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해야 한다. 웃을 수 있기 위해선'

나의 통의도 다이어리 (98)

by 김덕영

'일탈해야 한다. 웃을 수 있기 위해선'


어젯밤 늦게 와인을 서빙하는데

한 손님이 같이 온 일행에게 물었다.


"근데 와인 마실 때 바디감, 바디감,

그러는데, 도대체 바디감이 뭐야?"


갑작스런 질문에 와인잔을 입에 가져가려던

일행들도 일순간 선뜻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순간이었지만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두꺼운 안경테가 유난히 돋보이던 구석 자리

여자 분이 용기를 내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


“뭐긴 뭐야?! 바디, 몸 육.

감, 느낌 감. 그러니까 육감이지 뭐."


웃자고 한 소린지 아니면 진짜 심각하게

대답한 것인지 분간은 잘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바디감’을 ‘육감’이라 정의 내려준

덕분에 자칫 심각해질 수 있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한바탕 껄껄거리며 웃을 수 있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들은 통의동에
사무실을 둔 인문학 연구원들들.
단어 하나에 운명을 걸 정도로 논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개념 하나에 그렇게 집착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젯 저녁엔 세미나를 마치고 뒷풀이를
우리 가게에서 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름 내노라하는 연구자들이다 보니
개념에 대해서는 좀 치밀한 구석들이 있었고,
게다가 나이가 젤 많은 선배가 던진
질문이다 보니 다들 일순 긴장했던 것이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육감'이라고
대답을 한 여성 역시 인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교수, 인문학 연구자들답게 그들의 ‘바디감’에
관한 토론은 나중에 들뢰즈의 '욕망'까지 거론될
만큼 진지하게 이어졌다.

솔직히 와인 바디감이란 단어에서 시작해
들뢰즈의 욕망까지 거론되는 걸 보면서
좀 놀란 것도 사실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1925년에 태어나 1995년에
사망했으니 적어도 나와 가장 가까운 시간대에
살아있던 동시대적 인물이다.
철학은 물론이고 영화와 문학,
예술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남긴 사상가.

미셀 푸코는 그를 가리켜,
“아마도 어느 날 이 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자극적인 인물이었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기계’라 불리는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달라지는 것들이 때문이다.
개체란 변하지 않는 단일한 속성을 지니는
단독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연결되는
방식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다.

바로 여기서 그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서구 전통적인
사유 방식과 궤도를 달리 하는
특징이 나타난다.

그들은 존재하는 개체는 고유한 속성이
그 안에 담겨 있다고 믿었다.
들뢰즈는 그걸 ‘관계’의 그물망 속에

던져넣었다. 매우 현대적이다.
네트워킹이란 그물망 속에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를 보면 그의 말이
구구절절 실감이 간다.

예를 들어 우리의 ‘혀’는
‘거짓말하는 혀’가 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맛보는 혀’,
‘사랑하는 혀’가 되기도 한다.
연결되는 대상과 양상에 따라서

기능이 달라진다.

들뢰즈는 이런 기계적인 배치를
‘욕망하는 기계’라 표현했다.
이때의 욕망이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이다.
모든 개체에는 이런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
스스로 변화하려는 욕망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렇게 규정된 기계적인 배치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바로 ‘탈주’,
즉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일탈’이다.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싶어하는
욕망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시켜주는
생명의 불꽃이다.

갑자기 들뢰즈 이야기를 꺼내서
당혹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이야기 하지 않고서는
다음 얘기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욕망과 탈주는
모든 게 평범한 일상에 맞춰져 있었다.
하루하루의 삶, 아침에서 일어나서 밥을 먹고

자고, 일하고 친구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그런 일상의 모습들.

무심코 그들이 하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나도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우선 첫 번째 드는 호기심은 왜 와인에다
‘바디감'이란 단어를 붙인 것일까, 하는 거였다.

자료를 찾아봤더니
‘바디감’은 와인에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 단어가 가장 즐겨 사용되는 분야는 바로
커피 업계였다.

‘좋은 커피란 쓴맛, 단맛, 신맛, 향기,
그리고 바디감이 좋다’, 뭐 대충 이런 식으로
바디감에 관한 말을 하고 있었다.

‘바디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측정 기준이 필요한데,
입안에 뭔가 남는 것 같은 느낌,
즉 ‘밀도감’과 가볍고 무거운 느낌을 뜻하는
'중량감’이 그것이다.
바디감은 결국 이 둘의 합이다.

