군요. 모든 신앙을 다 부정하다니."

"저에게는 어쩌면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전지전능하고 공명정대한 신같은 것이 있다면 세상이 이럴 리가 없지요. 전지전능하지 않거나, 공명정대하지 않거나, 아니면 둘 다 아니거나 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본질을 보았다 싶으면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제 습성입니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이런 본마음을 숨기는 것이었지요."

"나도 비슷하오.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겼지만 하나님 찾고 있는 시간에 뭔가 행동을 하는 것이 낫지요. 정말로 마지막 순간에 주저앉아서 누군가의 구원을 바라기보단 되든 안 되든 행동으로 옮겨서 목숨을 건진 적도 많고 말이오. 그리고 무엇보다 배 위에서, 그리고 외국의 항구에서 온갖 생김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일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오."

"어떠 생각이 말입니까?"


콜드웰 선장이 장난기 서린 것같은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다는 거요. 기독교 국가에서 성직자들과 왕족, 귀족들이 벌이는 거짓 놀음은 아프리카의 흑인 왕국에서도, 술탄의 무슬림 국가에서도, 하다못해 아메리카의 작은 부족사회에서도 다 비슷하다오. 글런 놀음의 지배층이라면 혹시 모를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단호히 아니오 라고 말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오. 배로 따지면 악덕 선장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거지요. 나 자신도 해본 일이 있는 일이지만 성굥률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오."


선장집 아들로 선장이 된 사람이 선상반란이란 무슨 소리일까? 약가은 멍해져서 생각하고 있는데 선장이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 로띠쉐 뻬뺑씨의 베르사이유에서의 승승장구 이야기를 더 들어봅시다."





"궁에 납품을 하러 오는 농부의 딸인 마리와 결혼을 한 것도 로띠쉐가 된 얼마 후입니다. 농부라지만 궁정에 납품하는 대농의 집이라 마리는 부르주아의 딸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며 교육도 받았고 숫자나 문서에는 약한 저의 일을 도와서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었지요. 거기에 몇 번의 유산을 경험하긴 했지만 결국 귀여운 아이도 태어났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아들 삐에르지요.” 

“어쩐일인지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결혼도 하게되고 그런 것 같더군요. 나도 정식 선장이 되고 처음으로 대서양 횡단 항해로 돈을 제법 만지게 된 후에 결혼을 했지요.”


상황이 좋으니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인지 결혼을 하니 상황이 좋아지는 것인지는 아리송하지만 여하튼 그 때의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는 행복의 상태였던 것은 분명하다. 아니, 어쩌면 이런 행복에 좀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인생이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선대 때보다는 많이 조용해졌다지만 프랑스왕국의 궁정이라는 곳은 세상에서 이보다 더 화려하고 호사스런 잔치가 벌어지는 곳은 없다고 할 수 있는 곳이지요. 저는 미셸님의 가르침 밑에서 이런 행사들을 경험하면서 단순 요리사가 아니라 그런 행사들을 기획하고 연출하고 구현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미셸 바텔이란 분이 후임 메뜨르도텔로 뻬뺑씨를 눈여겨 보신 모양입니다.”

“딱히 그렇게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그때쯤엔 궁정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돌고 있었던 때입니다. 실은 제 커리어에서 결정적인 한 획을 그을 때가 왔지요.” 

“어떤 일입니까?”

“바로 루이 15세 폐하의 결혼식이었습니다.”


지금의 루이왕 15세 폐하께서는 아직 아기 티를 벗지 못하던 다섯 살에 왕위에 오르셨다. 루이 14세 폐하께서 워낙 장수하신 반면 후손들은 요절한 터라 왕세자도, 그 아들도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선대왕의 증손자인 루이 아기왕의 즉위 초기에는 삼촌인 오를레앙의 필립공작이 섭정으로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폐하가 13세 되던 해부터 친정을 하시고 그 얼마 후에 혼례를 올리게 되셨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과 가장 가난한 공주의 결혼’이라고 사람들이 수근댔던 결혼이었습니다. 폴란드 공주와 프랑스 왕이라니, 그것만으로도 격이 안 맞는데 심지어 배필인 폴란드 공주 마리아님은 말이 공주지 실은 왕좌에서 밀려나서 프랑스로 망명 온 왕가의 딸이었으니까요. 프랑스 바깥, 특히 본국 폴란드에서는 공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초라한 신분이었습니다. 


