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치 향유 - 필름사진을 본 후, 쓰고 그립니다
텅 빈 무대 가운데에는 오직 두 남자만이 서 있다. 둘은 주어진 대사로 연기한다.
“자, 그만 떠나자.”/”안돼”/“왜?”/”고도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참, 그렇군.”/(…)/“자, 그럼 가 볼까?”/“그래, 가세나.”/(두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민석과 재현은 각각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연기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라는 연극에서 이 두 주연 배우는 공연 내내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끝내 오지도 않는다. 어떤 장치도 배경도 없는 무대 위에 두 남자가 덩그러니 서서 ‘고도’를 기다리며 의미없는 대화를 주고 받는다. 그렇게 기다리다 그냥 극이 끝나 버리고 마는, 꽤 알려진 부조리극이다. 공연이 끝나고 민석과 재현은 잠시 포장마차에 들러 술을 기울인다. 무대 밖에서도 그들의 기다림은 계속된다.
민석은 어릴 적 자신을 떠난 어머니를 기다린다. 그가 5살이 되던 날, 어머니와 놀이동산에 갔다. 그 날의 일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같이 회전 목마를 타며 그를 뒤에서 안아 주던 어머니의 품, 입에 설탕을 가득 묻히고 먹던 팔뚝만한 길이의 츄러스, 그 끝을 알 수 없는 하늘로 날아갈 새라 꼭 붙들고 다녔던 풍선까지. 한참 놀고 나와 상기된 그에게 어머니는 말했다. 오늘을 잊지 마. 다시 데리러 올게. 그 후로 20년이 지났다. 어머니는 아직 민석을 데리러 오지 않았다.
재현은 5년 전 유학 간 연인을 기다린다. 그녀는 떠나며 말했다. 기다리지 마. 기다려도 안 돌아가. 하지만 뒤를 이어 사랑하느냐 묻는 그의 질문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의 무표정을 믿지 않았다. 그녀의 무표정에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믿었다. 그것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징표라 여겼다. 아직 그녀는 귀국하지 않았다. 연락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고도'는 민석에겐 어머니요, 재현에겐 연인이다. 그들은 '고도'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찾아 나서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자리를 지키며 계속 기다릴 뿐이다. 찾을 수 없도록 떠나 버릴까, 아니면 찾아 나서 볼까 생각은 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거야. '고도'의 실종이 두려운 거야.
재현이 말했다.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분명히 고도는 올 거야. 와야만 해. 그래야 의미가 생기지. 무대 위 연기에, 이 소주 한잔에 의미가 생겨. 누군가를 향한 기다림은 그 목적을 달성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거야. 그게 충족되지 않으면 아마 세계가 무너질 만큼의 상실감이 찾아올 거야. 기다리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될걸. 하지만 애타게 기다리던 대상을 결국 만난다면? 지금까지 기다린 모든 시간과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겠지. 고도가 올 때까지 이 기다림은 끝나지 않을거야. 우리는 이 기다림에 의미를 부여하며 계속 살아가야만 해.
민석이 말이 없자 재현은 초조한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 어쩌면 고도는 없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 경우는 생각하지 말자. 아직 우리는 그 경우에 대비하지 않았잖아. 고도의 실종을 깨달았을 때 우린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아니, 그래.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돼 버리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는 거야. 당장 다음 날 어떻게 해야 할 지 넌 알 수 있겠어? 고도가 사라졌음을 깨닫고서도 무대에 올라갈 수 있겠어? 마치 고도가 있는 것처럼 기다릴 수 있겠느냐고. 고도는 올 거야. 반드시 올 거야.
민석은 여전히 침묵했다. 재현은 체념한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난 믿어. 우리의 기다림엔 의미가 있어. 분명히.
다음 날 리허설에 민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십 통의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내 보아도 그는 받지 않았다.
'고도를 기다리지 않기로 결정한 건가? 아니면, 스스로 찾아 떠난 건가? 바보같은 자식. 고도는... 고도가 우리의 희망이라는 걸 알면서. 존재하지 않아도 계속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데, 그걸 저버리거나 혹은 찾으려 애써서는 안 되는 거란 말야. 그냥 있다고 믿어야만 하는 거라고. 그래야 삶을 지속할 수 있다고. 어리석군. 정말 어리석어.'
연출자가 헐떡이며 달려와 오늘 리허설은 재현 혼자 올라가야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민석없이 혼자 무대에 올라 '고도'를 기다려야 했다.
민석의 빈 자리는 금세 새로운 대역으로 채워졌다. 일이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는 무명 배우들이 이 바닥엔 넘쳐 났다. 재현은 민석이 잘 지내고 있는 지 걱정스러웠다. 동시에 그가 결국 고도를 찾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민석 없이 다른 배우와 연극을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났다. 민석 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일은 생각보다 더 힘에 부쳤다. 민석의 자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배우는 무대 위에서만 고도를 기다릴 뿐, 그것 뿐이었다. 무대가 끝나면 그는 기다리는 일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저없이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재현은 자신도 모르는 새 민석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와 기다림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 만으로 마음에 위안이 되었던 거다. 민석과 함께 기다린 5년의 시간보다 그가 떠난 후 3개월이 훨씬 더 길게 느껴졌다. 하루하루, 기다리는 일이 고통스러워졌다. 어느 날의 연극이 끝난 후, 재현은 결심했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자신도 고도를 찾아 떠나겠다고.
재현은 마음 먹은 즉시 극단에 그 사실을 알렸다. 다음 연극에 그는 서지 않기로 했다. 최대한 빠르게 집과 짐을 정리한 후 그는 연인이 유학중인 나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재현이 그녀를 찾아 한국을 떠나던 날, 민석은 극단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 재현의 빈 자리를 민석이 채웠다. 민석은 무대 위에서 다시 고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가 어머니를 찾았는 지, 찾지 못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오직 재현만이 민석과 그 기다림을 공유했던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재현이 이 나라를 떠난 후 민석에게 그 사실을 물어볼 다른 사람은 없었다.
재현이 출국한 날 저녁 <고도를 기다리며>의 막이 올랐다. 재현이 있던 자리에 민석이 서 있다. 무대 위에서 그는 다시 고도를 기다린다.
“이리 오기로 돼 있는데” /”딱히 오겠다고 말한 건 아니잖아.”/”만일 안 온다면?”/”내일 다시 와야지”/”그리고 또 모레도.”/”그 뒤에도 쭉.”/”결국…”/”그 자가 올 때까지.”
한창 연기하다 무심코 민석은 관객석을 둘러본다. 극장이 매우 협소해 맨 앞 줄의 관객석은 민석의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휘 둘러보고 연기를 계속하려던 중, 그는 다시 관객석으로 시선을 돌린다. 맨 앞 줄에 앉은 한 여자 때문이다. 분명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어디에서 봤었지…?’ 그는 기억을 되살린다. 그리고 재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던 수많은 밤 중 하나를 찾아낸다. 어느날 밤 포장마차에서 재현은 민석에게 핸드폰으로 한 사진을 보여줬었다. “예쁘지? 유학간 내 여자친구.”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던 갈색머리의 한 여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 그의 무대 바로 앞 좌석에 그 갈색머리 여자가 누군가를 찾는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