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의 나를 위해 쓴 책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나는 오랜 꿈이 하나 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탄생한 역사의 현장들을 두 발로 걸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행히 운좋게도 2012년 간절한 희망은 한 권에 책으로 승화되었다. <그리스의 시간을 걷다>(책세상)라는 책이 바로 그것이었다. 실제로 그 책을 쓰기 위해서 나는 터키의 옛 서부 해안 도시들과 지중해 위에 흩어져 있는 섬들을 돌아 아테네, 미케네 등의 고대 그리스 본토까지 한 달 동안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출간 직후 새로 나온 책도 볼 겸해서 출판사로 향했다. 지금은 자리를 옮겼지만 그때만 해도 책세상 출판사는 옛날 신촌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다. 신촌을 지날 때면 대학 시절의 추억들이 자연스럽게 스쳐지나간다. 아프기도 했고 즐겁기도 했던 시절들, 좌충우돌하던 20대의 나를 다시 만나는 기분도 든다.
그날은 그런 기분으로 편집장과 녹차 한 잔 앞에 놓고 옛날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그런데 다음 작품은 어떤 걸 고민하고 계세요?", 편집장이 무심코 던진 질문은 사실 고대 그리스의 돌덩이들을 탐험할 때 혼자서 매일같이 하던 생각하던 고민거리들 중 하나였다.
축구 경기로 치면 인생의 전반전 정도는 끝낸 시점이었다. 10분 정도의 휴식을 마치고 이제 막 후반전을 시작하기 직전 대기실에 앉아 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랬다. 사실 그리스 돌무더기로 배낭 하나 훌쩍 둘러메고 여행을 떠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내 인생의 후반전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질문들은 자연스럽게 계속 이어졌다.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까?', '무엇을 하며 남은 인생을 재밌고 보람 있게 살아갈까?' 터키에서 그리스까지, 심지어 포카리 스웨트 선전에 나오는 그 아름다운 지중해 산토리니 섬을 여행하면서도 나는 흔한 관광지들은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때 나의 시선은 오직 하나, 고대 그리스 돌무더기들로 가 있었다. 3천 년도 넘은 어느 시간 속,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을 고민했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 여행은 오로지 그리고 온전히 나 자신하고만 나눌 수 있는 속 깊은 대화의 시간이기도 했다.
고민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인생을 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어느 정도 고민을 숙성시키는 과정은 필요한 것 같다. 나의 경우에 여행을 마치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래, 뭘 하든 가치로운 일에 한번 모든 것을 걸어보자!'라며 두 주먹 불끈 쥘 수 있었던 힘도 결국은 외롭고 힘겨운 30일 동안의 그리스 여행에서 상당 부분 에너지를 얻지 않았나 싶다. 다시 편집장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포기하기보다는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 시대의 화두는 4,50대 '조기 퇴직'과 '고령화'였다. 인간의 육체적 생명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막상 직장에서는 점점 조기 퇴직자들이 늘어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한창 일하던 친구들이 40대 후반의 나이에 직장을 나와서 치킨집을 차리고 편의점 주인이 된다는 소리를 듣고 있던 때였다.
"좋아. 나를 비롯해서 친구들에게 뭔가 용기를 줄 수 있는 책을 써보자! 나이가 들어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 결코 스스로 포기 하지 않고 자신의 노년을 새롭게 써내려간 그런 멋진 인생들에 관한 책을 한번 만들어 보자!"
그것이 2013년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라는 책을 쓰게 된 계기였다. 마침 편집장으로부터 좋은 정보도 하나 얻어냈다.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한 학력, 가난한 인쇄공 신분에서 시작해서 마침내 일본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의 반열에 올랐던 마쓰모토 세이초에 관한 이야기는 출발점에 선 나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평생 7,500권의 책을 쓴 괴물 작가와의 만남. 인생 전반부는 초라했지만, 40대부터 시작했던 글쓰기 삶을 통해 말 그대로 뒤늦게 인생의 갈피를 잡고 성공한 인물이었다.
비록 그는 세상에 없지만 그가 살았던 기타큐슈의 고쿠라라는 작은 도시로 찾아가 그의 행적을 추적하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던 <점과선>의 배경이 되었던 가시이 해변가를 거닐기도 했고, 그가 자주 탔다고 하는 후쿠오카와 모지를 왕복하던 기차 안에 올라 온전히 그가 되어 보는 상상도 했다. 어떻게 한 인간이 7,500권의 책을 써내려가기 위해 처절하게 자신과 투쟁해 나갔는지, 나는 그게 정말 궁금했다.
