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와 이세돌 대결에 관한 한 인문학 전공자의 견해
글: 김덕영('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인공지능 알파고와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의 바둑에 관한 인문학 전공자의
한 견해...
제목부터 뭐라 정확히 정하기 쉽지 않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나에게 이번 일은
적지 않은 파장을 주었다.
바둑을 두는 사람도 아닌 내가, 고작
20년 전 빠졌던 바둑에 대한 열정과 관심만으로
이번 대국에 관해 뭐라 말을 꺼낼 입장도 아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고서는 그냥
넘어가기엔 심기가 너무 불편하다.
난 평소 바둑TV나 중계는 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이번 대국은 두 번 모두
생중계로 전체를 시청했다.
인문학을 전공한 나에겐 이번 대국이
테크놀로지와 인간 사이에 놓인
균형추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였고
앞으로 올 미래를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인공지능에 얽힌 신비로운
테크놀로지들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맞춰서 이번 대국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대국이 시작되기 전 거의 모든 국내외
바둑 전문가들은 이세돌의 우세를 점쳤다.
이세돌 본인도 5:0의 스코어를 언급했을
정도였으니까, 다른 말이 필요 없다.
물론 상대편을 지휘(?)하는 딥마인드의
데미스 하사비스는 조심스럽게 알파고의
우세를 점쳤다.
나는 거듭 말하지만 이번 대국에서
알파고가 4:1로 이길 거라고 전망한다.
기계적인 판단을 하자면
5:0의 승리일 것 같지만.
만약 알파고가 5:0이 아니라
4:1로 이세돌을 이긴다면,
그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존하는 인공지능의 수준이
인간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한 판 정도는 봐주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지닌.
아무튼...
인문학적인 접근으로 봤을 때,
인간과 테크놀로지는 끊임없이
경쟁과 대결을 펼쳤다.
어쨌든 승리는 '인간'이다.
인간의 손에 의해서 테크놀로지가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리고 그런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통해 인간의 인식의 지평도 확장됐다.
혁명적으로 인간의 인식 지평을 확장시킨
계기들만 나열한다면, 대충 이렇다.
프로메테우스,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드,
그리고 알파고? ㅎㅎ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던 프로메테우스
덕분에 인간은 지구 상 가장 나약한 존재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게다가 불을 통해 음식을 익혀서 먹을 수 있게
되면서 두뇌의 발달에 필수적인 영양소를
원활하게 공급시킬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지구 상에서 어떤 동물도 이룩할 수 없는
놀라운 진화의 첫발을 의미했다.
이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모든 행성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천동설이 지배하던 근대 이전의 세상에서
'지구가 돌고 있다'고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는
인식 지평의 순간이었다.
1543년 그가 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우주와 지구는 구형이며 천체가 회전하듯
지구도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 것이라는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이론을 제시한다.
이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한
고대 그리스 철학적 지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당시로서는 기껏해야 행성과 별들의 궤도를
관찰함으로써 정중앙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지구 중심설'이 그래도
프톨레마이어스와 같은 양심적인 과학자들이
주장할 수 있는 과학적 이론의 최대치였다.
하늘이 돌고 있지, 인간의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돌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여겨졌던
믿음이 깨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라고까지 이름 붙여진
이 혁명적인 대전환의 사건 때문에
이제 인간은 신의 절대적 권능을
부여받은 우주의 중심에서 권좌를 내줘야 했다.
신에 의해 오직 유일하게 부여받은
혜택 받고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인식의 지평 위에 올려진 것이다.
하지만 지구가 우주의 작은 한 점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인식,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도 좋았다.
인간은 여전히 신에 의해서 창조된
혜택 받은 존재이며 고귀한 존재성을
부여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의 존재,
그 기원에 대한 의심을 하기에 만들었다는
점에서 또 한 번의 지평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진화론과 창조론이 논쟁이 되었고
그걸 과학적으로 논증하는 과정에서
생물학에 바탕을 둔 다양한 테크놀로지들이
개발됐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동안
판도라의 상자 속에 갇혀 있었던
인간의 윤리적 가치관의 문제들이
이성의 도마 위에 올려졌다는 점이다.
진화론 이전까지 선한 것은 좋은 것이고
올바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정의이며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도록 짜인
존재라는 믿음이 존재했다.
진화론은 인간이 그동안 업신여겼던
동물의 한 부류인 침팬지에서 진화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오만에 빠졌던
인간의 뒤통수를 후려친 격이다.
