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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Aug 30. 2018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믿음,  세 번째 이야기

일명 'Staircase'로 불리는 '계단 살인' 사건의 진실에 관하여

2001년 12월 미국의 소설가 마이클 피터슨의 목소리는 떨렸다. 당시 다급했던 상황은 911 신고 접수 요원과의 통화에 그대로 녹음되었다.


"아내가 계단 밑에 떨어져 피를 흘리고 있다."

"살아 있는가?"

"모르겠다. 맥박이 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빨리 구급차를 보내달라!"


안락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던 마이클 피터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집,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아래서 아내가 피를 흘리며 싸늘하게 죽은 것이다. 사건 담당을 맡은 검사는 계단에 남겨진 피해자의 출혈 현장과 바지에 묻은 혈액을 증거로 남편인 마이클 피터슨을 캐서린 피터슨 살해의 유력한 용의자로 기소한다. 날카로운 둔기로 피해자의 머리를 내리쳐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주장이었다. 마이클 피터슨은 즉각 변호인단을 구성해서 반박에 나선다. '자신은 아내를 살해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15년 동안 논란이 된 일명 '계단 살인' 사건의 지루한 공방은 그렇게 시작된다.



과연 캐서린 피터슨은 남편에 의해서 무참히 살해된 것일까? 아니면 마이클 피터슨의 주장대로 술에 취해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사망한 것일까?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베트남 전에 참전했고, 소설가로 성공한 마이클 피터슨에게 살해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동기나 증거는 없었다. 안락한 가정, 집안에서 큰 소리 내서 싸움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 부부는 금실도 좋았다. 검찰이 마이클 피터슨을 용의자로 지목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현장에서 피해자가 흘린 과다한 혈액과 피해자의 머리에 생긴 상처였다. 하지만 범죄에 사용된 뚜렷한 증거조차 제시하지 못하면서 재판은 미궁에 빠진다. 그리고 난항을 겪던 재판은 검찰 측이 제시한 두 가지 증거로 인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마이클 피터슨이 양성애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실제로 사건이 있기 전 마이클 피터슨은 온라인 동성애 사이트에 가입해서 동성애를 즐겼다. 피의자의 성적 취향과 살해 동기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는 변호인단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이클 피터슨이 동성애를 즐겼다는 사실은 금실 좋은 부부로만 알았던 두 사람 사이에 불화의 불씨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가능케 했다. 한마디로 마이클 피터슨이 부부 관계에 충실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다툼이 벌어져 아내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는 검찰 측의 주장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마이클 피터슨에게는 또 하나의 약점이 있었다. 그가 독일에서 거주할 당시 전 이웃집 친구였던 한 여성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사망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독일의 경우 혈흔조차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거의 명백한 추락 사고였지만, '계단'이라는 동일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봤을 때는 분명 마이클 피터슨 입장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증거였다. 하지만 반론을 담은 변호인측의 항의는 법정에서 기각된다.


냉정한 시각으로 봤을 때, 마이클 피터슨이 양성애자였다는 사실과 독일의 계단 사망 사건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었다. 하지만 검찰은 두 개의 사건이 계단 추락이라는 동일한 형태를 띤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피의자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양성애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낙인 효과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어쩌면 마이클 피터슨은 선량한 시민이 아니라, 독일에서처럼 여성을 살해하고 계단 추락 사고로 위장했을 수도 있다는 또 하나의 가정이 성립된 것이다.


결국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던 배심원들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검찰 측의 증인으로 재판에 나온 혈흔 분석관 두에인 디버의 증언은 마이클 피터슨을 결정적으로 불리한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재판정에서 혈흔 분석관은 자신이 실험실에서 진행했다는 사건 재현 과정이 담긴 동영상을 증거물로 제출한다. 피해자의 머리를 둔기로 내리치는 장면과 가해자의 바지에 혈흔이 묻는 과정이 기록된 동영상이었다. 결국 배심원단은 검찰의 손을 들어준다. 1급 살인 혐의로 기소된 마이클 피터슨에게는 법정 최고형인 종신형이 선고된다. 2003년의 일이었다.


