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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Aug 22. 2019

자유와 규율

100년 전 일본인이 바라 본 영국의 교육 현장 탐방기

'도전적인 삶을 위해 낯선 곳에 정착하자' (11)


몇 년 전 아주 우연한 기회에 서점에서 '자유와 규율'이라는 제목의 책을 한 권 샀다. 문고판 크기의 작고 페이지도 얼마 되지 않는 작은 책이었다. 사실 좀 구태의연한 책 제목이었지만 그걸 사서 읽기 시작한 이유는 '영국 사립학교 생활'이라고 붙어 있던 부제 때문이었다. 가끔은 이렇게 부제가 제목을 압도할 때가 있다.


이 책을 오늘 아침 글쓰기의 주제로 선정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 책은 놀랍게도 1920,30년대 영국의 교육 제도를 바라보고 있다. 100년 전 영국의 학교를 학교 안에서 바라본 책이다. 그것도 일본인의 시각이다. 세계의 강대국 영국의 교육 현장을, 세계 최고가 되고 싶었던 일본이 현장에서 꼼꼼하게 지켜본 기록물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그들은 세계 최고의 시민은 결국 교육 현장에서부터 키워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일본의 허물이라면, 일본이 세계 최고가 되려고 열망을 품고 세상을 바라봤던 100년 전의 시선은 일본이 남긴 미덕이었다.


한일 무역 '전쟁'이라는 섬뜩한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오늘의 시점 속에서 과연 일본에 대해 어떤 스탠스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가를 놓고 고민하던 차에 문득 떠올랐던 주제였다. 하지만 광풍처럼 사회 곳곳에 불어오는 반일 감정을 거스르면서까지 굳이 일본인이 100년 전에 바라본 영국의 교육 제도에 관해서 글을 쓸 용기는 나지 않았다. 참고로 이 책은 이와나미 신서 시리즈로 1949년도에 발간되었다. 패전 이후 혼란에 빠진 일본인들에게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 시스템을 현장감 있게 보여줌으로써 건강한 시민의식,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일본에 소개한 책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을 실제로 이렇게 글을 쓰게 만든 것은 며칠 동안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조국 교수'에 관한 여러 가지 의혹과 논쟁이었다. 정의를 외쳤던 한 인간에서 어떻게 그렇게 불합리하고 공정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는지 저널리스트적인 호기심이 생겼다. 나에게 이 문제는 어떻게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와 책임을 올바르게 행사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지극히 철학적인 이슈였다. 결국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라는 오래된 철학적 고민거리였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이 책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자유를 방종에서 벗어나 자율로 이끌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이 바로 제목이 암시하듯이 '규율'이었다.


규칙이라는 단어가 여러 사람이 함께 지키기로 약속한 법칙을 가리킨다면, 규율은 그보다는 훨씬 개인적인 영역에 해당된다. 규칙이 Rule이나 Regulation처럼 인간을 통제하는 외부적인 요소라면, 규율은 질서와 법칙을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의 본보기들을 가리킨다.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고 이기심을 단련시키는 내면적 활동, 즉 Discipline, 엄격한 자기 훈련이다. 그래서 규율은 자율과 만나서 보다 완전한 개념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개별적인 인간의 삶 내면에 간직되어 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의 근거들이기도 하다. 스스로 지켜야 하는 마음의 약속과 밀접히 연관된 단어들이다. 그런 자율과 규율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데 아무리 규칙을 강조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00년 전 일본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영국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영역에서 자율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데 있었다. 무제한적인 자유가 아니라, 자유를 스스로 책임지고 행사할 수 있는 자율을 키운 데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유와 자율은 '규율' 속에서 단련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유와 규율'이라 제목을 정한 이유였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의 자유롭고 한없이 풍요로운 생활에 비해 퍼블릭 스쿨의 그것은 극히 제한된, 물질적으로 잔인한 생활이다... 좋은 철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한 번쯤은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될 뜨거운 용광로이며 이 고난을 버텨내지 못하는 존재는 그 앞에 기다리고 있을 더더욱 가혹한 인생의 시련을 견뎌낼 사람으로 도저히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려치고 또 내려치고 다시금 내려치는 것이야말로 퍼블릭 스쿨 교육의 본질이며 이것이 생애 전체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측면에서 그러한 시기에 있는 청소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영국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자유와 규율', 이케다 기요시


어찌 보면 좀 교과서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자유와 책임의 문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삶의 방식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책에는 그걸 이루기 위해서 말 그대로 단단한 강철을 단련시키기 위해 영국인들이 스스로를 단련시켜왔던 노력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나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몇 년이 지났어도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은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영국에서 규율은 스포츠 경기를 통해서 더욱 빛을 발한다. 스스로의 자율적인 영역을 단련시키기에 스포츠만큼 좋은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인과 개인, 집단이 만나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기 단련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것이 영국인들이 스포츠를 교육의 수단으로 정의한 이유였다.


