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왜 악(惡)이 되는가?
그는 그 와중에 그 받은 돈으로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해외 여행도 다녀온 모양이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독일의 어느 도시에서 찍은 사진을 프로필로 달아놓고 있다. 그런 것 보는 나는 그야말로 속수무책 속만 태우고 있을 수 밖에. 돌아오면 연락을 주겠지.
그런 와중에 여기저기서 작은 일거리들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세 권의 책 집필과 한주 큐레이션 스타트업 공모전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고 소소하지만 중요한 강연이나 행사를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하고 있는 나로서는, 더 이상 일을 맡으면 이 사람과의 일을 못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다들 거절을 했다. 사실 일거리가 소소한데다가 단발성들이고 해서 잠깐 돈벌이로 하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아니 내 처지에 그런 푼돈벌이라도 열심히 했어야 했겠다. 하지만 큰 거 한 건 제대로 하는 게 경제적으로도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일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그 일을 할 시간과 체력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상도덕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공모전은 확실히 당선이 된 것이니까 연락도 확실히 오겠지. 정부자금 집행이 원래 좀 늑장이 있지 등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동시에 그렇게 기회비용을 흘려버리며 시간도 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목을 빼고 소식을 기다린 지 거의 한 달이 되어서 나는 이 사람이 제안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경제적으로나 여러모로 나으면 나을 일을 구하게 되었다. 그 말은 이제 매일매일이 뺑뺑 돌아가는 일상이 되었고, 자연 그의 제안은 내 쪽에서 여력이 없어서라도 없었던 일로 치부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어차피 굵직한 일을 더 하려면 슬롯을 하나 비워야 하고, 그건 몇 달 지나야 가능할 일이다.
물론 이건 내 사정이고, 그가 나에게 아무 말도 없이 입을 씻는 데에 대한 그의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양아치짓 당했다 치고, 우선은 나중에 어찌 되더라도 지금은 뭐라고 할 여력도 없어서 알아서 신경이 꺼져가던 그 때, 페이스북에 그가 포스팅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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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나타나주세요. 다음 주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구하는 공고였고, 그 일의 성격 자체는 아마도 그가 나에게 제안하려고 했을 그런 일이었다. 단기채용이라니, 뭐 어차피 정직원 아니면 다 단기채용이지 싶기도 했다. 그런데 나에겐 일언반구도 없이 공고를 올리다니, 이건 무슨 경우인지 이해가 안 갔다. 바로 여기에 댓글을 달았다.
“제가 여기에 지원해야 하는 건가요?”
모르는 사람은 심상하게 봤겠지만 그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불만과 놀람의 뉘앙스를.
“아닙니다. 언제 통화 한 번 하시죠.”
이게 그가 단 댓글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고는 뭔가 요식행위(정부 사업이니까) 같은 것이고 이 일은 나에게 제안이 될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아니, 철썩은 아니고 뭔가 좀 쌔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누가 봐도 나같은 사람이 가장 적임자인 일 아닌가? 해당분야 실무경력이 8년, 파워블로거, 출간작가에 세종우수도서 수상, 정부에서 주최하는 각종 대회 심사위원에 국가대표 소믈리에 경기대회 심사위원까지, 내가 봐도 이런 일 하기에 나보다 더 적임인 사람이 안 보이는 스펙이다.
어쨌든 다음날 통화가 되었다. 구구한 이야기를 다 쓰자면 지면 낭비니까, 요점만 따서 대화체로 재구성을 하자.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등의 이야기, 중언부언 반복되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넘어간다. 그것 말고도 이 사람이 고장난 녹음기가 되어 똑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통에 나까지 같은 이야기 반복한 것은 대략 줄인다는 이야기다.
“공고에 올린 일은 제가 취재 다니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로, 선생님께 맡길 만한 일은 못 됩니다.”
“아, 그럼 제가 맡을 만한 일은 뭔가요? 공모에 당선도 되었는데 무슨 말씀이라도 있으셔야죠.”
“선생님께 맡길 일은 다른 투자자에게서 좀 큰 돈을 투자 받아서 회사를 만든 후에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투자자와 이야기가 좀 잘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벌써 말이 달라진다. 처음엔 분명 이게 되야 빨리 일을 한다며 '가라'로 내 이름 빌려달라고 했다.
“글쎄, 저도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일이란 게 뜻대로 안 되는 상황이 많은 건 이해가 갑니다만, 그런 상황이라도 말씀을 하시고 양해를 구하셨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말씀 못 드린 것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미안합니다.”
그는 아마 이런 정도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을 것이다. 쏴리, 하고 입은 싹 씻고 말이다. 하지만 남의 이름 빌려다가 돈까지 받아놓고 이제까지 말도 없다가 최소한의 성의도 없는 미안하다는 말로 넘어갈 방법은 없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