사건은 그렇게 종결되는 듯했다. 마이클 피터슨이 이미 8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시점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사건을 뒤집을 만한 반전이 일어난다. 2010년 마이클 피터슨이 재판을 받았던 바로 그 노스캐롤라이나 더럼 재판소에서 유사한 살해 혐의로 17년을 복역했던 그레그 테일러라는 남자가 재심을 거쳐 무죄 판결을 받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법정은 검찰 측에게 유리하게 증거를 조작한 혐의로 혈흔 분석관 두에인 디버가 제출한 모든 증거를 폐기한다. 마이클 피터슨 재판에서 배심원들의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혈흔 분석관 두에인 디버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2011년 드디어 마이클 피터슨의 재심이 결정되고 공정하지 못했던 수사 기록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대부분이 혈흔 분석관 두에인 디버의 공정하지 못했던 수사와 관련된 기록들이었다. 그중에는 사건 현장의 증거물 분석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실험 보고서까지 은폐하고 조작했다는 사실도 포함되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실험의 결과를 감춘 채 증거를 훼손시킨 혐의가 드러난 것이다. 게다가 당시 마이클 피터슨 재판에서 혈흔 분석관의 보고서가 배심원단의 판결을 좌우하는 결정적 증거였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여론을 다시 들끓는다. 공정한 재판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가장 공정하고 엄격해야 할 과학 실험을 악용해서 범죄의 판결을 왜곡시킨 두에인 디버는 증거 조작 혐의로 기소가 된다. 하지만 이미 8년이나 지난 사건을 뒤집을 수 있는 증거나 무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단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검찰 측 혈흔 분석관으로 활동했던 두에인 디버의 증거 조작 사실이 밝혀지면서 마이클 피터슨의 재심이 결정된다


이 사건은 결국 미국 사법제도의 허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법제도가 발달했다고 하는 미국의 법정에서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마이클 피터슨의 경우에도 이미 8년이나 복역을 했고, 한 번의 유죄 판결로 인해서 그의 명성은 산산조각이 났다. 오랜 시간 재판으로 인해 마이클 피터슨은 빚더미에 앉은 상태로 전락한다. 하지만 '자신은 아내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주장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변호인단이 다시 꾸려진다. 15년 전 진실을 찾기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들이 다시 뭉친다.


결국 2016년 노스캐롤라이나 더럼 법원은 '앨포드 플리(Alford Plea)' 방식으로 마이클 피터슨의 '계단 살인' 사건의 종식을 선언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재판에서 피고가 검찰 측의 기소 내용을 인정하는 대신 법정은 피고의 형을 감해주는 독특한 미국식 사법 제도를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15년의 지루한 재판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마이클 피터슨은 그렇게 전과자 신분으로 자유를 얻는다.



이 사건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프랑스 다큐멘터리 감독 장 자비에르가 제작한 <Staircase>라는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시간 구성 상으로 다큐멘터리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15년의 세월을 살아간다. 20대 딸들은 어느덧 30대를 훌쩍 넘긴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고, 큰 목소리로 무죄를 주장하던 마이클 피터슨 역시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변해 있다. 그 시간의 변화가 주는 울림이 있다. 그리고 시간의 변화 속에서 사건의 본질에 조금씩 접근해 들어간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 안에서 가장 나의 시선을 끌었던 인물은 담담하게 사건을 진행하던 올랜도 허드슨 판사였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미국의 사법 제도에서 판사는 판결을 내리는 위치에 있지 않다. 최종 판결은 배심원단의 몫이다. 판사는 재판이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엄정한 시각으로 검찰과 변호인단 사이에서 균형을 맞춘다. 15년 동안 재판을 지켜봤던 올랜도 판사야말로 사건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 인물일지 모른다. 하지만 역시 그도 인간이다. 엄정한 중립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도 감정이 있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지닌 하나의 인간적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 그가 내리는 사소한 결정 하나하나가 재판의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누구보다 그걸 잘 아는 사람이 올랜도 허드슨 판사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 담당했던 재판에서 몇 가지 중요한 허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명확히 판가름하기에는
분명 법과 제도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틀린 것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틀린 것을 인정한다는 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15년이 걸렸던 이 재판의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면서 끊임없이 묻고 있다. 과연 공정함이란 무엇인가? 이성적인 것이 반드시 합리적인 것인가? 그렇게 인식과 윤리의 문제를 넘나들면서 우리가 인권이라 부르는 한 인간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재차 묻고 있다. 인간은 완전할 수 있는가? 이성의 눈으로 인간이 판단한 모든 것들이 진실된 것인가? 만약 판사가 채택한 재판의 증거들이 왜곡된 것이라면 배심원들은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 그런 재판이 정의로운 재판일 수 있는 것인가.


