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세 백전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젊음과 열정

머리보다 몸이 앞섰다. 그것이 젊음과 열정의 원천이었다.

by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시즌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캐릭터와 숙명은 하나이자 같은 것”이라고. 세상에 보여지는 존재로서의 '캐릭터'와 진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어떤 연관성이 생기는 것 같다. 그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다. 자신이 원해서 건 아니건 그는 영화 속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거의 매 시기 영화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 <황야의 무법자>에서 볼 수 있었던 '이름없는 사나이'에서부터 시작해서 <더티 해리>의 사회 모순에 몸으로 부딪치는 '외톨이'에 이르기까지 그의 캐릭터와 숙명은 씨줄과 날줄처럼 인생을 엮어갔다. 영화 속 스크린에 투영된 존재가 곧 그 자신이었다.

1930년 생으로 올해 나이 87세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백전노장, 인생기의 황혼기를 넘어 생을 마감할 나이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수그러들 줄 모른다. 최근 그가 주목하는 캐릭터는 '이름없는 영웅들'이다. 2009년 뉴욕 공항을 이륙하자마자 세 떼와 충돌해 엔진 고장을 일으킨 비행기를 허드슨 강에 불시착시킨 사건을 소재로 해서 만들어진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이나 이라크 전에 참전했던 저격수 크리스 카일을 소재로 한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봐도 그렇다. 영화 속에선 정의를 위해 올바른 행동을 선택하지만, 그 행위 자체로 인해서 비판을 받아야 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탑승객 전원을 살리기 위해 허드슨 강 불시착을 선택한 설렌버거 기장이나 자신의 조국을 위해서 적을 살해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크리스 카일에게는 영웅이라는 칭호보다는 사실 도덕적인 비난이 앞섰다.

어쩌면 이스트우드는 바로 이런 '이름없는 영웅'들을 통해서 자신의 마지막 세 번째 캐릭터를 구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쩔 수 없이 여전히 그는 영화 속 페르소나를 통해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완성시키고 있다. 비록 나이가 들어 늙고 지친 인물일지라도 열정과 패기를 잃지 않은 영혼에는 고유한 향기가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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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존재는 미국 사회에서 노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고 있다. 돈이라면 부족함 없는 그가 최근 이탈리아 경차 피아트 500을 몰고 LA 시내를 돌아다닌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또 놀란다. 애초부터 그에게선 형식이나 관료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나이 들어가는 노년들에게도 그의 삶은 배울 점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자신이 따라 배우고 싶은 존재를 통해 자신을 실현시켜 나간다. 그가 단지 헐리웃 영화감독의 지위를 벗어나 존경받는 사회적 인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캐릭터를 통해 숙명이 완성되는 존재들, 인간의 운명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를 통해서 스스로 완성되어 간다. 누군가 존경할 만한 가치를 지닌 존재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할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엇이 그를 이유 없는 반항아에서 존경받는 영화인으로 이끌었는가?'


1930년대 대공황기를 맞아 대다수 미국인들의 삶은 궁핍했다. 이스트우드 집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자리를 찾아야 했던 부모님을 따라 여동생과 함께 미국 전역을 누비며 살아야 했다. 그 당시 집이 없어서 트레일러에서 살았다는 일화는 이스트우드 인생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다. 이사를 하도 많이 해서 친구도 별로 없었다. 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공부도 잘 하지 못했고 심지어 학교에서는 '멍청이'라는 놀림도 받았다. 단, 그에게는 아버지로 물려받은 아주 강인하고 늘씬한 몸이 있었다. 훗날 그의 잘 빠진 몸은 헐리웃으로 향하는 자산이 된다. 수많은 여성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을 수 있는 보증수표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공의 가도에 들어선 이후의 이야기들이다. 적어도 이십대 그의 인생은 가난하고 별 볼 일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용광로를 관리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보잉 항공사의 주급 아르바이트로 일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동차와 여자, 재즈에 열광하는 청춘기였다. 돈은 없지만 그의 주변에는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20대 인생을 세상사에 관심 없는 멍하고 태평한 '서부 해안의 반항아' 정도로 묘사할 정도다.

