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파니(epiphany), 귀한 것과의 만남, 혹은 통찰과 영감
기독교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었다. 신과 인간이 하나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연결되는 신성한 순간. 바로 그 순간을 직접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동방박사들이었다. 동방박사란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하늘의 별자리나 천체 현상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운명과 미래를 점치던 점성술사들이 있었다. 그들을 가리켜 '마기(Magi)'라 불렀는데, 오늘날 마술을 뜻하는 Magic이란 단어는 여기서 나온 개념이다.
당시 동방박사들은 유대의 왕, 메시아의 탄생을 이미 예언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알지 못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막에서 헤매고 있을 때, 별 하나가 동쪽에서 빛났다. 동박박사들은 그 별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나섰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던 베들레헴의 허름한 마구간 위에서 멈췄다. 평범한 인간들로서는 가장 고귀하고 영적으로 황홀한 신성의 탄생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황금과 유향, 몰약으로 상징되는 당시로서는 가장 값비싼 예물을 바치며 그들의 여정은 끝이 난다.
영어권에서는 바로 이 순간을 '에피파니(epiphany)'라고 한다. 우연한 순간에 귀중한 것들과의 만남, 혹은 깨달음을 뜻하는 통찰이나 직관, 영감을 뜻하는 단어다.
뭐가 됐든 에피파니는 우연과 직관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에피파니'를 경험하는 순간들이 있다. 겉으로 보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과의 만남이 어느 순간엔가 운명을 바꾸는 소중한 깨달음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낯선 장소, 우연한 시간 속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에피파니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계기를 얻기도 한다. 결국 에피파니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극적인 경험이다.
물론 평범한 일상의 생활 속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때로는 신비스럽기도 하다. 직관이나 통찰, 어떤 영감의 순간들이 갖고 있는 비논리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이다. 그렇다고 비합리적인 미신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의미가 각별하다. 해석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지만,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는 몸이 아프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가 바로 에피파니가 빛을 발하기도 한다. 죽음 직전의 상황에서 얻은 깨달음이나 파산 직전에 놓였던 사업가가의 눈에는 마지막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간절한 소망이 어떤 통찰이나 영감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에피파니와 만남은 우리에게 살면서 소중한 것, 고귀한 가치들에 대해서 되돌아볼 기회를 준다. 삶의 갈피를 잡아 나가기 위해서, 때로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귀한 것들과의 만남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렇다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의 인간들이 어떻게 에피파니를 경험할 수 있을까? 내 주변 어딘가에 존재하는 귀하고 소중한 어떤 것과의 만남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남들도 다 아는 어떤 것,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통찰과 영감을 얻는 일이 분명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찍부터 포기할 필요는 없다.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선과 사고방식 하나만 바꿔도 에피파니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소중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돋보기를 어디다 비출 것인가의 문제다.
인간의 삶에는 누구나 극적인 기회가 한두 번쯤은 반드시 존재한다. 삶을 변화시키는 가치로운 순간을 발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비록 삶이 찌들고 육체는 고통 속에 잠겨 있더라고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누구나 존귀하게 대접받을 수 있는 가치가 있다.
문제는 바로 그런 가치들이 우리들의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 있다. 다만 그 존재 여부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예수의 탄생을 목격했던 동방박사들로 치자면, 이미 유대의 새로운 왕, 메시아가 세상에 탄생하리란 예언이 존재했다. 그걸 믿는 사람들에게는 메시아의 출현은 현실이었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언이란 무의미했다. 동방박사들은 그 예언을 믿고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었다.
이런 논리를 그대로 우리의 일상에 대입시킨다면, 이미 우리 안에는 귀한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내 안에 있는 귀한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귀한 눈을 가져야 한다.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다 많은 세계를 경험하고, 보다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혹은 국가든 사회든 나는 이런 '에피파니'를 찾고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결국 그들의 운명도 결정된다고 믿는다. 가치로운 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에서 영감과 통찰의 문도 열릴 수 있다. 결국 그걸 결정짓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행동이다.
내가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에피파니'와 관련된 일들은 오래전 파리의 한 중고서점에서 일어났다. ‘애비 북스’라는 이름의 중고서점을 파리에 열었던 브라이언 스펜서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는 일상에서 에피파니가 빛을 발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는 미국의 명문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 한 뒤, 남들은 하잖게 볼 수 있는 중고서점을 파리의 작은 골목길에 열였다. 잘 나가는 명문대학 졸업생이 파리에 중고서점을 오픈하겠다는 말을 하자 말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새책도 아니고 헌책을 다루는 냄새나는 중고서점을 누가 대단하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그에게는 분명한 비전이 있었다. 책의 문화가 사라지는 시대에 그에게는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일이 하나의 비전이었고 사명이었다. 벌써 몇 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파리의 중고서점 주인과의 극적인 만남도 나에게는 하나의 에피파니였다. 그 당시 나는 나를 찾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있었다. 나의 발걸음을 그 멀고 먼 파리의 이름도 낯선 거리로 인도했던 것도 하나의 에피파니의 이끌림은 아니었을까 싶다.
