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가 만족할 때까지!
'김덕영의 인문학 여행' (54)
데이빗 프라이스의 <픽사 이야기>를 읽고 느낀 감상을 중심으로...
1991년 3월 존 래스터(애니메이션 총감독)는 '토이 스토리'라는 가제를 붙인 영화의 트리트먼트(Treatment, 줄거리를 포함한 간략한 영화 기획안)를 디즈니 컴퍼니에 제시했다. 1984년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부활을 이끌어낸 인물, 카젠버그는 '토이 스토리'의 초안에 공감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단 한 가지 요소만을 제외한다면, '토이 스토리'의 아이디어는 별 볼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만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켰다. 그것이 '토이 스토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고, 다른 어떤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핵심적인 아이디어였다. 그것은 바로 장난감이 사람의 부주의로 주유소에 남겨진다는 상황의 설정이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이후에 한 번 도 변하지 않은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의 제1법칙, 위대한 모험극의 여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토이 스토리'의 1차 트리먼트를 살펴보도록 하자.
'누구나 어린 시절에 장난감을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 잃어버린 장난감이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회복하려고 애를 쓴다는 내용이다. 즉 아이들과 함께 놀고 싶어하는 장난감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이들과 함께 논다는 것은 모든 장난감의 존재 이유다. 또한 이것은 장난감이 존재하는 정서적인 기반이기도하다.'
비록 많은 부족함이 있었지만, 디즈니 컴퍼니는 1991년 5월 3일 마침내 최종 합의안에 서명을 한다. 물론 13쪽이나 되는 재무 관련 합의 사항들을 모두 디즈니가 유리하게 가져가는 조건에서 이뤄진 계약이었다. 만일 <인어공주>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경우 픽사가 가져가는 수익은 별로 없는 조건이었다. 디즈니는 '언제든 영화를 포기할 권리'를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행사할 수 있었다. 계약이 취소될 경우 픽사는 겨우 노동력 제공에 대한 대가로 35만 달러만 받기로 되어 있었다. 매우 불공정한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픽사로서는 대단한 기회였다. 애니메이션 총감독 존 레스터뿐만 아니라 애플에서 쫓겨났던 스티브 잡스에게도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다만 잡스에게는 끝까지 자존심이 있었다. 그의 자존심은 늘 최고를 지향하는 것에서 나왔다. <토이 스토리>의 경우에도 그것은 조금도 달라질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잡스의 그늘에 가려 <토이 스토리> 제작에서 가장 헌신적인 노력과 재능을 보였던 존 레스터, 그를 위시한 100여 명의 애니메이터들의 역할 또한 결코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될 부분이기도 하지만...
첫 번째 트리트먼트에서 결정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주인공 '우디'의 역할이었다. 너무 괴팍하고 때로는 돌출적이면서 장난감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문제적 페르소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바로 여기서 디즈니 쪽의 카젠버그가 큰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카젠버그는 디즈니 내에서 '토이 스토리'와 같은 무모한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을 굴복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영화 스토리의 가장 큰 한계를 극복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면서 이야기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켜나갔다.
회의가 열릴 때마다 카젠버그는 늘 '토이 스토리' 제작팀을 지지했다. 하지만 트리트먼트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48시간>이나 <흑과백> 같은 버디 무비로 스토리를 유도했다. 두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서로 싫어하면서도 주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력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 '토이 스토리'의 핵심적인 인물 캐리턱가 이렇게 창조되기 시작했다.
두 번째 트리트먼트를 거치면서 영화의 스토리는 더욱 세련되게 변했다. 특히 1차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던 '티니'라는 인물이 우주 영웅 피규어 템퍼스(최종적으로는 '버즈 라이트이어'로 결정)로 바뀐 것만 봐도 그렇다. 존 레스터는 버디 무비가 돋보이기 위해서는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정반대일 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주 영웅의 캐릭터와 정반대 되는 카우보이 피규어 '우디'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우디라는 이름은 존 포드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옛날 서부영화에서 등장하던 성격파 흑인 배우 우디 스트로드의 이름에서 따왔다.