그런 인생에 첫 전환점이 찾아온다. 바로 영화였다. 1950년 한국전쟁의 여파 속에서도 그는 전쟁터에 참전하는 대신 군대 수영장을 관리하는 말 그대로 '꽃보직'을 맡는다. 그 당시 수영장에는 전투복을 입은 헐리웃 스타들도 여럿 모여들었다. 그의 인생에서 영화의 세계가 점점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군대 안에 있는 극장의 영사기를 관리하는 일을 맡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스스로도 그 시절 영화를 돌리면서 화면의 구성과 카메라 앵글의 다양성, 배우들의 표정이나 연기를 공부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지만 마냥 탄탄대로를 달릴 수는 없는 법이다. 1954년 그는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로스앤젤레스 커뮤니티 칼리지에 입학해서 본격적인 연기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무참히 깨지고 만다. 희망에 부풀어 찾아간 헐리웃에서 그는 찬밥 신세가 된다. 그의 전기 작가로 유명한 마크 엘리엇은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유니버설 영화사와 주급 75달러, 7년 조건부 연수 계약이 이뤄졌다. (하지만 1년도 못 가 계약은 깨지고 만다) 1955년 10월 23일 갑작스럽게 유니버설에서 방출됐다. 이유는 그의 이빨과 유난히 튀어나온 목울대를 부정적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해고 사유였다. 오히려 그런 거칠고 야성적인 이미지는 서부 영화에서 그의 독보적인 캐릭터를 부각시켜 주는 리스트들이었다. 모든 성공 스토리들이 그렇듯이 그에게도 조금은 참고 인내해야 하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유니버설로부터 해고를 당한 시점이 바로 그 시기였다. 이후 그는 TV 드라마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어쩌면 헐리웃을 스쳐간 수많은 연기자들처럼 그렇게 TV 드라마로 푼돈이나 벌면서 삶을 만족했다면 오늘날 같은 그의 성공 신화는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늘 뭐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할 줄 몰랐다.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를 향해 도전했다. 그리고 1964년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전기를 다룬 작가들은 그것을 '클린트 럭'(Clint Luck)이라 불렀다. 징집영장을 받고 군대에 갔지만 영사기 관리일을 맡아 영화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게 첫 번째 행운이었다면, 두 번째 '클린트 럭', 그 행운은 유럽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스파게티 웨스턴'에서 시작된다. 바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연출한 <황양의 무법자>가 그것이다.

당시 헐리웃에서 잘 나가는 배우들은 유럽 밖에서 제작되는 서부 영화에 별로 애정이 없었다. 게다가 출연료까지 낮다면 더 이상 고민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편견과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그들과는 뭔가 달랐다. 그에게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었다. 미국이 아니라 유럽에서 몇 달을 보내야 하는 일도 그에게는 일종의 여행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도전은 엄청난 성공으로 보답한다. 미국보다 유럽에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거리를 혼자서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헐리웃 평론가들의 '스파게티 웨스턴'에 대한 반감이 여전했다.

그들은 미국의 가장 신성한 가치를 담은 서부극을 유럽인들이 침범했다고 여겼다. 이스트우드는 그 도발의 가담자가 되었다. '뉴요커'에서는 이 영화를 '멍청하고 고통스럽다'고 평가했다. 도대체 왜 웨스턴(서부극)이라는 단어를 붙이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뒤이어 발표된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에 대해서도 비난은 계속 이어졌는데, '뉴욕 타임스'의 수석 영화 평론가 레나타 아들러는 "불 지르는 놈, 사기 치는 놈, 난도질 하는 놈, (이 영화의 제목은 대단히 적절치 않다)은 괴상한 장르에 속하는, 역사상 가장 비싸고 위선적이며 불쾌한 영화인 게 분명하다"고 악평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비난을 하면 할수록 대중들의 인기는 높아갔다. 남들이 뭐라 하든 이스트우드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어찌 됐든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는 그에게 엄청난 돈과 명성을 안겨줬다. 본격적인 헐리웃 영화 인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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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늘 정체된 인생을 거부했다. 새로운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남들에게는 위험하다고 느껴지는 곳으로 서슴없이 뛰어드는 용기가 있었다. 1971년 <어둠 속의 벨이 울릴 때>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던 것도 일종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앞뒤를 재고 이익을 따져서 행동하지 않았다. 영화를 찍을 때도 그는 카메라를 앞에 두고 고민에 고민을 하는 감독을 선호하지 않았다. 일단은 ‘지금 당장 영화를 찍고 질문은 나중에 하라’는 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선호했다. 이론보다는 몸으로 먼저 실천하는 삶, 그것은 그의 인생철학이기도 했다.

