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며...'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누구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적어도 이 말을 믿는 사람에게는 꿈꾸는 모든 것들이 현실로 나타난다. 그걸 믿기에 나는 낙관주의자다. 게다가 마음먹기에 따라 누구든 자신 앞에 펼쳐질 멋진 인생이 펼쳐진다는 지극히 '유심론(唯心論)'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인간이 입을 통해 세상에 내뱉는 모든 말들에는 고유한 '지향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기도 하다.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나쁜 말보다는 좋은 말을 하려고 노력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생각, 나의 언어가 현실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출발점은 인생을 도전적으로 살아보겠다는 각오였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하지만 떠났다 돌아오는 여행에는 충족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낯선 나라에 이민을 가는 것도 현실적인 대안은 아니었다. 그래서 떠났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여행과 완전히 다른 나라에 자리를 잡고 살아야 되는 이민의 딱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낯선 장소에서의 생활을 동경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 기후, 사람들, 낯선 언어와 문화가 주는 자극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자극적이다. 그것이 글을 쓰고 다큐멘터리 작품을 제작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한 나에게 여행과 이민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노마딕(normadic)한 생활을 꿈꾸게 된 이유였다.
그러다 아주 우연히 나는 아이슬란드에 1,2년 정도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구체적인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유목적인 노마딕한 생활을 꿈꾸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실제로 현실로 일어났다. 낯선 환경, 도전적인 과제들로 가득한 삶이겠지만, 그런 삶을 단 한순간이라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켰다. 결국 나는 아이슬란드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도전적인 삶을 위해 나는 낯선 곳에서 살아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의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2013년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를 쓰고 나서 나 역시 커다란 인생의 변화를 경험했다. 경복궁 근처에 나만의 작업실을 열었고, 그곳에서 낮에는 커피를 팔고 저녁때는 와인을 즐기려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큐멘터리 제작과 글쓰기라는 두 가지 창작의 길을 인생의 테마로 정하면서 나에게는 ‘책과 여행’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두 가지 모두 낯선 곳, 낯선 것에 대한 색다른 문화를 체험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낯선 것에 대한 동경은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낳는다. 거부감과 호기심이라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편한 것, 익숙한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존재들이다.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것이 지루한 일상일 수 있지만 덕분에 우리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한다. 거부감은 이런 안정적인 공간에서 벗어나는 순간 느끼는 일종의 두려운 감정과 관련이 있다.
반면 호기심은 낯선 공간에 대한 동경과 자극이다. 호기심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본능이다. 그것은 우리를 여행으로 이끌고, 색다른 문화를 체험하게 한다. 호기심의 자극을 통해 우리 몸 안에 신비로운 에너지가 솟구친다. 그것이 우리가 모험과 도전의 세계로 이끄는 원동력이다.
개인적으로 한 번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낯선 외국 땅에 정착해서 생활해보는 일이었다. 이건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일과는 다른 차원의 경험이다. 여행과 이주가 반반씩 섞여 있는 것이라고 할까. 한 두어 달 정도 외국에 여행을 가서 살 집도 구하고 현지민과도 어울리는 생활을 의미한다. 일단 국적을 바꾸고 삶의 터전을 모두 이전하는 이민과 낯선 곳에 정착하는 일은 비용 면에 리스크가 적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민처럼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정신적인 부담과 스트레스도 크지 않다.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한 반년 정도의 '임시적인 이주’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에도 그가 글을 쓸 때는 외국에 나가 있던 경우가 많았다. 미국은 물론이고 이탈리아나 그리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수개월 동안 장기 체류를 했다. 그의 글에서 풍겨 나오는 이국적인 정서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생활공간에 대한 묘사는 그의 임시적인 이주 덕분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이런 낯선 곳에서의 정착은 인생의 활력소가 되기에 충분하다. 무료하고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서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신선한 삶의 자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과 유럽에서도 장기 체류 형식의 외국 생활 거주가 주목받고 있다. 어느 외신이 소개한 미국인 마틴 부부의 사례는 성공적이고 자유로운 배가본드(방랑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여행작가 린 마틴은 70세가 되자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집을 팔고 남편과 자신에게 필요한 짐만 여행가방에 넣고 여행을 떠났다. 그 후 두세 달 정도의 간격으로 멕시코, 아르헨티나, 터키,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영국을 여행했다. 그들이 이렇게 국제적인 방랑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1,2주의 짧은 여행만으로는 여행의 참다운 재미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었고 그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행복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행객이 아니라 그 나라 현지인처럼 살아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집이 없는 방랑자가 됐다. 여행의 경비는 캘리포니아의 집을 팔아서 마련했다. 돌아올 집이 사라진다는 부담감이 컸지만, 오히려 그것이 새로운 생활에 대한 자극이 되었다. 현지 생활에 몰두하고 적응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위험 부담과 걱정도 많았지만, 그들이 얻은 삶의 보람과 비교하면 그 모든 희생은 충분한 보상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삶이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찼다는 점이다. 그것이 ‘임시적인 거주’의 매력이었다.