진화론은 단지 생물학에 그치지 않고
철학과 윤리학, 사회과학에서 통념이라
믿었던 가치관들을 모조리 부서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불행한 것은 진화론이 사회이론과
접목되면서 훗날 적자생존, 나치즘 등과 같은
비인간적인 역사를 장식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도 좋았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인간은 이 지구 상에서 가장 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존재였다. 악한 행동도 하고
비열한 짓도 일삼는 부족한 존재지만,
그래도 인간의 행동 패턴에는 이성적인
예측이 가능한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것이 종교였고 윤리이자
덕목이었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갖고 있다 여겨졌던 이성적인 양식이
거대한 무의식의 기반 위에서 불안하게
존립하고 있다는 가설을 펼쳤다.
매우 설득력 있는 이론이었다.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가 하는
이해하기 힘든 폭력성, 잔인성,
맹목적인 행동들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지 않은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 신비로운 무의식 세계를 도대체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를 놓고 또 한 번 과학계는
출렁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차피 인간의 역사는
'도전과 응징'을 통해서 끊임없이 제 갈피를
찾아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체되지 않는다는 건 곧 죽음 앞에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물론 인식론적으로 말이다.
이렇게 길고 긴 인간의 문명사에서
가설과 이론, 기술과 인간의 도전과 응징은
끊임없는 경쟁을 낳았다.
결과가 무엇이든 도전하고 그에 대응하고
그걸 뛰어넘는 과정 자체가 조화와 공생의
관계를 유지했다.
나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입장도 그렇다.
조화와 공생을 모색하며
다양성 속에서의 일체를 추구하는 것.
그 안에서 인간은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는 믿음이
나에게 있다.
그제 어제 벌어졌던 '알파고'의 등장은
어쩌면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작은 한 점을 첨가한 것인지 모른다.
도전과 응징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
흘러가는 한 점 낙엽처럼.
하지만 여전히 불편하다.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기술이 진보하면 이론적으로
인간은 편리해져야 한다.
인간을 편하고 이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테크놀로지일 테니 말이다.
감성, 이성, 직관...
이 세 가지는 세상을 인식하는
인간의 핵심적인 방법들이다.
몸과 감각을 통해서 세상을 받아들이고
두뇌를 통해서 우리는 감성이 다
해결하지 못한 추상적이고
분석적인 진리를 깨닫게 된다.
덕분에 인간의 삶에는 법칙이 존재하고
원칙이 세워졌다.
그런 기둥들로 만들어진 지혜의 집에서
인간은 늘 의미 있는 존재로 발전했다.
여기에 오랜 경험과 분석적인 이성이
결합되어 기능하는 직관적 능력까지
갖춘 존재.
감성, 이성, 직관, 그 너머에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불가지의 세계',
즉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그냥 신의 영역으로 놔둬야 하는
영역이 아니었까.
우리에게는 큰 이슈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실 얼마 전 과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수수께끼라
일컬어지던 '중력파'를 검출하고 확인하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블랙홀의 존재를 알고만
있었지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지 못했다. 우주의 신비를 푸는 열쇠를
쥐고 있을 수 있다는 블랙홀.
열쇠가 있어도 열쇠를 꽂고 돌릴 수 있는
자물쇠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인간이 찾아냈다.
이제 열쇠의 비밀번호만 알게 된다면
중력파를 찾아 그 신비로운 세계로
인간이 진입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 된다.
그래도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건,
알파고가 불패의 신화를 만들 건 뭐건
상관없이, 우주의 신비로운 신호를
찾아내건 말건 상관없이, 모든 건
인간이 우리가 콘트롤 할 수 있다는
믿음이지 않을까.
지금 내가 불편해지는 원인은
아마도 그 믿음이 깨지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 아침, 난 이 글을 쓰기 위해서
평소 하던 대로 구글을 열고
알파고의 아버지이자 천재 개발자에 관해서
조사를 시작했다.
내가 네모난 검색창에
'데이빗 하사비스'를 치자,
그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문제는 이름에 있었다.
'데이빗'이 아닌 것 같았다.
'데니스'라고 쳐봤다.
그래도 역시 그에 관한 정보는
어김없이 검색되었다.
별거 아닌데 왜 그러냐고
한다면 뭐 나도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이건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인 우리가 경험과 지식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인식하는 과정을 닮아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오류와 오차를
줄이고 극복하면서 뭔가를 찾아오지 않았나.
틀린 것을 스스로 잡아주고
나에게 맞는 것들로 이끌어주는
편리한 세상.
스스로?!
내가 불편한 이유를 겨우 하나 찾은 것 같다.
스스로...
그럼 우린...?
그래서 알파고 저 너머가 난 두렵다.
한 가지 더...
나의 오류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언론사
기자들도 알파고 아버지의 이름을 처음에
잘못 알고 있었다.
구글이 스스로 오류를 잡아줬던
그 애 아빠 이름은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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