그 결혼에 얽힌 정치적 이해관계의 득실이야 제가 짐작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수근거림이 있으니만큼 더욱 장대하고 화려한 결혼식이 필요했지요.


“그런 엄청난 행사라면 주방장의 책임이 막중했겠습니다.”


물론이다. 하지만 이번 행사에서는 단순히 주방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게, 막중한 주방장의 책임 이상이었습니다. 당시는 이미 미셸님도 연로하신 때였습니다. 본래 궁정의 일이란 요리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있지요. 청소와 단장, 정원 가꾸기, 수많은 손님들을 초대하고 접대하는 일, 선물을 주고받는 일 등을 모두 기획하고 관리하는 것이 바로 메뜨르도뗄의 일이고 바로 미셸 바텔님이 조상 대대로 해온 일입니다."

"그건 뭐랄까, 집사장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일은 아니군요."


물론이다. 프랑스 국왕의 메뜨르도뗄이라는 직분은 다른 나라의 왕가나 귀족가문에 흔히 있는 그런 집사장, 혹은 시종장과는 권한과 책임의 범위가 완전히 달랐다. 어쩌면 여왕과 시종장을 합친 정도의 일을 해내야 하는 자리라고나 할까. 어쩌면 바로 그런 성격 때문에 본인이 여왕이나 되는 듯 생각하고 있는 마담 뽕빠두르와 충돌이 빚어진 일일 수 있을 것이다.


"메뜨르도뗄은 요리사 이상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직분입니다. 한 예로 궁정의 그 지엄한 법도와 수많은 사람들의 의전을 챙겨야 하지요. 어느 지역의 주교님은 어떤 분이고 궁에서 어떤 자리에 서서 어떤 스타일(칭호)로 불리는지, 어느 지역의 공작님은 최근에 원수로 승진하셨는데 이 분을 공작으로 불러야 할지 원수로 불러야할지, 또 그에 따른 의전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이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이루어져야 하니까요. 궁의 생활이 몸에 익지 않은 사람이 한두 해 정도 노력한다고 해서 간단히 익힐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메뜨르도뗄은 대개 가업이 됩니다. 미셸님 자신도 꽁데 공작님의 메뜨르도뗄이던 아버지 프랑수아 바텔님에 의해서 여러서부터 궁정생활을 경험하면서 일을 배우셨던 거지요.”

"그 프랑수아 바텔님은 어떤 분이신지 또 궁금해지는군요. 잠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미셸님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같이 연상되는 프랑수아 바텔님이다. 이 분의 이야기를 하자면 또 슬픔이 나의 마음을 적신다. 피를 나눈 혈연은 아니지만 미셸님의 아버지니 나에게는 할아버지나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 흐르는 비장함을 생각하면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프랑수아 바텔님의 고용주셨던 꽁데 공작님은 왕가와 같은 부르봉 가문의 일원으로 그 부와 권세가 국왕에 버금간다고 하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루이 14세 폐하께서 이 꽁데 공작님을 방문하신 겁니다."

"친척간의 방문이라지만 루이 14세 같은 절대군주가 왕국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제후를 방문한 것이니 뭔가 복잡미묘한 것이 있었겠군요."

"그랬을 겁니다. 정치적인 것도 그렇지만 '스타일'을 중시하시는 루이 14세 폐하시니만큼 대접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리고 꽁데 공작님으로서도 분명 권력으로는 아니더라도 '스타일'로 겨뤄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권력으로 겨루다 지면 목이 달아나겠지만 스타일로 겨뤄서 국왕에게 인상을 남기면 엄청난 상급이 보장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바로 그 스타일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 메뜨르도뗄 프랑수아님이셨겠군요."


