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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Aug 16. 2018

'위닝 멘탈리티(winning mentality)’

승리를 부르는 힘 '멘탈리티(mentality)' 이야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나는 문화적으로도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꼭 돈이 문제가 아니다.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진다고 해도 그것이 곧바로 ‘문화의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반대 논리로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꼭 돈이 많아서 문화의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것도 아니다. 문화의 빈곤과 풍요로움을 가르는 기준이 꼭 돈일 수는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문화의 사전적 의미가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서 공유되고 전승되는 물질과 정신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돈은 아니지만 뭔가 확실하게 느껴지는 유형의 물질적 결과물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거대한 피라미드 앞에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웅장한 아름다움, 문화의 융성을 느끼는 것도 그런 이유다. 문화란 확실히 뭔가 볼 게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K-POP에서 느껴지는 현란한 안무나 감미로운 선율, 가수들의 가창력들 역시 확실히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치들이다.


그런데 문화는 파도와 같아서 한 번 치기 시작하면 그 여파가 상당하다. 거대한 파도 앞에서 그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파도를 거스르기보다, 파도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것은 어떨까. 높은 파도 위에 올라 조금 더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 글은 사실 그런 감정으로 썼다.


'문화의 파도는 누가, 어떻게 일으키고 있을까?'


이유 없는 무덤 없듯이, 한 사회를 강타한 문화의 파도에도 분명한 원인이 있다. 범죄에는 범인이 있고, 사고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듯이, 그렇게 문화에도 시작과 끝이 있다. 누군가 시작했으며, 누군가는 그걸 받아들여 퍼뜨렸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열심히 즐기고 감상하며 일종의 문화의 소비를 즐겼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마지막 스토리가 꼬일 때 나타났다는 하늘 위 줄 달린 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그렇게 한 판에 문화와 스토리가 정리되지는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이야기가 정리되는 곳은 좀 위험한 곳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튼. 문화의 파도를 일으키는 힘이 '멘탈리티(mentality)'라고 나는 믿는다. 여기서 멘탈리티란 의식이나 사고방식에 생활의 감정이 포함된 좀 복합적인 개념이다.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듯, 사회 안에도 분명 눈에 보이지 않는 공동의 정신, 느낌, 감정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멘탈리티다. 외국에 나가면, 나라마다 느껴지는 아침의 서늘함이 다른 것도 그런 이유고,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가도 도시마다 식사의 매너나 문화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결국엔 문화의 파도를 일으키는 멘탈리티의 영향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시선으로 사회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조금은 난해한 문제들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실체가 없게 느껴지는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틀이다. 훨씬 쉽게 그 사회를 이해하고 엿볼 수 있는 열린 창문이 된다.


멘탈리티는 특정한 공간과 분야에서도 각자 고유한 영역을 갖고 있다. 산업 현장에는 제품의 생산에 주력하는 사람들의 멘탈리티가 존재하고, 경기장에서는 선수들의 멘탈리티가 존재한다. 문화나 예술의 영역도 그들만의 멘탈리티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문화적으로 유럽 사회는 좋은 멘탈리티를 소유하고 있다. 그걸 키워나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성숙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사실 그들의 삶을 속속 들여다보면 의외로 단순하게 이유를 알게 된다. 그들이 어려서부터 시작해서 성인이 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성숙한 멘탈리티를 찾아나가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책과 여행'이다.

멘탈리티는 단기간에 성숙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숙성의 과정을 거쳐서 맛과 향을 더하는 와인처럼 멘탈리티는 시간이 제일 중요한 요소다. 아이가 자라면서 좋은 멘탈리티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 부모들은 책과 여행을 권장한다.

다큐멘터리 제작 때문에 유럽의 유소년 축구팀들을 취재한 적이 있다. 유럽의 프로축구 클럽에 소속되어 있는 유소년팀 아이들이 축구 경기장에서 연습을 하거나 경기를 하는 시간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교양을 쌓는 일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아무리 천재적인 스포츠 기질을 타고난 아이라도 교양을 쌓는 일을 게을리하면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아무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멘탈리티'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독일 분데스리가 레버쿠젠 축구팀 소속의 유소년 축구 선수들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책가방을 매고 경기장에 가는 레버쿠젠 유소년 선수들이었다. 인문학적 교양을 쌓는 일에 엄청난 시간을 할애하는 유소년 클럽, 그리고 참을성 있게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부모들, 이런 든든한 기다림과 배려는 아이들이 경기장에서 자신감으로 승화된다. 원정 경기를 갈 때도 단지 경기만을 생각하고 버스에 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원정 경기를 하러 떠나는 과정이 하나의 여행이 된다. 이것이 아이들을 성숙하게 만드는 또 다른 기회다.

독일 축구팀의 냉정하고 승리를 향한 흔들림 없는 집념, 그것은 독일 축구팀의 ‘위닝 멘탈리티’(winning mentality)라는 표현으로 집약되었다. 잉글랜드의 전설적인 골잡이 게리 리네커는 “축구라는 건 간단하다. 22명이 90분 동안 공을 쫓다가 항상 독일이 이기는 게임”이라고 정의를 내리기까지 했다. 물론 이번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문에 그런 독일팀의 기백이 좀 사그라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승리의 멘탈리티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다. 이미 여러 번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 올렸던 그들에게 승리를 향한 집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승리는 그라운드 경기장 밖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고 보는 게 옳은 것 같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독일 대표팀의 '위닝 멘탈리티'가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승부차기다. 독일은 승부차기에서는 세계 최강이다. 데이터가 그걸 증명한다. 지금까지 월드컵에서 맞닥뜨린 4차례의 승부차기 대결에서 독일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승부차기 명가로 아르헨티나 팀을 들 수 있는데, 두 팀 모두 월드컵에서는 승부차기로 진 적이 없는 팀이었다. 이런 두 팀이 2006년 월드컵 8강에서 공교롭게도 승부차기로 맞부딪쳤다. 승부차기 지존 간의 대결은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집중시켰다.



