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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Jun 28. 2018

당신의 개념을 확장시켜라!

고대 그리스의 개념들에서 배운 지혜들

"한번 무슨 단어든지 나한테 물어봐... 그게 어떤 말이든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는 걸 증명해줄 테니까..."
 영화 <나의 그리스식 웨딩> 중에서 그리스 아버지의 대사


누구나 알고 있듯이 고대 그리스는 인류가 처음으로 철학과 민주주의를 꽃피워낸 곳이다. 그런 명예와 영광에 비하면, 지금 현재의 그리스는 초라하기만 하다. 유럽의 구제금융을 두 차례나 받아가면서 간신히 경제의 명줄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인류의 지적 문화유산이 그리스에게 빚을 진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의 지적 개념들이 고대 그리스에서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패기 있게 목소리를 높이는 그리스 아버지 앞에서 뭐라 대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 중 상당수는 뿌리가 그리스다. 다만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본래의 의미가 바뀌고 퇴색된 것들이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cosmos: (현재) 우주, 질서, 조화 --- (과거) 장식하다, 치장하다
utopia: (현재) 낙원, 이상향 --- (과거) 어디에도 없다
idiot: (현재) 바보, 천치 --- (과거) 공동체를 모르고 자기 이익만 아는 남자
ethic: (현재) 윤리 --- (과거) 습관
school: (현재) 학교 --- (과거) 여유
drama: (현재) 드라마, 극 --- (과거) 행동으로 옮김
economy: (현재) 경제 --- (과거) 집의 질서
despot: (현재) 폭군 --- (과거) 한 집의 가장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고, 개념도 예외는 없다. 하지만 이 변화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흥미로운 것이 보인다. 우선 현재는 거창한 의미로 사용되는 개념들이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장식’과 ‘치장’의 의미에서, 우주와 질서, 조화로 탈바꿈한 ‘코스모스(cosmos)'는 가장 변화의 폭이 큰 단어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래도 흔적은 남아 있어서, 오늘날 화장품을 뜻하는 '코스메틱(cosmetic)'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일상의 생활을 강조하는 단어로는 '바보, 천치’를 뜻하는 'idiot'와 '윤리'를 뜻하는 ‘ethic'를 들 수 있다. 두 단어 모두 출발은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의미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윤리라는 개념('ethic')은 그리스어 ‘에토스(ethos)’ 출발하고 있다. 'ethos'는 성품이란 의미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성품이 격식이나 강압이 아니라 ‘습관’에서 출발한다고 믿었다. 윤리의 출발점을 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 속, 바로 습관으로부터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개념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개념의 순수한 본질을 왜곡시키고 현실로부터 동떨어지게 만든다.


윤리학을 거창하게 사람의 도리를 담은 학문으로 바라보는 것과 이렇듯 매일매일 벌어지는 생활의 공간 속에서 익숙해지는 습관으로 정의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어쩌면 우리 시대에 윤리가 실종되고 있는 이유가 너무 거창한 '윤리'에 대한 개념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윤리에 관한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너무 커져가면서 사람들은 아예 윤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포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우리가 개념의 출발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시작에는 인간의 생각과 삶의 원형들이 응축되어 있다.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출발할 때의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려는 노력은 결국 현재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이든, 고대 중국이든 출발점에서 개념의 영토를 확장시켜야 하는 이유다.

  

사실 정의나 자유, 도리나 덕목과 같은 윤리적 개념들을 생활 속에서 다루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바쁘고 버겁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은연중에 품은 '윤리'라는 말을 실천하기에는 그 개념이 너무 무겁고 거창하다. 윤리라는 개념이 크고 거창해질수록 바람직한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일도 버거운 일이 된다.


그래서였을까. 윤리학의 기초를 다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제목 하나가 눈길을 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담고 있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니코마코스’란 단지 그의 큰 아들 이름이었다고 한다. 윤리학의 거장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겨 놓은 책 제목이 큰 아들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해질수록, 지식과 정보는 넘쳐난다.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암기 능력으로 사람의 학습능력이나 지식을 평가하는 사람은 없다. 10여 초 정도면 세상 어느 곳, 어떤 것에 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는 스마트한 세상 속에서, 이제 많이 아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배운 것을 써먹는 방식, 즉 지식의 활용도가 관건이다.

 

자기 스스로 정보를 정리하고 체계화시켜 지식으로 발전시키는 힘, 그 배경에는 바로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정확한 '개념'을 소유한 자가 정확한 자기 논리를 구사할 줄 알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념'을 풍부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방식에 익숙한 사람만이 현대 사회가 원하는 다양한 문제 해결 능력도 갖추고 있다.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퍼즐 속에서 주어진 조건을 갖고 정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능력, 그것이 바로 오늘날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에 가깝다.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진 것이다. 모두 개념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유럽과 백인 중심주의 문명 발달사에 반기를 들고 <블랙 아테나>라는 책을 썼던 마틴 버넬은 개념에 대한 전문가들의 이해와 아마추어적인 비전문가들의 이해가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개념이나 형식에 대해서 그냥 '으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당연히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형식을 파괴하는 도전 정신은 전문가들이 아니라 아마추어들의 몫이었다. 개념의 영토를 개척하는 일에 누구나 나설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사실 아마추어에게는 예술이나 학문 자체가 목적인 반면, 전문가들에게는 수단일 뿐이다. 학문이나 예술을 가장 진지한 열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그 일 자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는 사람, 그래서 순수한 애정으로 그 일에 매진하는 사람이다. 최고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은 언제나 이런 아마추어들이었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쇼펜하우어


이들의 글이 두려움으로 주춤거리던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어쩌면 이런 것이 지식의 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달콤한 즐거움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몇 년 전 고대 그리스 유적지들만을 찾아서 배낭 하나 둘러메고 혼자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주저함을 물리치고 돌덩이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 그것은 세상은 늘 아마추어들에 의해서 새롭게 변해왔다는 믿음이었다.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순수한 사랑과 열정. 무언가 해내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을 지닌 자들이었다. 고대 트로이를 발굴해낸 위대한 고고학의 아마추어 슐리만은 자기 책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리스어를 공부하면서, 난 6주 후에는 내가 쓴 편지를 플라톤이 받아 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각오로 공부했다.”


만약 지금 당신이 가슴 뭉클한 무언가를 느꼈다면, 당신도 이들이 말하는 ‘아마추어’다. 언젠가 세상을 바꿀지도 모르는.....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김덕영 지음, 다큐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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