꽁데 공작 루이는 무장으로서 국왕 루이14세를 위해서 눈부신 무공을 세웠다. 그 후에도 반란군을 진압하는 등 왕의 최고의 장군이자 왕실 혈통을 이어받은 대귀족으로 이름을 떨쳤다. 본인이 스스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고 연금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당시로서는 공작과 국왕이 권력투쟁의 징후를 보였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이름도 '루이 부르봉'으로 같고, 비슷한 연배의 두 친척 청년들끼리 경쟁심은 불붙었을 것이다. 당장에 같이 나섰던 사냥에서만도 보통 신하들이 흔히 사냥감을 왕께 양보하는 것과는 달리 청년 루이 공작은 맹렬히 추격해서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다고 하니까. 말하자면 이런 묘한 자존심 싸움의 꽁데 공작 측의 야전사령관이 바로 프랑수아님이셨던 것이다.


"네. 저도 왕궁에서 비슷한 일을 해보았습니다만, 이렇게 큰 손님이 한 번 오가시는 건 엄청난 긴장을 하게되는 일이지요. 높으신 분들은 수행원도 수백 명씩 거느리고 다니는데 그분들도 모두 다 백작님 남작님 하는 분들이니 정말 대단한 스트레스가 따르는 일입니다. 행사 며칠 치르고 나면 볼이 홀쭉해지곤 했지요."

"이해가 갑니다. 그래 프랑수아님은 루이왕을 어떻게 모셨답니까? 궁금해지는군요."


콜드웰 선장은 확실히 궁정의 일에 관심이 많았다. 정치적인 면이 아니라 일상의 먹고, 입고, 놀고, 사귀고 하는 일들에 말이다. 선장이 나를 보자마자 측근으로 대우하는 것도 내가 베르사이유의 궁정인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자세한 것은 저도 알 길이 없습니다. 오래전 일이고 그런 디테일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전해오고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 말입니까?"


선장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 정도로 궁금해하며 물었다.


"며칠간 머무르시던 루이 14세 폐하께서 넌지시 꽁데 공작님께 제안을 했답니다. 혹시 프랑수아님을 베르사이유로 데려갈 수 있겠느냐고. 상당한 영지를 댓가로 말이지요. 그만큼 프랑수아님이 탐이 나셨다는 얘기겠지요. 그 며칠간의 경험이 확실히 인상적이셨던 모양입니다."

"오오, 말하자면 그건 프랑수아 바텔님을 스카웃하고 싶다는 그런 이야기 아니겠소?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물론 이건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일뿐이다. 미셸 바텔님도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은 없다. 하지만 베르사이유 궁의 사람들은 아무도 이 이야기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꽁데 공작님이 딱 잘라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프랑스 왕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을 넘겨드리고 싶진 않았겠지요."

"프랑수아님의 위신이 대단히 올랐겠군요."

"그것이... 이야기는 며칠 만에 급하게 반전하게 됩니다."


선장이 눈썹을 모두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국왕폐하께서 떠나시기 전날의 마지막 환송연을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때마침 악천후로 안개가 심해서 물자의 수송이 원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것은 그래도 다 어찌어찌 준비가 되었는데 생선이 전혀 도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건 참 난감한 상황이겠소."

"네, 당시 꽁데 공작님의 거성인 샹띠이성(Chateau de Chantilly)에서 바닷가까지는 열심히 말로 달리면 반나절에 닿는 곳이라서 큰 걱정을 안 했던 모양입니다만 엄청난 안개가 끼어서 배가 출항하지 못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초조해지기 시작한 거죠."

"그래도 어떻게든 준비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샹띠이 주변에도 시장은 있었을테니..."

"바로 그 시장의 상인들 사이에 돈 소문이 배가 못 뜬다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리고 2천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을 먹여야 했기 때문에 그 정도면 샹띠이는 커녕 파리의 시장에서도 조달이 힘들었을 겁니다."

"그건 참 큰일이군요."


