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문화인류학자의 육아

아이를 키운다는 그 '신화'에 관하여

by 김은수

이집트 신화에 유명한 육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남편 오시리스가 죽자 이시스는 아들 호루스를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헌신적으로 아이를 키운다. 호루스는 장성해서 아버지의 복수를 이루고 신들의 왕이 된다. 이시스는 그런 아들을 보며 벅찬 감동이 밀려왔겠지만, 한 순간의 정으로 세트를 해하는 걸 망설이자 호루스는 가차 없이 어머니인 이시스의 왕관을 뺏어 땅에 던져 버렸다. 일설에 의하면 왕관이 아니라 어머니의 목을 날려 버렸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내가 느끼기엔 똑같은 결말이다. 아이가 내 맘같이 자라지는 않는다는 것.


2018년 3월 어느 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며 겨우 잠든 신생아를 내려다보던 내가 앉아 있었다. 미국의 어느 병원 산부인과였다. 당시 나는 인문대학과 드라마 스쿨을 거쳐 문화인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공부하는 중이었지만 아이를 받아 드는 순간 학자로서의 내 자부심은 산산조각 났다. 나는 사람의 문화사를 공부하는 전문 연구인이었지만 사람을 어떻게 키우는지는 하나도 모르는 바보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 가는 중이었다.


'어떻게 키우지'


잘 키워야 한다는 중압감도 있었지만 내가 육아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내 자아를 짓눌렀다. 아마도 그게 산후 우울증이라는 괴물의 시작이었던 듯하다. 연구자로서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오류 없이 작업해야 한다는 강박은 그대로 아이를 '키운다'는 강박으로 옮겨갔다. 기왕 연구도 쉬게 되었으니 제대로 하고 싶었다. 출산이 임박해 오면서부터 각종 육아서와 영상들을 시청하고 계획표를 그려갔다. 수면 교육, 수유 스케줄 심지어 아기 배마사지까지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고 그런 '직업 정신'에 가까운 습관은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내 안에서 자라나는 좌절감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이의 삶이 내 삶인 마냥 매달렸지만 정작 내 삶은 방치되다시피 했다. 끼니를 거르다 배가 고플 때 먹고 졸려도 참았다. 내 옷은 늘 같은 수유복이었지만 아이 옷은 내 손으로 (혹은 남편 손으로) 직접 빨았다. 언어 자극을 위해 목이 쉬도록 책을 읽어주고 매일 산책을 나갔다 (새벽 5시와 오후 4시에 두 번이나) 아마 그때는 무의식 중에 내 연구 주제를 '디아스포라 예술인들의 포스트메모리'에서 '내 아기 잘 키우기'로 옮긴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아기에게 온갖 정성을 다 들여서 키웠겠지. 나는 완벽한 엄마가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 헌신의 결과가 이시스와 호루스처럼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요즘은 각종 매체에서 육아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아이가 없는 사람도 훈육이라거나 육아라거나 하는 단어가 낯설지 않다. 확실히 육아를 하다 보면 사람에 대한 공부도 되는 건 분명하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계기도 된다. 하지만 이렇게나 힘들 일인가. 이게 맞나. 내 의문은 쉬지도 않고 나를 잡아 내렸다. 왜 다들 똑같은 방식으로 그토록 힘들게 아이들을 키우는 거지? 내가 자랄 때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아이는 삶의 기쁨이라고 했었는데 그 기쁨은 어디에 숨어 있는가. 육아서에서 말하는 대로 수면 교육하고 수유하고 이유식 만들어서 먹이면 나의 기쁨이 짠 하고 나타나는 걸까. 과연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는 건가 아이가 나를 사라지게 만드는 건가.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여러 매체에서 말하는 대로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강박은 나뿐만 아니라 주변인들도 비슷한 듯했다. 물론 아이를 잘 키워야 하는 건 맞다. 그 전제는 변하지 않는다. 특히 생의 첫 두 해에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는 이후 나이가 들어서 비슷한 일을 겪은 아동보다 정신 질환이나 병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는 연구도 있다.* 아이는 잘 돌봐줘야 하는 존재가 맞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키우는 방식은 내 삶도 아이의 것이 되어버리는 조금은 극단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아이에게 헌신하면 아이도 부모도 행복해질 것 같은 이 '신화'와도 같은 스토리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인 걸까 의문이 들었다.


나는 반발심이 생겼다.


애초에 너무 아이에게 내 삶을 다 줘버린 나에게 말이다. 내게는 '아이를 키운다'는 전제부터가 압박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시스 같은 여신도 아니고 내 아이는 왕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마치 내 아이가 이 세상에 나갔을 때 당당하게 왕의 길을 걸을 듯이 아이를 키웠다. 하지만 정작 나의 진짜 책임과 위치는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아이와 함께 공존하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신화'는 아무도 살리지 못한다. 이는 단순히 나를 다시 찾고 아이에게 휘둘리지 말아야지, 육아법에 따르지 않을 거야 하는 고집스러운 반발심이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아이와 만들 정교한 관계 맺음이 필요하고 우리가 함께 하는 순간의 드라마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삶에 대한 기록이 필요했다.


나는 여기에 그 기록을 하나하나 새겨볼까 한다. 그저 자기 아이와 같이 '살기 위한' 어느 인간의 몸부림을 말이다. 신화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남겨두기 위해. 하지만 현실은 그보다는 더 생생하고 단단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Smith, Jane A. 2023. "Understanding Neglect's Toll on Child Development." Child Development Review 45, no. 2: 123–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