아무리 드라마틱한 반전과 재미가 있는 스포츠라도 그 경기의 규칙을 지키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승부가 날 수 없다. 패배한 자가 흔쾌히 패배를 인정하는 순간 역시 경기의 규칙이 제대로 지켜졌을 때이다. 승자의 영광이 규칙 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저자가 마지막 내용을 스포츠로 장식한 것은 그런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자율과 책임, 규율이라는 단어들을 생생한 스포츠의 현장을 통해서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위함이었다. 정의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내면의 조건들을 구체적으로 일본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스포츠 경기 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영국인들이 열광하는 크리켓 경기장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야구의 모태가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영국인의 콧대 높은 자존심을 보여주는 스포츠 크리켓, 영국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을 지키라는 뜻에서 경기장에서는 세 개의 막대기가 있다. 얼핏 보면 야구처럼 공격수가 방망이를 들고 수비수인 투수가 던지는 공을 치는 경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경기의 기원은 그 세 개의 섬을 무너뜨리고 지키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했다.


야구와 달리 크리켓은 점수가 기록되는 방식도 다양하다. 홈런처럼 장외까지 타자가 친 공이 날아가는 것이 가장 높은 점수인 6점을 얻는다. 수비수가 공을 잡지 못하고 펜스 너머까지 공이 날아갈 경우에는 4점이다. 타자와 주자가 번갈아 가면서 베이스를 왕복하면 1점을 얻는다. 그래서 크리켓 경기에는 200점 이상까지 점수가 나면서 승부가 결정되는 일도 있다.


영국의 크리켓 경기가 마무리되는 전국 대회에서 한 유명한 크리켓 선수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계속해서 기존의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으로 승리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 경기는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수십 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크리켓 점수 기록이 깨질 것이라고 다들 낙관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크리켓 경기는 야구처럼 주자들이 베이스를 돌아서 홈까지 돌아오지 않아도 점수가 날 수 있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제일 못 쳐도 1점 정도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경기가 크리켓이다. 그날 그 위대한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선수 본인은 물론 상대팀도 모두 긴장했다.


경기는 관중의 기대와 예상대로 흘러갔다. 드디어 타석에 위대한 기록을 눈앞에 둔 선수가 들어섰다. 관중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이제 그동안 철옹성처럼 깨지지 않고 있던 영국 크리켓 역사에서 새로운 역사가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타석에 그가 오르자 상대편 수비수들이 일제히 경기장 밖으로 벗어났다. 위대한 대기록을 마음껏 기록하라는 같은 선수로서의 응원이었다. 어찌 보면 영원히 남을 패배의 기록에 자신들이 남고 싶지 않다는 저항의 몸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경기장에 남은 것은 투수와 위대한 대기록을 앞에 두고 있는 타자 둘 뿐이었다. 투수는 세상에서 그보다 더 우아하다 말할 수 없는 동작으로 타자를 위해 공을 던졌다. 그런데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타자가 공을 치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것이다. 사람들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뒤로 물러섰지?'.


그 뒤에 찾아온 두 번째 공격에서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계속됐다. 투수는 앞에서 그랬듯이 우아한 동작으로 가볍게 타자를 향해 공을 던졌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타자는 공을 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왔다. 경기장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됐다. 과연 영국 크리켓 역사에 영원히 기록에 남을 위대한 순간은 찾아올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말 것인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공 하나에 모아졌다.


드디어 마지막 공이 투수의 손을 손을 떠났다. 그리고 경기장에서 타자의 방망이 소리를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관중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타자는 공을 휘두르지 않고 경기장을 떠났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거저 먹으라고까지 해서 만들어준 평생의 위대한 기록을 앞에 놓고 왜 그는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일까? 한동안 사람들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에는 멍청하게 위대한 대기록 달성에 실패한 선수를 위로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렸다. 그 순간이었다. 슈트를 차려입은 한 나이 든 노신사 한 명이 그 멍청한 타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그를 와락 껴안으며 외쳤다.


"영국에 이런 바보 같은 녀석들이 계속 존재하는 한 영국은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노신사 외침을 수없이 상상했다. 그가 외친 한마디에 전율했다. 지금도 그렇고 아마 어쩌면 앞으로도 그 감동과 전율은 계속될 것이다.


나에게는 그 노신사가 말했던 '바보 같은 녀석'이 영국의 규율이었다. 영국의 규율이 그런 '바보 같은 녀석'들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스스로 정해놓은 규칙, 그걸 지키기 위한 내면의 투쟁. 그 멍청한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해서 대기록 달성의 명예와 그로부터 얻어질 수많은 혜택과 이익을 생각하지 않았리가 없다. 아마 마지막 타석에 서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것들이 스쳐갔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인 욕망이 있다. 그걸 추구한다고 누구 하나 뭐라 그럴 사람도 없다.


하지만 경기는 규칙이 있어야 하며, 위대한 기록의 달성에는 강철을 내리치는 고단함이 뒤따라야 하는 것임을 그는 스스로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멍청한 바보가 됐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그가 뿌린 땀과 눈물은 씨앗이 되어 수천, 수만의 영국인들에게 진정한 명예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의 위대함을 배우고자 노력했던 일본은 말 그대로 작은 섬나라에서 아시아의 강자가 됐다.


그 멍청한 바보 같은 크리켓 선수의 모습과 그를 와락 껴안아 주었던 백발의 노신사, 그리고 이들을 지켜 보며 세상을 배워나갔던 어느 일본인 학자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침이다.


* 2년 전에 읽은 책이라서 마지막 크리켓 경기 장면은 책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비록 기억은 틀릴 수 있겠지만, 그때 책장을 덮으며 받은 벅찼던 감정은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영화 'Two Homes'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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