말했듯이 이건 연회에서 요리가 몇 개 빠지는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이 하늘같이 높은 두 '루이'들 사이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메뜨르도뗄 자신의 자존심과 위신이 걸린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바닷가에서는 날씨 문제가 크지 않았던 모양으로 연회 당일에는 정상적으로 생선들이 운반되어 왔다고 합니다."

"아, 그건 다행이군요. 2천명 분이나 준비하려면 꽤나 바쁘긴 했겠소만..."

"하지만 정작 프랑수아님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그만.... 본인의 방문에 칼을 꽂고 거기에 몸을 부딪혀 자결하셨답니다. 슬프게도 그걸 발견한 것은 생선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러 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선장이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루이왕 폐하께서는 그는 책임감이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고 칭찬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곤 아들인 미셸 바텔님을 거두어 궁의 메뜨르도뗄로 임명하셨답니다. 아직 젊었던 미셸 바텔님이 베르사이유로 오게 된 것은 그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셨던 건 확실하군요."

"네. 아드님인 미셸님을 봐도, 그 큰 궁정의 대소사에 하나도 소홀함이 없고 모르시는 일이 없으셨으니까요."

“그렇담 체력적으로도 엄청나게 요구가 많은 일이겠소. 몸을 움직이는 것만 아니라 나이가 들면 정신집중 하는 것만 해도 상당히 힘들어 진다오.”


콜드웰 선장이 강인한 얼굴과 아직도 기력이 쟁쟁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서글픈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그래서인지, 루이 15세 폐하의 결혼식을 치를 때 미셸님께서 저를 불러 이야기 하시더군요. 앞으론 제가 전반적인 행사의 통솔을 해보라고 말씀이지요. 메뜨르도뗄도 여러 직급이 있습니다. '왕의 메뜨르도뗄(Maître d'hôtel du roi)' 혹은 '프랑스의 대메뜨르(Grand Maître de France)'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최고위 메뜨르도뗄은 이런 행사 때 왕의 왼쪽 뒤에 서서 행사 식순, 특히 식사의 시작 같은 순서를 선포하는 의전적 역할을 하지요. 그것만으로도 궁이 돌아가는 급박한 상황을 맡겨서 일할 사람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국왕의 결혼식에서 실무적인 총괄을 뻬뺑씨가 하게 된 거군요."

"그렇습니다. 엄청난 행사지만 이미 잘 계획된 것이고 모르는 것은 여쭤봐서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큰 행사를 주관해서 치를 기회란 건 평생 한 번도 올까말까한 일인데, 미셸 바텔님은 요리사 이상으로 궁정의 대소사를 가르쳐 주시고 기회를 주신 겁니다. 단언컨데 궁정생활은 궁정생활을 실제로 겪어보는 것으로만 배울 수 있지요. 궁에 평생 살아도 신분과 역할에 따라서 결코 넘을 수 없는 경험의 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셸님은 미천한 제가 궁정의 화려한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되는 단 하나의 길을 열어주신 겁니다.”


선장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그건 정말 큰 은혜를 입었구려.”

“네. 로띠셰가 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이 놀랐지만 이 ‘신통한 오귀스뜨’의 주관하에 결혼식 연회가 성공적으로 치뤄진 이래로 베르사이유궁의 모든 연회는 실직적으로 제 손을 거쳐서 벌어지게 되었지요. 저같은 미천한 출신들에게 메뜨르도뗄의 일이란 왕위를 꿈꾸는 것과 별 다를 바 없이 먼 일이었지만 미셸님께서 그 길을 열어주신 겁니다. 그 은혜란 말로 표현하 수 없을 정도지요.”


루이 15세 폐하의 결혼식을 계기로 이제 주방의 모든 사람들이 로띠쉐의 자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차기 메뜨르도뗄은 오귀스뜨 뻬뺑이라는 것이 누가 봐도 확실해진 상황이었으니 로띠쉐는 곧 공석이 될 것이라는 것도 자명한 바였다.


마담 뽕빠두르와의 그 일이 있기 전까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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