하나하나 사례들을 수집하고 취재를 이어갔다. 결국 그해 가을이 되자 30여 명의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리스트가 완성되었다. 원고를 쓰는 작업은 너무나 행복했다. 그건 서른 가지의 위대한 인생들과 만나 상상 속으로라도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그 책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책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그 책을 편집하기 위해서 인디자인 같은 편집 전용프로그램이 아니라 아래아 한글로 마무리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정리해보겠다. 혼자서 원고는 물론이고, 본문 디자인과 책 표지까지 모든 작업을 마쳤다. 사비를 털어서 인쇄와 제본을 마치고 2013년 드디어 한 권의 책이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며칠 후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어떤 경로로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뒤늦게...>는 그해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추천하는 우수 교양도서로 선정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네이버가 콘텐츠 협약을 맺은 덕분에 책에 관한 정보는 포털 메인까지 공개되었다. 그리고 몇몇 일간지들이 보도가 이어졌다. 그해 겨울쯤에는 교보문고 시니어 부문 베스트 셀러로 등극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참 드라마처럼 극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 책은 나의 삶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내 인생 자체가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처럼 변화하기 시작한 셈이다. 변화는 숨가쁘게 이어졌고 결국 이듬해에는 광화문 영추문이 보이는 서촌의 골목길 안쪽에 '통의동 스토리'라는 작은 까페 하나를 열었다. 가게 곳곳에 책들을 비치해 둔 건 당연한 일. 내심 책 홍보도 하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판매도 할 생각이었다.
영업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은 주말 오후. 때였던 것 같다. 한 중년 남자가 스무살 정도 되어 보이는 딸과 함께 가게 안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가게 한 구석에 전시해놓고 있던 바로 그 책으로 다가갔다. 한동안 물끄러미 책을 보던 남자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갑까지 꺼냈다. '얼마인가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날 남자는 정년퇴임을 하고 처음 맞이하는 주말이었다고 한다. 평생을 한 직장에서 살아왔던 남자, 그에게 이제 분주한 아침 출근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주 월요일 아침이 돌아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조금은 낯설고 두렵기까지 하다며 말을 건넸다.
남자는 허전한 마음을 잊기 위해서 딸과 함께 서촌으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그러다 우연히 가게 앞에 전시되어 있던 책 제목 하나에 눈이 갔다고 했다.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허전하기만 했던 그의 마음 한구석을 채워주었다. 허전할 것 같은 월요일 아침의 공허함을 조금은 메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그가 책을 샀던 이유였다.
"사실은 책을 살까 말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표지를 넘겨서 한 장 한 장 보고 있는데 헌사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 한 마디에 그냥 말로 다 할 수 없는 뭔가가 느껴졌던 것 같아요."
책 값을 내고 돌아가는 그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나 역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고대 그리스의 돌덩이들 사이를 혼자서 여행하면서 다짐했던 바로 그것, '그래. 가치로운 일을 위해 모든 것들을 걸어보자'. 유명한 작가도 아니고, 솔직히 대단한 책도 아니지만, 어두컴컴한 지하실 바닥 밑까지 떨어질 것 같았던 마음을 다시 잡아주었던 한 권의 책이었다. 그렇게 누군가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건 나에게도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그런데 그의 눈에 들어왔다는 헌사는 무엇이었을까?'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책을 쓰기 위해 도움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작은 감사의 표시라도 남기는 것은 작가의 도리다. 물론 그런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작가들도 있다. 하지만 워낙 고민을 많이 했던 책이다 보니 헌사 하나라도 허투루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헌사 한 문장 쓰기 위해서 며칠을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써보면서 썼던 글을 지우고 다시 쓰길 몇 번째, 그러다 문득 인생의 전반전을 마치고 막 벤치로 돌아와 쉬고 있을 내 나이 또래의 누군가가 떠올랐다. 잠시 뒤면 다시 후반전 경기가 시작될 그들의 인생을 위해서 함께 살아왔던 과거만큼이나 또 그렇게 열정적으로 인생의 후반전을 맞이해보자는 뜻을 담았다.
‘제2의 인생을 꿈꾸는 모든이들에게 축복을
특히 1965년, 그 해에 세상에 태어난 이들에겐 좀 더...!’
며칠 후 월요일 아침 출근할 곳이 사라진 그 중년의 남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실 나도 1965년 생이었습니다. 책 속에 써 있던 그 한 마디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힘겨운 인생을 산다. 월요일 출근할 곳이 사라진 그 중년 남자도 그렇고,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1965년 생들도 그렇고, 그리스 돌무더기들을 한 달 동안 혼자서 방황했던 나 자신도 그렇고...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간이 뭐가 됐든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서 미래를 향해 다시 뚜벅뚜벅 걸어가 보는 것,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어게인!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희망과 좌절 사이에서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우리에게 늦었다는 순간은 없다. 그순간이 언제이든 포기하지 않는 자에겐 경기는 계속될 것이다. 심지어 전반전도 채 끝나지 않은 사람들이야 말해서 무엇할까.
10년 전 나를 위해 쓴 책, 어쩌면 이 책에 관한 이야기가 누군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인생의 전반전도 채 끝나지 않은 20대들에게도 어쩌면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색바랜 책장을 다시 넘기는 이유였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멋진 후반전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직 전반전도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1965년 태어난 우리들은 두 손에 움켜쥔 것들을 이제 손에서 놓을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