<더티 해리> 시리즈로 시작되는 1970년대에는 범죄와 사회적 모순에 대한 그의 시각이 드러난다. 그는 난관과 어려움을 회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대단히 연약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두 '글쎄. 우리가 이 일을 심리적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요?'라는 말에 익숙해진 세상이지요. (왕년에는) 못된 놈들한테 주먹을 되돌려 주면서 그 자리에서 끝장을 봤습니다. 상대가 나이가 더 많아 당신을 괴롭힐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당신은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존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당신을 건드리는 놈들은 없어졌습니다." (<American Rebel: The Life of Clint Eastwood>, Marc Eliot)


어쩌면 이런 면들 때문에 그가 미국 사회에서 보수의 아이콘으로 통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이념보다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좌나 우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자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아이스크림을 거리에서 팔지 못하도록 조례를 만든 것을 보고 시장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가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음을 잘 알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대부분의 남자들이 은퇴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56살에 그는 지금까지 걸어오지 않았던 새로운 길에 도전했다. 1986년 선거운동 자금으로 4만 달러를 지출하면서 주급 200달러짜리 시장직에 출마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이스트우드의 압승, 총투표수의 72퍼센트를 얻어냈다. 당시 경쟁 후보는 선거운동 비용으로 고작 300달러를 지출했을 뿐이다. 하나 마나 한 선거였다는 뜻이다.

참 흥미로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그 두 번째 시리즈를 쓰는 지금 내 입장에서는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제공해주는 인물이다. 그는 머리보다는 몸을 더 많이 썼다. 생각하고 재기보다는 먼저 하나라도 실천했던 인물이다. 그것이 나에게도 자극이 되고 있다. 누구나 그렇지만 나이가 들수록 몸이 둔해진다. 행동이 느려진다. 불의를 봐도 모순에 빠져도 그것에 직접 몸을 던지기 쉽지 않다. 이스트우드의 삶은 그런 나태와 안일함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2013년에 썼던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가 머리를 써서 나이 듦을 극복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번 2017년의 '뒤늦게'는 몸을 써서 나이를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이스트우드는 가장 적절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스스로 세상을 향해서 증명해야 할 것들의 목록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것도 아주 긴 리스트로 작성되어 있는 목록이다. 나이가 들어도 멋과 품위를 잃지 않고, 정의감이 투철한 건강한 이웃집 할아버지. 2008년 그의 나이 78세에 제작했던 <그랜 토리노>가 그런 영화다. 다시 말하지만 결국 그의 인생에서는 캐릭터가 곧 숙명이다. 자신에 닥치는 모든 운명에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고 있다. 한눈 같은 건 팔지도 않는다. 아마도 그건 1992년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기 시작했던 이스트우드가 도달하는 인생의 종착역 같은 같은 곳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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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나이가 들수록 삶이 무료하다고 말한다. 그건 분명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무료한 인생의 캐릭터를 선택한 때문이다. 나이들 시간조차 없는 이스트우드 같은 노년을 보면 그 삶에 대한 열정과 활기 역시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멋진 노년을 맞이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이란 무대 위에 이스트우드 같은 캐릭터를 만들고 연기하라. 캐릭터가 숙명이다.

지금도 새로운 영화를 구상 중에 있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나는 시작을 즐기는 사람들이 좋다. 시작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설렘이 있고 긴장이 있다. 그 설렘과 긴장 때문에 나이를 잊고 늘 새로운 하루하루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몇 주 동안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영화와 전기들을 훑어봤다. 전체를 통틀어서 그가 남긴 가장 멋진 말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해 온 거의 모든 일마다 그 일을 하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중요한 건 그가 그들의 충고에 별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글: 김덕영 (작가 /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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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뭔가 특별한 인생, 재밌는 일상을 같이 공유하길 원하는 분은 언제든 서촌의 골목길로 발걸음을 한 번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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