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순정, 남자의 욕정, 그 차이가 늘 사랑의 비극을 부른다
'김덕영의 숨은 명작 찾기' (3)
오로지 한 남자만을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시선 속에는 그 남자가 전부였고, 그가 치는 피아노 소리는 세상 어떤 멜로디보다 황홀했다. 비록 짝사랑이었지만 숨죽여 창밖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심정은 행복했다. 그래서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무엇이라도 내줄 수 있을 정도로 가슴 절절한 사랑을 했다. 딱 하룻밤의 데이트, 그날 밤의 밀회로 아이도 생겼다. 하지만 여자는 아이의 탄생조차 비밀에 부칠 정도로 자존심도 센 여자였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사랑했던 남자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만났던 수많은 여자들 중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만약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런 남자는 그냥 '고소' 감이다. 침 한 번 퉤 뱉고 두 번 다시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남자다. 하지만 1900년 비엔나에 살고 있던 여자에겐 우리와는 다른 감정이 있다. 그것이 문화와 전통이 만들어낸 어떤 관습적인 것이 모르겠다. 어쨌든 그건 일종의 여성의 굴레였다.
그런데 그걸 보는 내내 가슴이 짠하다. 비비안 리가 사랑과 추억을 위해 워털루 브릿지에서 템즈 강으로 몸을 던지던 <애수>라는 영화가 오버랩된다. 그때도 그랬지만 흑백 영화의 여주인공들은 왜 그렇게 하나 같이 슬프고 애절하고 또 아름다운가. 이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고 있는 조안 폰테인도 그렇다. 그렇게 이쁘지도 않고, 그렇게 몸매가 예쁘지도 않지만, 적어도 남자를 향한 은밀한 사랑의 시선을 내뿜는 장면들은 정말 압권이었다. 바람이 불면 휘청거릴 것 같은 가냘픈 여자, 하지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을 찾아나가려 애쓰는 주체적인 인간, 그런 리자 역을 완벽히 소화하고 있다. 어쩌면 나 역시 조안 폰테인이 연기하는 리사라는 한 여자의 이해하기 어려운 시선들 때문에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녀의 시선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따라가면 영화는 참 재밌다. 하지만 반대의 심정으로 보기 시작하면 좀 짜증이 나는 영화일 수도 있다.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1948년 독일계 유대인 막스 오필스가 미국 헐리웃에서 만든 작품이다. 1992년 미국 의회 도서관은 이 영화를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미학적으로 보존될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선정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00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고풍스러운 정경은 물론이고 여성의 심리 묘사가 섬세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20세기의 문턱에서 19세기를 바라보는 느낌도 든다. 가스등으로 가로등을 켜고, 남자들은 사랑과 명예를 위해서 권총 대결을 펼치기도 한다. 새로운 세기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알 수 없는 세기말적인 불안감이 전염병처럼 계속 따라붙는다. 영화 속에서는 장티푸스로 주인공 여성이 목숨까지 잃어버리는 극적인 배경이 된다. 그런 구세기의 심리와 정서가 영화 곳곳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 남자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유일한 여자로 기억되고 싶어요!"
남자와의 하룻밤 사랑으로 아이가 생기기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알리지 않는다. 자기 혼자 힘으로 아이를 키울 결심을 한다. 남자의 이름을 알려달라는 수녀의 질문에도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남자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여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게 유일한 이유였다. 그것이 20세기 여자들의 자존심이었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한둘이 아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을 기억조차 못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그토록 집착했는지, 돌아오겠다는 남자의 약속을 정말 믿었던 것인지,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렸던 남자에게 가정까지 꾸린 여자는 왜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것인지.
감독인 막스 오퓔스는 사회적인 구조에 속박된 인간들에 대한 심리묘사가 탁월한 감독이다. 그래서 멜로드라마지만 사회가 지닌 구조적 모순에 대한 문제제기를 빼놓지 않는다. 여자는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반항적인 여성의 모습이 돋보인다. 여성에게는 자아를 확립하는 일이 삶을 통째로 건 운명적인 모험일수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짝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지기 싫어서 어머니 허락도 없이 기차역을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결혼한 유부녀의 몸으로 과거 남자의 아파트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한 여성의 주체를 향한 반란은 곳곳에 등장한다. 어떤 면에서는 <인형의 집>에서 보았던 로라도 살짝 엿보이는 듯하다. 여성을 가뒀던 온갖 구조적인 제약들에서 벗어나려는 욕망들이 꿈틀거린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의 시선이다. 도대체 자기를 짝사랑하는 여자의 시선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란 무엇인가? 문 밖에서 서성이던 여자를 그저 호기심의 대상 정도로만 생각하는 남자란 또 무엇인가? 자기 자식을 세상 어딘가에서 키우고 있는 여자를 남자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여자에겐 전부였던 것이 남자에겐 '원 오브 뎀' 정도이었니 말이다. 영화 후반부에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를 읽으면서도 남자는 자신과 운명처럼 엮였던 그 여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집사가 종이에 써준 '리사'라는 이름을 보고서야 겨우 그녀에 대한 기억의 단서를 회복하는 남자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자의 순정, 남자의 욕정, 그 차이가 사랑의 비극을 부른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한다. 요즘엔 순정적인 남자, 이기적인 여자란 관계도 흔하니 말이다. 어쨌든 영화 속에선 세 번의 만남, 세 번의 시선이 교차한다. 그 시선과 만남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한 여자를 있는 힘을 다해서 마지막 사랑의 편지를 쓴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계속 맴도는 여자의 시선들이 가슴을 적신다. 결국엔 명작이란 끊임없이 관객에게 자기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살아왔던 과거를 돌아보고, 자신의 허물을 비추는 거울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적어도 그런 점에서 남자들이 꼭 봐야 할 영화 중의 하나가 아닐까. 오늘처럼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미투, me too' 선언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세상 속에서는 더더욱 남자들에게 필요한 영화란 생각이 든다.
아! 그리고 하나 더... "하도 오래전 일이라서 잘 기억이...", "그때는 연애 감정에 휩싸여서..." 혹시라도 이런 말을 하면서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성폭력의 허물들을 덮으려고 하는 남자들이 있다면, 그런 남자들에게 이 영화를 꼭 보여주고 싶다. 남자의 하룻밤 로맨스가 여자에게 비극적인 운명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잊지 말라는 메시지와 함께...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