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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터마인 Jan 12. 2019

10. 겨우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루 치 향유 - 필름사진을 본 후, 쓰고 그립니다

 

 첫 문장을 몇 번이나 썼다가 지웠어요. 이럴 줄 알고 처음부터 연필로 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왼 손에 작은 지우개를 꼭 쥐고요. 이 곳에 온 후 바로 연락을 해야겠다 생각은 했는데, 마치 반 나절 같은 6개월이 지나버렸네요. 아마 당신의 오늘은 6개월 전과 같겠죠. 제가 없다고 회사를 무단 결근하거나 술에 취해 자신을 놓는 일은 없을 거예요. 처음엔 생각했겠죠. 이 사람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할 일 없는 주말엔 문득 허전하기도 했을까요. 이러다 갑자기 나타나겠지 했을 수도 있어요. 대체로 평온한 나의 표정 뒤에 털실처럼 뭉쳐있는 생각을 궁금해하진 않았어도, 알고는 있었으니까요. 자기만의 동굴에서 굽힌 무릎을 움켜쥐고 앉아 털실을 하나 하나 풀어내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나타나겠지. 그런 날 기다린다고 잠시 착각하다가 잊는 줄도 모른 채 잊었을거예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 곳에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좋아했고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그럭저럭’ 말이에요.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만큼. 일은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당신은 일주일에 하루 만나는 걸로 충분할 만큼. 그러나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나서부터 이번엔 생각의 털실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엉키기 시작했어요. 이대로 괜찮은 걸까. 죽을만큼 힘들지 않으면 그게 살 만한 걸까.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하니까, 싫어하지 않으니까 그걸로 된 걸까. 그러다 떠올랐습니다. 엄마의 발인 때 잡았던 차갑고 단단하지만 도저히 쉽사리 놓을 수 없었던 그 손길이. 나는 풀지 못한 털실 한 아름과 그 손길을 들고 이 곳에 왔습니다.


 이 곳에서 나의 하루는 오전 열 시쯤 시작해요. 이른 시간은 아니죠. 새벽녘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할 땐 일부러 아침을 챙기려 해도 안 먹혔는데, 지금은 햇살을 직사각으로 받으며 계란을 부치고 국을 끓여 먹어요. 그리고 카페에 가면 사장님이 공들여 드립커피를 내리고 계시죠. 공간에 가득 찬 그 내음을 흡- 하고 마시면 일을 시작할 기합이 들어가요. 제가 카페 일을 하는 건 아니에요. 공터만한 카페의 한 구석에 연못만한 잡화점을 꾸렸어요. 퇴직금 정도로 보증금이 해결된 건 다행인 일이에요. 아직은 임대료를 내기도 빠듯하지만요. 모든 게 미숙한 저와 달리 사장님의 몸짓은 오랜 시간 숙련된 티가 나요. 여기서 얼마나 계셨어요- 하고 물으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 하시더군요.


확실한 건 살아갈 날보다 커피 내려온 시간이 길다는 거지. 그리고 앞으로 더 길어질 거고-


 지겹지는 않으시냐고 묻자, 또 대수롭지 않게 그러게, 이렇게 시간이 흐른 줄도 몰랐네. 하시더라고요. 여기가 아닌 그 곳에서 저의 시간은 6시간이 마치 6개월처럼 느리게 기어 갔는데 말이에요.


 잡화점의 매대 사이로 연우가 고개를 빼꼼 내밀면 오후가 시작 됐다는 소리예요. 연우는 카페 단골 아주머니의 일곱 살 난 아들입니다. 아주머니가 커피를 마시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연우는 이 곳에서 시간을 보내요. 연우의 질문은 정해져 있어요. ‘이건 뭐예요? 어디서 난 거예요?’ 어제는 가지런히 줄 세워진 포커 카드에 대해 물었죠. 중국으로 워크샵을 갔을 때 789예술구의 길에서 사 온 거였어요. 카드 한 장 한 장 마다 직접 그린 그림이 세밀하고 정교해요. 연우도 그렇게 느꼈는지 한 장 씩 유심히 보며 이것 저것 묻다가 갔어요. 잡화점이 작아서, 곧 여기 물건들의 기원을 다 알게 될 것 같아요. 가기 전엔 꼭, 도자기 손 문고리를 한 번 꼬옥 잡아보는 게 정말 귀여워요.


 다른 단골 손님은 정아라고 하는데, 이 동네에 흔치 않은 20대 여학생이예요. 휴학을 하고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다가 여기에 눌러앉은 지 어느새 몇달이래요. 자기보다 세 배는 더 오래 살았다는 낡은 카메라를 조심스럽게 들고 이리 저리 각도를 잡으며 신중하게 사진을 찍어요. 홍보를 해주겠다며 자신의 sns계정에 카페 태그를 달아 올리기도 해요. 정아의 사진은 그녀처럼 싱그럽기보다는 따뜻하고 묵직한 시선이 느껴져요. 보다 보면 묘하게 안정감이 들죠. 그녀의 내면과 닮은걸지도 모르겠네요. 곧 여기에도 인화한 사진들을 들여놓을 예정이예요. 그 외에도 카페 손님들이 곧잘 흥미를 보여줘서 종일 무료한 하루만은 아니랍니다.


 아마 당신은 몰랐을 거예요. 내가 워크샵 중간에도 짬을 내 798 예술구의 곳곳을 바삐 둘러본 줄은. 함께 길을 걷다가 들어가고 싶은 가게가 있어 몇 번이고 멈칫하는 줄은. 그리고 내가 도자기 공예를 할 수 있는 줄은. 밤에는 수업이 끝난 공방에 가서 작업을 해요. 작은 손 모양의 문고리를 만들어요. 온기는 없어도 잡으면 쉽게 놓고싶지 않은 매끈한 손길의 도자기 문고리를요. 누군가 이 작고 단단한 문고리를 잡고, 어디든 사랑하는 것들이 있는 곳의 문을 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싫거나, 그저 그렇거나, 좋아하는 것들이 아니라요. 사랑하는 것들만이 인생을 바꾸니까요. ‘그 일’에 대해서는 쓸까 말까 망설여지네요. 아마 그걸 쓴다면 나는, 이 편지를 보내지 않겠지요. 또 여섯 시간같은 육개월이 지나면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 때 쯤이면 나는 혼자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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