결국 아르헨티나 팀의 두 번째 키커와 네 번째 키커가 실축을 하면서 승리의 여신은 독일 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날 승부차기에 나선 독일 선수들 네 명 가운데 실축을 한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지금까지 독일의 승부차기 승률은 100% 전승이다. 승부차기 슈팅 성공률을 보면 더욱 놀랍기만 한데, 모두 18번의 슈팅중에서 17번의 슈팅이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단 한 번만 승부차기에서 실축을 했다는 얘기다.

‘우리는 언제나 승리했고, 승리할 것이란 믿음’, 그런 위닝 멘탈리티가 경기를 좌우한다. 산업 현장이나 일터에서도 결국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초반에 승부가 나는 경우가 많다. 생각의 조각 하나, 마음가짐 하나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독일 축구대표팀의 위닝 멘탈리티는 단지 스포츠계의 일화라고 말하기에는 훨씬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사회나 조직 속에서 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능력과 한계 그리고 성공의 필요충분조건에 관한 어떤 함수관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개인들의 자신감이 하나로 뭉쳐져서 만들어내는 아주 특별한 조직의 정신력이다. 늘 '이긴다는 마인드', '우승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남보다 더 승리를 갈구하게 된다. 늘 이겼기 때문에 이번에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앞선다. 승부는 경기장에서 심판의 호각소리가 울리기 전부터 이미 결정된다.


이런 논리를 확장시켜 보면,
왜 늘 상을 받는 사람이 상을 받고,
돈을 버는 사람이 늘 돈을 버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언제나 우승의 주인공, 성공의 주인공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에게는 남들보다 더 강렬한 성공의 갈증이 무의식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욕망은 큰 무대에 섰을 때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무대가 커질수록, 다른 사람들이 긴장을 시작할 때, 그들은 더 냉정해진다. 승부차기를 하기 위해 골문 앞에 선 독일 선수들은 늘 그렇게 슈팅을 날린다. 볼을 향해 달려가면서 그들은 볼이 골대를 벗어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찬 볼은 늘 골문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멘탈리티를 갖고 있는가? 왜 건강한 멘탈리티를 찾아야 하는가?


마음이 먼저, 그 결과는 나중에. 그렇게 마음먹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나 같은 유심론자(唯心論)들은 모든 것의 시작을 마음에서 찾으려 한다. 자연스럽게 경기가 불황의 늪에 빠져들고,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역시도 우리의 마음, 생각에서 일차적인 원인을 찾게 된다. 승리할 수 있다는 멘탈리티, 깨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도전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멘탈리티가 점점 사라지는 것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좋은 멘탈리티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발전시킨다면, 그 반대도 있다. 사회에는 부정적인 멘탈리티도 존재한다. 심리학자들이 예로 들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크랩 멘탈리티(crab mentality)와 같은 것이다.


직역하면 말 그대로 '게들의 멘탈리티’다. 이런 '크랩 멘탈리티’는 게들의 습성에서 유래했다. 위험에 빠진 상황 속에서 힘을 모아 위기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먼저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심리를 일컫는 말이다. 남들이 위기 상황을 극복해서 도망가는 것을 그냥 보지 못하고 잡아당기는 게들의 못된 습성에서 유래했다.

양동이 안에 게들을 집어넣고 가만히 놓아두면 게들의 행동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고 한다. 좁고 답답한 곳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게들이 서로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만약 어떤 게 한 마리가 다른 게들을 딛고 올라서 양동이 밖으로 탈출을 시도할라치면, 그 순간 그곳에서는 뜻하지 않은 반전이 일어난다. 다른 게들이 그 게의 탈출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동이 모서리까지 올라선 녀석의 발을 잡아 끌어내리고 심지어 어떤 놈들은 탈출 직전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다시 양동이 속으로 잡아당기기도 한다.

위험에 빠지면 생존본능이 우선하는 것은 본능이다. 게들에게도 생존의 본능은 존재한다. 하지만 생존의 본능이 곧 생존의 방식이 될 수는 없다. 저만 살아남겠다고 아우성치는 모습, 다른 존재의 생존에 대한 시기심, 이런 본능적인 멘탈리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미래란 어떤 모습일까. 그 결과를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우리 속담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바로 그것이다. 전형적인 크랩 멘탈리티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남보다 내가 우선하고 남이 잘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부정적인 멘탈리티는 공동체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성공과 승리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찬 위닝 멘탈리티나 자기만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크랩 멘탈리티가 뒤섞여 있는 모습, 그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지 않나 싶다. 그래도 이왕이면 연극 무대의 주인공처럼 당당하게 세상을 살고 싶지 않은가. 네 옆에 있는 사람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이 또 있을까.


결국 우리 안에 왕을 키울지, 우리 안에 도둑을 키울지는 결국 우리들 스스로의 선택에 달린 문제들이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작가,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 올 겨울 북한의 전쟁고아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한 편을 찍기 위해서 현재 기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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