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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Nov 22. 2019

마쓰모토 세이초 자서전 '반생의 기록'

나는 아직도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2011년 고대 그리스의 돌덩이를 탐험하고 돌아와 한 권의 책을 썼다. 그 책은 그 이듬해 <그리스의 시간을 걷다>(책세상 출판사)라는 조금은 낭만적인 제목으로 출간이 되었다.


책을 내고 인사라도 할 겸해서 출판사를 찾았다. 편집장과 커피 한 잔을 놓고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현장감 있는 내용이라서 여행을 하면서 고대 그리스 신화와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다면서 편집장이 먼저 감사 치례로 인사를 건넸다. 몇 마디 덕담이 오고 가다가 불쑥 '다음 책은 혹시 계획하신 것이 있나요?'라고 질문을 던졌다.


사실 이미 그리스 여행을 하기 전부터 나에겐 한 가지 꼭 쓰고 싶었던 책이 있었다. 그 책은 나이가 들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향해 돌진했던 사람들에 관한 책을 써보는 것이었다.


그날 편집장에게 아무런 사심 없이 내 생각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만 해도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상태라고나 할까.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편집장이 얼마 전 출판사 사람들과 모임을 하다가 우연히 특이한 인생을 산 작가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면서 소개를 해줬다. 그 작가는 평생 750권의 책을 썼다고 전해지는 괴물 같은 필력의 소유자였다. 에세이와 논픽션을 합하면 무려 1천 편이 넘는 숫자다. 게다가 학력이라야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 작가로 등단하기 전에는 인쇄공으로 일을 했다는 기이한 인물이었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단 두 마디 말을 듣고 곧바로 그가 생전에 살았다는 기타규슈 고쿠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샀다. 어쩌면 그건 우연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운명 같은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작정 본능에 이끌려 찾아갔던 그 작가의 이름은 '마쓰모토 세이초', 일본에서는 추리소설 작가로 유명한 작가이자 수백 권의 책을 저술한 '괴물' 작가로 불려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글쓰기 인생은 너무도 파란만장했고 거침없는 세상에 대한 맞짱 뜨기와도 같았다. 거들먹거리던 문단의 권위주의와도 한 판 승부를 벌인 승부사 기질도 있었다. 고쿠라 일대를 취재하면서 195,60년 대 마쓰모토 세이초의 행적을 찾는 작업은 세상을 정말 열심히 살다 간 한 존경할 만한 인물과의 조우였다.


나는 귀국 직후 그에 관한 글을 썼고, 그로부터 받은 영감 덕분에 출판사 편집장과 나눴던 작은 아이디어를 한 권의 책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 책은 후에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다큐스토리)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고, 나의 대표작이 되었다.

마쓰모토 세이초와의 만남은 그랬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이미 세상에 없지만 그 시간으로부터 그의 책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가 썼던 많은 책들이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나왔다. 덕분에 많은 팬들도 생겨났다.


귀국을 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번역작가 한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신간을 하나 번역했는데 나에게 보내주고 싶다는 메시지였다. 알고 보니 <마쓰모토 세이초 자서전>을 출간한 것이었다. 세이초가 선택한 원래 제목은 <반생의 기록>이었는데, 한국어 번역본에는 <아직 늦지 않았다>라는 다소 뜬금없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왜 <반생의 기록>이 <아직 늦지 않았다>라는 제목으로 바뀌었을까?'


마쓰모토 세이초의 글, 그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좋아했고, 그래서 그에 관한 책까지 썼던 나에게는 호기심부터 생겨났다. 사실 2012년 일본에 출장을 가서 맨 처음 산 책이 바로 그의 자서전 <반생의 기록> (번역. 김경남)이었다. 어찌 보면 일본어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내가 그의 자서전을 구하러 후쿠오카의 동네 서점들을 누비고 다녔다는 것만 봐도 당시 나에게 세이초의 영향은 적지 않았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세이초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1950년대 생활했던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서점에서조차 <반생의 기록>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간다 거리에 있는 중고서점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그의 자서전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금도 서점 한가운데 서서 마치 무슨 보물이라도 손에 쥔 듯이 기뻐하던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돌고 돌아 나는 드디어 얼마 전 그 번역작가로부터 세이초의 자서전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세이초가 그의 손으로 쓴 그 자신의 인생 기록이다. 그것도 절반밖에 존재하지 않는 '반생의 기록'이었다. 책장을 펼치며 가슴이 뛰었다.


그 책을 손에 쥐고 곧바로 페이지를 넘겨가며 책을 읽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글쎄... 맛있는 음식을 맨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손에 집는 내 개인적인 천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세이초의 자서전만큼은 좀 특별한 순간에 읽고 싶었다는 게 보다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외롭고, 지치고, 그래서 한 치 앞이 어두울 때, 그래서 내가 꿈꾸는 이 길이 정말 맞는 길일까, 하고 속으로 수없이 고민하는 사람들끼리는 통할 수 있는 그 뭔가 간절한 순간에. 나는 그의 책을 읽기로 했다.


방금 전 그의 자서전 맨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역시 대단한 사람이야', 하고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7년이나 지났지만 한 권의 책을 사이에 두고 그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먼저 그 외로운 길을 걸어갔던 인생 선배라도 되는 듯이 툭툭 먼지를 털며 일어나라 말을 건네고 있었다.


왜 반생의 기록이라 이름 붙였을까? 그건 그가 일본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로 명성을 날리기 직전까지 그의 인생 절반이 정말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가난한 인쇄공으로 살다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것도 마흔이 넘긴 나이였다. 배운 것 하나 제대로 없었고, 6명이나 되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빗자루 장사까지 해야 했던 넉넉하지 않은 삶이었다.


그의 자서전 곳곳에는 먹고살기 위해 그가 얼마나 몸부림쳤는지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책읽기를 좋아했고 가난했지만 낯선 곳에 가서 세상 구경 하기를 좋아했다. 여행을 위해서, 그리고 또한 생계를 위해서 집을 나설 때면 언제나 빗자루와 주먹밥을 준비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살아남기 위한 그의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는 여행을 무기로 삼았다. 때로는 책을 읽고 밤하늘 별을 보며 수많은 상상 속에 잠겼다. 현실의 고단함을 그렇게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그의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성찰했다. 한 때 돈이 제법 벌려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었을 때 아사히 신문사 직원들 사이에서는 마작이 유행했다. 세이초도 그들 사이에 껴서 마작을 하며 밤늦게 귀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이초의 마작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이 마작을 하고 밤늦게 귀가할 때면 늘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라며 반문을 했다.


그의 자서전을 덮으면서 나는 다시 확인한다. 희망의 단서는 각자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한국어 번역서가 선택한 <아직 늦지 않았다>라는 제목은 안갯속 같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이들,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선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 역시 그렇게 다시

희망의 단서들을 찾고 있다.


덧붙여서...

15년 동안 준비했던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읙 고향>(Two Homes) 제작을 마치고 이제 영화를 세상에 내놓으려고 하는 지금. 많이 지치고 힘든 게 사실이다. 나에게 이 책은 포기하지 말라는 용기를 준다. 결국 이 글은 나를 위해 쓴 글이기도 하다.


글: 김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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