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 가장 큰 나라로 와인용 포도 재배에 적합한 토양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주로 안데스 산백을 따라 고지대에 좋은 와이너리들이 분포되어 있는데요. 전체 와이너리 중에서 70% 정도가 멘도자(Mendoza)라는 지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와인하면 멘도자가 연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멘조자 지역에서 자란 포도들은 고지대 덕분에 낮은 강수량과 높은 일조량을 유지합니다.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와인 생산부문에서 세계 5위에 들 정도로 많은 와인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와인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린 것은 역시 ‘말벡(Malbec)’인데요. 강렬한 보랏빛, 다채로운 과일향에다 은은한 초코릿, 커피 등의 향이 특징이죠.
일반적으로 다른 품종에 비해서 타닌이 부드럽고 심지어 달콤하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풍미가 강한 풀바디 계열의 와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원래 말벡은 고향이 프랑스 보르도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말벡이 다른 품종들과 브랜딩하는 용도로 사용될 정도로 약간 저평가되었습니다. 좀 야들야들한 풍미감에 익숙한 유럽인들의 입맛에는 너무 과격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색이 진한 까닭에 오히려 블랭딩으로 다른 품종들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 탓도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저평가 되었던 말벡은 남미 아르헨티나로 넘어오며서 환골탈퇴를 하게 되는데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르헨티나 역사를 살짝 들여다봐야 할 것 같습니다.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천대(?)받던 말벡이 신대륙, 특히 남미로 이식되면서부터 말벡의 새로운 세기가 시작됩니다.
남미에서 말벡이 처음 본격적으로 재배된 곳은 아르헨티나가 아니라 칠레였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하나 있죠. 와인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미셀 뿌제(Michel Pouget)라는 사람입니다.
미셀 뿌제는 원래 토양학자였습니다. 와인의 가장 기본이 되는 '테루아'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죠. 그가 포도 재배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 와인이 돈이 되고, 국력이 되는 이유였습니다.
필록세라라 불렸던 당시로서는 치명적인 포도나무 전염병이 돌면서 프랑스 와인업계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됩니다. 특히 말벡처럼 저평가 받던 품종들은 아무래도 방치되기 십상이었죠.
이걸 들고 남미라는 새로운 땅에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미셀 뿌제 같은 사람들이 그 일을 담당합니다. 분명한 것은 단지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계 최고의 와인을 생산한다는 프랑스인들의 자부심, 와인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한데 모아진 것이겠죠.
아무튼 당시 남미에서 포도 재배에 적합한 안데스 산맥을 끼고 형성된 와이너리들, 특히 칠레의 국가적인 지원등이 결합되면서 프랑스 말벡이 본격적으로 이식되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신대륙 토양에 맞게 품종 개량도 이뤄집니다.
1841년 파리에 있던 '에꼴 노르말레 슈뻬리에르' (The École Normale Supérieure), 즉 프랑스 와인 생산의 기술적 원천이 되었던 기관을 그대로 본따서 칠레는 수도 산티아고에 '뀐타 노르말 드 산티아고(Quinta Normal de Santiago)'를
설립합니다.
칠레 정부가 와인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칠레 와인의 저력은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 보드로에서 포도나무를 잘라서 칠레의 땅에 심으려는 노력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미셀 뿌제와 같은 연구자들에게는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포도를 살리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던 셈이죠. 이들의 피땀어린 노력 속에 남미에서 보르도에서 가져온 포도나무들에서 드디어 포도열매들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때, 아르헨티나에서 정치적인 추방을 당해 칠레로 도망쳐온 한 정치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훗날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바로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Domingo Faustino Sarmiento)라는 인물입니다.
원래 포도재배를 하던 산 주안의 농가 출신이기도 한 그는 망명지 칠레서 프랑스 와인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특히 칠레 정부의 와인 육성정책에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아르헨티나 정계 복귀 후, 그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대표적인 사업 중 하나가 바로 와이너리 육성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칠레에 정착한 미셀 뿌제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오랜 설득 끝에 그를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로 데려오는데 성공합니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아르헨티나 멘도자까지 당시로서는 철도가 놓이기 전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미셀 뿌조는 노새를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멘도자까지 가야했습니다. 칠레에서 육성에 성공한 프랑스 보르도 산 포도나무 가지들을 포대에 싸가지고 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겠죠.
참 대단한 사람들이지 않나요. 와인에 대한 열정, 우리가 지금 맛보고 있는 아르헨티나 말벡 속에는 이런 와인 선구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스며 있는 것입니다.
노력하는 자의 땀방울을 신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런 진리는 와인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죠.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수출되는 와인의 60% 이상이 말벡이라고 합니다. 증가량도 20%대 이상을 유지하며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세계인의 사로잡은 말벡, 그것은 소믈리에나 유명인들의 추천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서민들의 입소문이었던 것이죠.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도 강한 풍미를 자극하는 말벡의 특성 상, 소비자들도 말벡의 매력에 쉽게 빠져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벡 하면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지난 세기 위대한 여행자' (un grand voyageur des siecles passes)라는 표현은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이번 장롱 와인 콘테스트, 아르헨티나 말벡을 통해서 '세기의 위대한 여행'에 함께 해보시는 것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