귀한 것들과의 만남에는 그런 신비로운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어차피 직관이란 경험의 집합이다. 어떤 분야이든 경험을 많이 한 사람에게 직관력도 높이 나타나는 이치다. 예를 들어 철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는 공장의 노동자에게는 손으로 철을 만져보는 순간 철의 물성이 느껴진다고 한다.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철을 가공해야 하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직관을 가리켜 ‘몸을 통과한 이성’이라 정의했다. 직관을 단지 미신이나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미신이란 이성의 범위 바깥에 존재하는 허구적 현상을 믿는 것인데 반해서, 직관이란 경험의 총합을 바탕으로 한 지성이다. 그것은 지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파리의 중고서점에서 스펜서 씨와 나는 캐나다산 메이플 시럽을 잔뜩 넣은 커피 한 잔을 놓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지독히도 추웠던 그해 겨울 아침,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달콤한 메이플 향기가 어우러진 커피 한 모금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날 우리 두 사람은 책과 여행을 소재로 각자의 경험을 공유했고, 세상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소중한 가치들에 관해서 의견을 교환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작별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서 문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는 나에게 여기 좀 보라며 손가락으로 현관문 하나를 가리켰다. 보여줄 게 있다는 것이었다. 흔한 보통의 나무로 만들어진 유럽 스타일의 현관문 두 짝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가 불쑥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저기 저 문이 같아 보이죠? 사실은 만들어진 시기가 다르답니다."
내 눈에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 평범한 나무 현관문 두 개였다. 색깔이나 모양새가 아무리 잘 봐도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기고 있는 나를 의식했는지 그가 말을 이어갔다.
"왼쪽에 있는 문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른쪽 것은 언제인 줄 아세요? 무려 3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신기하지 않아요? 두 개의 문짝이 280년의 차이를 갖고 있는데, 겉으로는 하나도 달라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서로 통하는 것들은 이렇게 닮아가는 것인가 봐요......."
지금도 그의 말이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누가 봐도 두 개의 문짝은 평범했고,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무려 280년이라는 긴 시간의 격차를 두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만난 것들이 서로 닮은 모습으로 변해갔다. 사물에는 물성이 있어서 같은 것은 같은 것끼리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인가.
어쩌면 소중한 것들, 아름다운 가치들과의 만남이란 조화와 균형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같은 하나의 일체감을 찾아가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와 작별을 하고 번잡한 파리의 도심 속을 걸으면서도 나는 책들로 가득했던 그 허름한 중고책방과 스펜서 씨의 모습을 지울 수 없었다.
'콜럼비아 대학을 나와서 냄새나는 중고책방을 열다니!' 남들은 아마 다들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놓고 겨우 중고서점 주인을 할까, 그동안 바친 돈이 아깝지 않나!'
하지만 결국 그는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난 예언처럼 그는 자신이 뭔가 세상에서 가치로운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겼다. 짐을 싸서 파리의 허름한 거리에 가게 하나를 얻었다. 처음엔 인적도 드문 곳이라서 장사가 잘 되기나 할까 약간 걱정도 들었다. 그래도 책 더미 속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게 행복했다.
낯선 이방인들이 찾아와 자신의 소중한 책이라며 건넬 때는 마치 세상을 여행하는 느낌도 들었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스페인 작가의 책을 찾아달라고 손님이 말을 할 때는 난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책은 늘어났고 그 책들이 갖고 있는 사연도 하나하나 간직했다. 그렇게 3만여 권의 책이 모였다. 그 공간에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그에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소중한 것은 미리 운명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바로 그 운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그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까지 길을 찾아왔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별 하나에 의지해서 어두운 밤길을 떠나 왔듯이.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장 행복한 장소를 발견했다. 동방박사들이 신성한 에피파니를 경험했듯이 파리의 뒷골목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찾았다.
귀중한 것은 결국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이 분명하다. 다만 그걸 모르고 살거나, 혹은 애써 일부러 부정하고 있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내가 파리에 작은 중고서점을 열었던 거리가 '양피지의 거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우연히 자료를 찾다가 중세 시대 지금 이 거리의 이름이 '필경사들의 거리'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있는 이곳이 이미 오래전부터 책을 만들었던 유서 깊은 장소였던 것이죠. 책을 통해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찾았던 나에게는 아주 귀중한 것들과의 우연한 만남이었습니다.”
소중한 것들과의 우연한 만남, 에피파니는 그렇게 험한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으려는 사람들에게 등불이 된다. 나그네처럼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도, 사막을 혼자서 묵묵히 걸어가려는 고행의 길에도 에피파니는 나타날 수 있다. 갈증과 허기에 지친 우리의 목마른 영혼을 적셔줄 그런 에피파니는 의외로 우리 주변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다. 그건 아마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 현재 신간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 2> 집필과 <한국전쟁, 동유럽으로 보내진 북한 전쟁고아들>에 관한 논픽션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글이 마음에 드신 분들은 프로젝트 펀딩에 힘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에게는 저자 사인이 담긴 신간을 배송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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