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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Aug 23. 2018

극단까지 주관성을 의심하라

영화 <라쇼몽>을 통해서 본 극단적 의심의 가치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믿음'과 '내가 절대로 틀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확실한 것을 찾으려는 욕망이 학문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절대로 틀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만으로는 결코 진실한 것에 도달할 수 없다. 그건 정치나 종교의 영역에 해당된다. 게다가 틀리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오만과 남용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차라리 '내가 틀리 수도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지적인 자세다. 지식인의 신념과 가치는 '내가 절대로 틀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아니라 '나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 영화 <라쇼몽>은 문제의 출발이었다. 그것이 1950년에 세상에 나와, 나의 경우 1980년대 중반에 목격했던(?) 그 한 편의 영화가 아직까지 가슴을 뛰게 하는 이유다. 극단적 의심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합리적 의심이다. 그건 고대 그리스부터 수천 년을 이어져 오는 지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극단까지 주관성을 의심하라!


전통적으로 '집'이라는 단어에는 포근함과 안락함, 보호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집으로 향하는 길은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받으며,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학문과 지식이 권위와 독선, 야만의 틀을 깨고 새로운 토대 위에 이성의 꽃을 피우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발전해왔다면 그 기반에 해당하는 '학문의 집', 즉 도서관이나 서점들은 변하지 않는 토대 역할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시대나 야만의 시대엔 책이나 도서관이 제일 먼저 불태워지는 경우가 흔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야만과 광기를 보호했던 곳들이 바로 지혜의 '집'이었다. 사람들이 그곳에 '집'이란 개념을 넣은 이유는 근원적인 보호 본능을 자극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집'이란 개념을 통해서 문화와 지식을 축적하고 보호하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서양이나 동양이나 다를 게 없었다. 중세 유럽에 반이성적인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의 광풍이 휘몰아칠 때 고대 그리스의 원전들이 일시적인 피난처로 삼았던 곳도 이슬람 문명 세계의 지혜의 집들이었다. 불에 타 사라지기 직전에 놓였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들을 보호하고 다시 유럽의 문명 세계로 돌려보낸 역할을 했던 '바이트 알 히크마'는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된다. 여기서 '바이트 알 히크마(bait al-hikma)는 문자 그대로 '지혜의 집'이란 뜻이다.


영화 <라쇼몽>도 반쯤은 폐허가 된 절간의 문 앞에서 시작한다. 형태는 문이지만 거의 '집'의 형태를 띠고 있는 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부서진 문, 파괴된 집에서 영화를 시작하고 있다. 그가 무너졌다고 생각한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런 호기심을 갖고 영화 <라쇼몽>을 봤다. 이 글은 그 호기심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원작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나생문>과 <덤불 속>이다. 감독은 파괴된 '라쇼몽(羅生門)'을 공간(空間)의 축으로 삼고 '덤불 숲'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 사건들을 시간(時間) 속에 하나하나 대입하고 있다. 살해된 피해자 사무라이와 그의 아내, 그리고 평생 싸움질로 먹고살았을 피의자 산적과 우연히 덤불 숲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된 나무꾼, 이 네 명의 존재들에게 물음표를 던진다. '누가 진짜 범인이며,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하나의 살인 사건, 네 가지 엇갈리는 진술. 과연 사무라이의 죽음에서 진실은 뭘까?


재판정 앞에 끌려온 피의자 산적부터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순간의 욕정에 눈이 멀어 사무라의 아내를 겁탈했던 산적에게 애초부터 살인이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겐 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진 남자들끼리의 정정당당한 결투였고, 사무라의 죽은 그 결과일 뿐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남편 앞에서 산적에게 강간을 당한 아내에게도 정당한 이유가 있다. 완력에 의해서 산적에게 순결을 빼앗겼을 뿐인데도, 남편은 마치 자신을 더러운 여자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여자로서의 치욕을 이기지 못해 이성을 잃었고 결국 남편은 자기가 죽였다는 증언이었다. 자신을 더러운 여자처럼 취급하는 사무라이 남편, 그는 진정 결백한가.


심지어 죽은 자에게도 할 말은 있다. 놀랍게도 무당의 몸을 빌려 듣게 된 죽은 사무라이의 증언은 아내의 증언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가장 가까워야 할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둘의 이야기는 극단에 위치한다. 산적에게 강간을 당한 아내가 거꾸로 자신을 배신하고 산적과 달아날 궁리를 했다는 증언이었다. 그래서 아내의 배신감에 모멸감을 느낀 나머지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는 것이다.


동일한 공간에서 벌어진 하나의 범죄였는데도 불구하고 사건을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에 따라 범죄의 성립이 달라지고 있다. 모두가 그럴듯한 논리적 근거를 지니고 있고, 모두가 자신들이 죽였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이야기들이 모두 '라쇼몽'이라는 무너져가는 현관문 아래에서 나무꾼과 승려라는 제3자들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덤불 숲 속의 살인 사건과 빗줄기가 퍼붓는 허물어진 라쇼몽은 그렇게 시간과 공간이 교차된다. 마치 TV 쇼 프로그램을 보는 착각이 든다. 나무꾼과 승려는 사건을 해석하고 중재하는 '미디어(media)'의 역할을 한다. 아쿠타가와가 쓴 두 편의 소설 '라쇼몽'과 '덤불 숲'을 결합시킨 구로사와 감독의 재기가 번뜩이는 부분이다. 아쿠타가와라는 천재 작가가 살아서 영화 '라쇼몽'을 봤다면, 아마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라도 쳤을지 모른다. 그래서 영화는 소설 원작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로 인정을 받고 있다. 