무리한 수사를 지휘한 검찰, 과학을 악용해 증거를 조작한 무능한 조사관, 그리고 훼손된 증거들에 이르기까지 재판은 이미 처음부터 공정할 수 없는 재판이었다. 하지만 그런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다시 바로잡을 수 있는 힘도 어찌 보면 미국의 사법 제도가 갖고 있는 힘이 아닐까. 마이클 피터슨의 재심이 이뤄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 모든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8년이란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한 남자의 인생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공정하지 못한 재판으로 인해 훼손당한 한 인간의 인권은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가. 


마이클 피터슨의 재판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판결과 무관하게 증거로 채택된 동성애 경험과 관련된 증언이었다. 도대체 피의자가 동성애를 즐긴 것과 살해 동기와 어떤 연관성이 있었던 것인지, 재판이 공정하게 진행되려면 둘 사이의 의미있는 연관성을 밝혀야 했다. 검찰은 그 어떤 연관성도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배심원단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독일에서 발생한 계단 추락 사건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웃집 여성이 계단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 곧바로 '미국의 자기 집 계단에서 아내가 사망했다'의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건 인식의 영역에서 우리가 숱하게 접하는 대표적인 오류의 특성들이다. 증거를 중심으로 하는 법의 논리로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논리의 영역에서 두 개의 점을 하나로 연결하면 선이 된다. 공간을 가르는 선을 통해 두 개의 점은 하나의 선으로 변화한다. 분명한 것은 선을 그으려는 노력 없이 두 개의 점은 하나의 선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두 개의 사망 사건이 하나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분명한 연관성을 지녀야 한다. 그걸 밝혀내는 것이 과학이다. 만약 과학의 잣대가 왜곡되고 편파적이라면 두 개의 사건은 하나의 연관성을 지닐 수 없다. 그것이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법의 정의가 파괴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였는지 모르겠다. 다큐멘터리 끝부분에 등장하는 올랜도 허드슨 판사의 인터뷰에는 왠지 모르게 커다란 무게가 느껴진다. 힘이 있고 진실을 판단하기 위한 노력이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스스로 진지하게 묻고 있다.


'Staircase' 재판에서 담당 판사였던 올랜도 허드슨 판사


"마이클은 8년을 감옥에서 보냈는데 복역하지 말아야 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편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을지 몰라요. 그래서 재판을 전부 다시 할 기회가 생긴다면, 저는 분명 그 기회를 잡을 겁니다. 제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있겠죠. 사실 독일에서의 사망 사건을 언급한 일은 피고에게 매우 편파적이었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제 생각엔 동성애에 관한 모든 증거도 활용되긴 했지만, 피고에게 부당하게 편파적이었어요. 증거로 나오지 말아야 했습니다... 제가 합리적인 의심을 해야 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올랜도 판사의 인터뷰였다. 권위와 명예를 자랑하는 미국 법정의 현직 판사가 자신이 담당했던 사건이 틀릴 수도 있다는 증언이었다. 과연 이런 발언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독선을 막는다. 남을 비판하는 것보다 자신의 한계를 성찰함으로써 더욱 성숙한 존재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15년 동안 진행된 '계단 살인' 사건의 재판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재판으로 남았다. 그 과정을 보면서 이성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이클 피터슨이 아내를 살해한 범인인지, 아니면 15년이란 세월을 억울하게 살아야 했던 또 하나의 피해자인지 누구도 그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어쩌면 그건 신의 영역이 아닐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회가 조금은 더 공정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여전히 그 질문은 유효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진실인가?', '내가 틀릴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역설적이지만 그 질문에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수많은 질문들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걸 때론 합리적 의심이라 부르기도 한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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