좀 더 세밀히 들어가서,
‘밀도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과 우유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밀도가 거의 없는 물의 경우,
마실 때 깔끔한 느낌이 있을 뿐이다.
무색, 무취, 무향의 신선한 물을 떠올리면 된다.

반면에 우유는 뭔가 입안에 끈적거리는
용액의 느낌이 남는다. 우유 안의 지방,
단백질, 칼슘, 비타민 같은 성분이 우유의
밀도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중량감’의 경우에는 콩나물국과 설렁탕을

비교하는 게 이해하기 쉽다.
콩나물과 간장, 그리고 국물맛을 내기 위해

넣은 멸치와 파, 마늘 정도의 재료들이 내는

아주 맑은 맛.
권투 경기로 치자면 라이트급 정도의 펀치를
맞는 느낌이 든다.

반면에 중량감이 강한 설렁탕의 경우에는
사골을 아주 오랜 시간 끓인 덕에 국물 속에
여러 층의 레이어가 깔린 것 같은 맛이 나온다.
권투 경기로 치자면 헤비급 펀치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 든다.

결국 이런 밀도감과 중량감이 결합 되면서
‘바디감’이 형성된다. 콩나물국과 설렁탕의
비교를 통해 아주 쉽게 이해가 되는 면도
있다. 하지만 정확히 어느 선부터 바디감이
느껴지고 어느 선부터는 바디감이 약한지
그걸 정확히 따져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와인 이야기로 돌아가서, 와인의 바디감도
커피의 바디감과 다를 건 없다. 어차피
입안에서 느껴지는 무게와 같은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묵직하다, 가볍다, 이런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무게와 관련된 단어들이기도 하다.
풀바디, 미디엄 바디, 라이트 바디처럼 말이다.

그런데 와인에서 말하는 바디감에는
커피와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가장 중요한 변수는 알코올이다.
알코올 함유지수가 높을수록 바디감이
강하고, 낮을수록 바디감은 떨어진다.

보통은 12.5% 미만의 알코올이 포함된
와인의 경우에는 라이트 바디 계열일
가능성이 높다. 독일의 리즐링이나
이탈리아의 프로세코가 여기에 해당된다.

12.5%에서 13.5% 사이에 알코올 함유지수를
지닌 와인들은 미디엄 바디에 해당된다.
여기에는 로제, 쇼비뇽블랑 등이 포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13.5% 이상의 알코올 함유도를
포함하고 있는 와인들이 풀바디에 해당된다.
시라, 시라즈, 까베르네 쇼비뇽, 말벡 등으로
대부분의 레드 와인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레드 와인의 경우에는 알코올 함유도가

바디감을 이해하는데 전부가 될 수 없다.
레드 와인의 경우, 피노 누아와 같은 것은
라이트 바디에 속하는 대표적인 와인이다.

산지오베제나 메를로 등은 보통 미디엄 바디로
불리고 있는데, 알코올 함유도는 13.5%를

웃도는 경우가 많다.

참 복잡하고 다양한 것이 와인이다.
어쩌면 그게 와인이 지니고 있는

매력일 테지만.

저마다 서로 다른 개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는
와인의 맛과 향이 그걸 마시는 사람에게
서로 다른 느낌을 안겨주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때와 장소에 따라 한 개인이 느끼는
바디감에도 미묘한 차이가 발생하니 말이다.

아무튼 ‘바디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육감’을 거쳐 ‘밀도감’과 ‘중량감’을 낳고,
알코올 함유지수와 와인의 바디감이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정보로 연결됐다.
그리고 그것이 다양한 와인의 세계가 갖고 있는
매력이라는 걸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모든 건 ‘육감’에서 시작됐다.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날 꺼낸 ‘육감’이란 말이

웃자고 한 소린지 아니면 진지하게 꺼낸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날 대화 속에서 ‘육감’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모두가 일순간 다들 자지러지게
한 바탕 웃었다는 사실.

‘일탈’은 곧 우리가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관계의 그물 속에서
타인과 나를 관계맺게 하는 욕망일지 모른다.
아니 그냥 나 자신부터가 일상에서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지닌 존재이며,
그 욕망의 실천을 통해
‘나’는 좀 더 자유롭게 행복한 존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고로 어쩌면 이런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일탈해야 한다. 웃을 수 있기 위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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