누가 진짜 범인인지 알 수 없는 덤불 숲 살인사건의 주인공들,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 구조. 그나마 단 한 사람의 존재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사건을 이기적으로 해석할 뿐이다. 유일하게 그 모든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나무꾼이 바로 그 화자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무꾼이 바로 TV고 신문이며 인터넷 포털이다.


이 영화의 백미는 가장 객관적일 거라 여겨졌던 바로 그 나무꾼조차도 범죄에 가담한 존재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범죄의 현장에서 나온 결정적 증거물을 취득한 자. 피해자의 몸에 박혀 있던 값비싼 진주로 장식된 단도가 바로 그 증거물이다. 산적에게 사무라이의 아내를 취하고 싶다는 욕정이 살해의 동기가 될 수 있다면, 진주가 박힌 값나가는 단도는 나무꾼이 실체를 자신의 의도에 맞게 조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말이 이럴 때 딱이다. 



영화 <라쇼몽>의 재미는 같은 공간에서 벌어진 동일한 사건 하나가 인식 주체의 주관적 시선에 따라 얼마나 서로 엇갈릴 수 있는지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중요한 건 이런 현상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 곳곳에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는 사실이다. 믿을 놈 하나 없는 비정한 세상, 자기만 잘났다고 으르렁 거리는 이기적 욕망만 가득한 비정한 정글 속 같은 세상이다. 그렇다면 세상이란 결국 허무한 것인가? 그거기서 진실을 찾겠다는 건 의미없는 노력일 뿐인가? 결국 영화가 끝나는 지점에서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철학의 역사에서도 객관성의 증명이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주관성과 객관성의 대결 속에서 세상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지고 풍부해졌다. 사심 없는 제3의 시선만이 객관성은 아닐 것이다. 사물의 존재하는 모습 그 자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다른 말로 하자면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욕망이기도 하다. 그것이 법의 영역에선 진실에 대한 논쟁이었다. 정치와 윤리에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이었다. 경제에선 삶과 죽음이 걸린 생존의 논쟁이었다. 


과연 우리의 이성은 완전한 객관적 실체에 도달할 수 있을까? 사심 없는 객관적 존재란 가능한 말일까? 제3의 눈이란 또 무엇인가? 어쩌면 그건 절대적 신의 영역에서 가능한 것은 아닐까? 그로부터 많은 질문들이 이어진다. 어쨌든 인간의 이성은 그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그걸 파악하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구로사와 역시 이 논쟁에서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통렬하게 객관성의 허물을 끄집어낸다. 사심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제3의 시선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이다. 나무꾼이 갖고 있다던 객관적 시선의 실체를 낱낱이 해체하는 순간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그래. 누구나 다 이기적이다. 산적도, 여자도, 그 남자도, 그리고 너도!

그래서 넌 아니란 거야?!"


관객의 희망을 이렇게 극단까지 허물어버리는 영화가 또 있었을까. '라쇼몽 이펙트'라는 개념까지 만들 정도로 그 충격파는 컸다. 비단 일본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1951년 베니스 영화제, 1952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의 수상은 '라쇼몽 이펙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욕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오직 '진실하다' 믿고 싶을 뿐.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집 자체가 무너진 폐허 위에서, 그런 사람에게 무슨 희망 따위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럼 이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다시 질문의 원점으로 되돌아 오는 느낌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인생인데...


영화가 만들어지기 수십 년 전, 원작 <라쇼몽>과 <덤불 속>을 썼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도 이 문제는 핵심적인 고민거리였다. 1915년 근대의 파도 위에서 서핑을 하듯 대륙으로 진출하던 제국주의 일본, 그 잘 나가던 일본 제국의 젊은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눈에 세상은 이기심과 욕망의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걸 객관의 테라스 위에서 바라보려 했지만, 작가 본인도 본질은 다를 게 없었다. 산적이나 여자나, 사무라이나, 그리고 객관적일 거라 여겨졌던 나무꾼이나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와 달리 심지어 아쿠타카와의 원작 <라쇼몽>에는 죽은 여자의 시체에서 머리카락을 뜯고 있는 노파가 등장한다. 먹고살게 없어서 시체의 머리카락을 모아 가발이라도 만들어서 팔려고 작정한 비참한 인간이다. 그리고 비를 피해 잠시 머물렀던 사무라이의 시선이 존재한다. 역시 가난과 궁핍 속에 자결할 생각까지 하고 있는 비참한 처지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조건이다. 두 시선의 충돌 속에서 작가 아쿠타가와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사무라이는 살기 위해 노파의 옷을 빼앗는다. 죽은 시체에게서 머리카락을 빼앗는 사람이나, 힘없는 노파에게서 옷을 빼앗는 사무라이나 다른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답은 '살아남는 것'에 있다고 외친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동원해서라도 남을 이기는 것이 미덕이라 외친다. 하지만 그런 말을 크게 외칠수록 비참해지는 것이 또 인간이다. 그건 우리가 '수치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인간은 그 수치심 때문에 야수에서 인간이 된다. 


'내가 틀릴 수도 있을 거라는 믿음', 수치심, 성찰, 살아남는 것, 공교롭게도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고 있다. 극단까지 주관성을 의심한 투쟁의 결과로 얻어진 전리품들이다. 


결국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성찰의 거울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지니는 놀라운 가치가 있다. 누가 진실한가? 아니 누가 진실한지 알고 싶은가? 만약 지금 그 질문에 답을 찾고 싶다면, 그보다 먼저 '내가 절대로 틀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부터 무너뜨려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합리적 왕국은 그 무너진 토대 위에서 건설될 것이다. 허물어진 라쇼몽처럼...


글: 김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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