도대체 그들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낯설고 도전적인 인생을 시작한 그들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도대체 이런 여행을 왜 하는가?’라고. 그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우아한 캘리포니아 저택을 포기하고 파리나 이스탄불에 있는 작은 아파트 하나를 빌려서 사는 인생은 후회 없는 선택이다. 고급 자동차, 푹신한 소파, 호화로운 주방 대신,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흠집난 조리도구와 달랑 하나뿐인 세면대. 하지만 천국의 맛이라 할 만한 요리를 거의 매일 즐기고, 암소조차 아름답게 보이는 감미로운 프랑스 전원 마을을 드라이브하고, 저녁 운동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이탈리아 피렌체의 아르노강을 산책하는 기분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인생의 즐거움이다.”
그들은 낯선 곳에 정착하기 위해서 우선 집을 판 돈을 믿을 만한 자산관리사에게 맡겼다. 전문적인 투자자들로 구성된 그들은 원금을 투자해서 얻은 수익을 매달 5,6백 만원씩 송금해준다. 이 정도 비용이면 두 부부가 한 달 정도를 살기에 풍족한 비용이다. 게다가 집세와 생활비는 물가가 저렴한 국가일수록 줄어든다. 무엇보다 그들은 집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재산세를 낼 필요가 없다.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각종 공과금과 잡다한 생활비용 등도 줄일 수 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된 시대에서는 어딜 가도 마치 내 집처럼 세상과 연결할 수 있다. 글을 쓰고 송고를 하거나 인터넷으로 주식 관리를 하는 사람들은 전혀 불편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생활의 조건들이다. 마틴 부부 역시 처음부터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낯선 곳에 정착하기는 그들에게 대단히 큰 만족감을 선사하고 있다. 삶이 즐겁고 재밌다는 것이다. 노년의 무료한 삶과 비교할 때, 이것보다 더 매력적인 말이 또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런 삶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대부분 나이가 들수록 삶에 대한 불안감도 늘어난다. 은퇴를 하거나 사업을 정리한 경우, 연금과 저축만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들을 압박한다.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으니 당연히 매사에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을 더욱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다. 조금은 무모해 보이긴 하지만 마틴 부부의 삶처럼 도전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한 번쯤 주목해 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낯선 곳에서의 체류는 정신적인 만족감과 이국적인 체험 등을 주면서 새로운 사업의 아이디어를 얻을 기회를 준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인생의 노년기를 불태울 멋진 일들을 도모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 그리고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자동차, 가구, 골동품, 이런 것들보다 더 소중한 것이 우리 인생에 있을 수 있다는 걸 믿는다면, 낯선 곳에 정착할 준비를 시작해보자.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오래된 물건과의 작별도 한 번 시도해볼 만한 일이다. 살면서 집안 구석구석에 쌓여 있는 낡고 쓰지 않는 수많은 물건들이 있다. 언젠가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버리지 못하고 미련만 늘고 있다면, 과감하게 창고부터 정리하는 것은 어떨까. 작은 시작 하나가 새로운 시작, 새로운 삶으로 당신을 이끌 것이다.
어쩌면 당신 앞에도 흥미진진한 인생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기 자신과 진정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얻고자 한다면 언젠가는 한 번쯤 꼭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꿈을 꾸는 한 우리는 영원히 젊은이다. 물론 나도 그런 여행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오늘은 낯선 곳에서 정착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 내 인생을 위해서 큰 소리로 건배를 외치고 싶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 필자는 올해 아이슬란드 대학교에 연구 교수로 초청을 받고 현재 출국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처럼 말이 씨가 된 것이다. 건강한 꿈을 키웠던 생각들이 실제로 현실이 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생각과 언어에는 지향성이 있다는 그의 믿음은 신념이 되고 있다. 얼음과 불의 땅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아이슬란드, 북유럽의 신화와 전설이 가득한 곳에서 그가 어떤 삶을 펼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필자의 아이슬란드 도전기는 앞으로도 계속 연재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