성격은 물론이고 생김새까지 얼핏 보면 비슷한 느낌을 주는 '우디'의 캐릭터는 미국의 대중문화가 옛것과 만나고 전통을 존중하는 방식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나중에 결정되는 우주 영웅 템퍼스를 대체할 이름에도 존 레스터는 아폴론 11호를 타고 닐 암스트롱과 함께 달에 처음 발을 디딘 우주 조종사 버즈 올드린이라는 실제 인물에서 이름을 따와 '버즈 라이트이어'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1992년 6월 디즈니 컴퍼니에 전달한 세 번째 트리트먼트에 드디어 '토이 스토리'의 두 주인공 우디와 버즈가 탄생하게 된다. 디즈니 경영진은 픽사의 새로운 트리트먼트와 샘플 이미지들을 보고 드디어 열광하기 시작했다.
'디즈니가 만족할 때까지!'
당시 픽사의 존 레스터와 스토리 제작자들은 자신들이 장편 영화 시나리오에서 초짜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몇몇 단편영화에 이름을 올린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장편 영화의 제작에는 참여한 적이 없는 모두 진짜 초짜였던 것이다. 때문에 레스터와 스토리 담당자들이 갖고 있던 일종의 불안감 또한 대단했다. 그들은 그 불안감과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가 시나리오의 대가 로버트 맥키가 마련한 사흘짜리 워크숍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들은 아리스토테렐스의 <시학>에 바탕을 둔 로버트 맥키 원칙의 신봉자가 되어 픽사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특히 주인공과 그의 이야기는 주인공 앞에 펼쳐지는 여러 힘들이 주인공을 흥미로운 존재로 만들 때만 흥미로울 수 있다는 원칙에 이끌렸다. 캐릭터는 그가 처한 여러 가지 문제에 반응해서 선택하는 행위들을 통해서 사실적이고 강력하게 태어난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디즈니 역시 손만 놓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계약서 상에 명시된 자신들이 휘두를 수 있는 모든 전권을 동원해서 '토이 스토리'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스토리에 올인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정말 눈물겨울 정도로 처절했고 원칙에 충실하려는 완벽주의자들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디즈니는 외부 작가들을 쓸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해서, 조엘 코언의 코미디 작가 팀과 몇몇 시나리오 전문 작가들을 고용해서 픽사 스토리 팀에 붙였다. 7번의 수정 작업이 거친 뒤 코언과 시나리오 작가들은 픽사를 떠난다. 제작 과정에 스토리 팀으로 참여했던 페트로프라는 사람은 이 과정을 이렇게 증언했다.
"디즈니는 이들을 호되게 몰아붙였습니다. '이야기를 좀 더 잘 짜라, 싫음 말든가'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픽사)은 자신만만하게 그리고 웃으면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당시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이 인터뷰 한마디는 잘 보여주고 있다. 픽사 역시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활용했다. 제작이 본격화되면서 24명이던 스태프가 110명으로 늘어났다. 애니메이터가 27명, 기술감독이 22명, 화가, 기술자가 61명이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픽사에 모여든 사람들의 주된 동기가 돈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토이 스토리'는 남들이 가지 않았던 처음 가는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토이 스토리'는 이전에 전례가 없는 100퍼센트 컴퓨터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되는 최초의 장편영화였던 것이다. 그것이 픽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가장 큰 동기였다. 디즈니가 '토이 스토리' 제작비로 지불한 1,750만 달러는 시간이 가면서 점점 부족해졌다. 그 액수는 픽사의 직원들 모두에게 충분한 급료를 지급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애니메이터는 연필을 가진 배우다'
'토이 스토리'에 애니메이터들이 보여준 열정은 대단했다. 심지어 다리가 바닥에 붙어 있는 플라스틱 초록 군인들의 움직임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 애니메이터들은 널빤지에 못질을 해서 붙인 신발을 신고 며칠 동안 걸어 다니기도 했다.
완성된 쇼트는 하루 24시간 돌아가는 117대의 선마이크로시스템의 컴퓨터들로 구성된 이른바 '렌더팜 render farm'에서 렌더링 되었다. 짧게는 45분, 길게는 20시간이 넘는 쇼트들도 있었다. 한마디로 최고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최고가 되고자 노력했다. 비록 처음 가는 길이었지만 절대로 초짜라고 주눅들지도 않았고 두려움에 밀려서 뒤쳐지지도 않았다. 그것이 '토이 스토리' 제작팀이 갖고 있던 최고의 자산, 바로 열정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이 오래된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의 제작 과정에 열광했던 이유일 것이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 와인 바(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작은 음악회와 강연회,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인문학 아카데미까지 일상의 작고 소소한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