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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터마인 Jan 13. 2019

15. 대담하고 소담한

하루 치 향유 - 필름사진을 본 후, 쓰고 그립니다


 자세히 뜯어보면 둘의 얼굴은 무척 닮았다. 그러나 둘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쉽게 눈치채지 못했다. 두 사람의 꾸밈새가 극명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언니는 고등학생임에도 속쌍커풀인 눈의 두 배 정도 되는 짙고 긴 아이 라인을 그리고 다녔다. 입술엔 짙붉은 립스틱을 발랐다. 그와 반대로 동생은 화장기 없는 척 티 안나게 피부를 밝혔다. 윤기도는 립글로즈에 살구빛 볼터치를 옅게 칠했다. 언니의 이름은 대담, 동생은 소담이었다. 당연하게도 남자들로부터 소담이 훨씬 인기가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남자를 울리는 건 주로 대담이었고(여러가지 의미에서), 남자 때문에 우는 경우는 소담이 더 많았다.

 

 부모님이 여행을 가신 어느 날, 둘은 몰래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았다. 7명의 동급생 친구들 중에는 소담이 좋아 하는 남자애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오기 직전, 소담이 입구에 걸려있는 커다란 가족 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나 중학생 때 너무 못생겼다. 살찌고... 이거 보여주기 부끄러운데.
 그래? 그럼 떼지 뭐.
 대담은 액자를 떼다가 침대 밑 깊숙한 곳에 밀어넣었다.
 밤늦게까지 아이들은 먹고 마시고 떠들고 춤췄다. 자매는 뿌듯했다. 그 날은 평소처럼 학교 뒤편이나 노래방 구석
에서 놀 필요가 없었다. 부모가 집을 비우는 뜻밖의 행운이 그녀들의 작은 권력이 되었다. 서툴게 과일을 깎아오는 소담은 넓은 저택의 수줍은 안주인같았다. 그 후광 때문인지 소담은 좋아하는 남학생과 다음 날부터 사귀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도 부모들도 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이에, 그들만의 비밀은 없었다. 아빠는 차로 자매를 학원에 데려다주며 짐짓 모른 척 어제 뭐했냐고 물었고 대담은 TV를 보다 잤다는 빤한 거짓말로 답했다. 아빠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가족사진은 왜 침대 밑에 숨겨놨냐.
 ...아.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남자애들을 불러와서 놀아? 여자애들도 있었어요. 그냥 친구들인데... 가족사진은 왜 숨겼냐고. 가족이 부끄럽지, 너는? 아니, 그게 아니라...
 내려라. 

 소담이 언니를 변호하기 위해 뭔가 말하려 했지만 대담이 가만히 그녀를 저지하고 차에서 내렸다. 길 한복판에서 아빠가 대담의 뺨을 짝, 하고 올려붙였다. 그리고 연달아 짝, 짝, 두 대를 더 때렸다. 대담은 길 한 복판에 서서 얼얼 한 뺨을 붙잡고 울지도 화내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평온한 날들은 계속되었다. 애가 거짓말을 했으면 뺨 한 두 대 정도 맞을 수도 있지 뭐. 어른들에겐 그런 분위기로 이 날의 일은 넘어갔다. 언니가 아무렇지 않은듯 행동하자 소담도 뭐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2년이 지나고 둘은 서울의 대학에 붙어 자취를 하게 됐다. 소담의 남자친구 현우도 여전했고, 둘과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 


 소담이 울며 자취방으로 뛰어들어온 건 그 해 가을이었다. 단정한 생머리가 헤집혀 있었고, 가디건의 어깨 부분은 실밥이 터져 나달거렸다. 놀란 언니가 무슨 일인지 물을 새도 없이 소담이 급하게 문을 잠그며 밖에 대고 소리쳤다.

 몇 번을 말해. 우린 끝이라고. 가! 다신 오지마!

 굳게 닫힌 문 너머로 가라앉은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나와서 얼굴 보고 얘기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소담에게 대담이 다가가 팔을 잡았다. 소담은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언니를 확인하고 말라버린 눈물자국 위로 다시 눈물을 흘려보냈다. 대담은 그녀를 방에 들여보낸 후 인터폰에 흐릿하게 비치는 현우에게 말했다. 그보다 훨씬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야 이 새끼야. 그래. 경찰서가서 얼굴 보고 얘기하자. 

 대담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도착했을 때 현우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난 지 한참이었다. 경찰은 그의 인적사항을 받아간 후 내일 경찰서로 출석하라는 말을 전했다.


 자매는 다음날 함께 경찰서에 가서 진술했다. 현우도 소환됐다. 그를 보자 지난 밤이 떠오르는 듯 소담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대담이 그녀의 어깨를 꽉 안았다. 현우는 살면서 한 번도 위협이 되어 본 적 없었던 사람처럼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죄송합니다, 하는 말만 반복했다. 대담은 아무리 봐도 현우가 죄송해하는 건 형사님이지 소담에게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왜 형사는 피해당한 것도 없이 사과를 당연하게 받으며 그녀들에게 합의를 권유하는 건지 의아했다. 그러나 소담이 그 자리에 오래 있고싶어 하지 않았으므로, 둘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평온한 날들은 계속되었다. 소담은 울며불며 비는 현우와 결국 합의했고 그는 바로 군대에 갔다. 학교에 잠시 소문이 돌았지만 애인 사이에 싸우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분위기로 이 날의 일은 넘어갔다. 동생이 아무렇지 않게 생활을 지속하자 언니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일 년이 지나고, 소담이 쭈뼛거리며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음을 언니에게 알렸다. 대담은 기가 차서 말했다. 


넌 그렇게 당하고도 남자를 만나고 싶니? 솔직히 그 때 그냥 넘어간 거 마음에 안 들었어, 나.
 언니, 고등학교 때 아빠한테 길에서 뺨 맞은 거 생각나? 우리 거짓말해서.
 그런 일이 있었나? 기억 안 나는데.
 역시... 언니한테 충격이었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잊었을 거라고. 언니. 정신도 다 신체작용인 거 알아? 버틸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뇌가 그 일을 지우는 거야. 그래서 괴로웠던 기억은 그렇게 어렴풋한 거래. 

 신빙성 있는 거냐? 

 이론은 모르겠고 내가 경험했잖아. 그냥 그 때를 빨리 지나가고 싶었고, 지나왔고, 큰 사건은 알겠는데 세세한 건 잘 기억이 안 나. 연필로 눌러쓴 걸 지우고 남은 흔적처럼 흐릿해. 

그래, 넌 잊어라. 잊고 잘 만나봐. 네가 다쳤던 건 내가 기억하면서 그런 일 안 생기게 주시할테니까.
 든든하네. 언니는 남자 안 만나? 그럴거면 탈코를 해. 귀찮게 화장은 왜 해?
 글쎄, 뭐. 난 이 길고 뾰족한 아이라인으로 다 찔러버릴 건데.
 한 걸음 떨어져 앉아 서로 툭, 툭, 말을 던지며 대화하던 중 갑자기 소담이 언니에게 달려들어 와락 껴안고 뺨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언니가 아팠던 건 내가 기억할게. 아프지 말자. 

대담이 질색하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징그러, 떨어져. 

찡그린 듯 웃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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