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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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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Jul 22. 2018

답장:대만에서 온 황** 씨에게

얼마 전 우연히 만나 한 권의 책을 통해 친구가 된 사람이 있었다.

'그녀가 메일을 보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특별한 사진 한 장과 함께...'


매일매일 글을 쓴다는 게 사실 참 그렇다.

일단 밥 먹듯이 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가끔은 끼니를 거르고 싶을 때도 있는 법.

또 때로는 몸에 별로 좋지 않은 불량식품도

입에 달게 느껴질 때도 있으니


매일매일의 글쓰기는 그냥 나 혼자 정한

생활의 작은 규칙 중 하나였다.

막상 정하고 나니까 이게 지키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됐다.

그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빼버릴 걸, 하고는

매일매일 뼈저리게 반성 아닌 반성을 한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이게 어느 정도

버티기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첫 글자,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하면 자동으로 다음 글자,

다음 문장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새벽 운동 약속과도 같은 이치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갖고 있을 기억 중 하나,

새벽에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겠다는 약속 같은 것 말이다.


내가 살던 옛 동네에는 작은 산이 하나

있었다. 이름도 약수터가 있다고 해서

약수산이라 불렀다. 나중에는 양녕대군이

나라를 생각하면서 생각에 잠겼다는 뜻에서

지어진 국사봉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려졌던

산이다.


사실 해발이라고 따지기에도 좀 산이 부끄러워할

높이였는데, 대략 200미터 남짓 한 야트막한

봉우리 정도였다.

그래도 여길 오르려면 제법 산을 등산하는

느낌도 들었던 기억이 나는 걸로 봐서는

앞동산 정도로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아무튼...


그 약수터, 국사봉에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

오르락내리락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왜 늘 나 자신과의 약속은 엄동설한 한겨울,

12월 달 말에 하게 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국사봉에 올라 약수터에서

약숫물을 떠 오겠다는 무모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갑에다 털모자를 쓰고

손을 호호 불며 어둠이 깔린 새벽 골목길을

나서던 서늘한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도 그랬다.

처음 일어나겠다고 마음먹었던

첫날이 약속의 모든 걸 결정한다.

졸린 눈 비비며 힘겹게라도 일어나면

결국 그다음 날도 또 다음 다음 날도

산은 오를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약수터 산에 오르는 심정으로

글쓰기에 대한 나 자신의 약속을 지켜나가려고

한다. 물론 괜한 약속을 했다 스스로

불평을 늘어놓는 일이 일상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래서 가끔 빼먹기도 하지만,

뭐 그래도 아직은 재미가 있다.

스스로를 속이고 스스로를 달래는 

이 묘한 재미를 뭐라 달리 설명할 길도 없다.


그런데 이런 약속 덕분에

단어들이 문장이 되고, 하루가 일상이라는

조금은 의미 있는 개념으로 변한다.

나의 일상을 지키는 것은 결국 작은 습관에서

시작한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매일매일 깨닫는다.

그리고 그런 약속이 사람으로 이어진다.

모든 사람 관계는 결국 우연히 만나지는

그 재미가 있다.


운명적인 사랑의 만남,

평생을 같이 하게 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도 따지고 보면 작은 우연에서 시작한다.

또 때로는 한강 다리 위에서 투신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비참한 지경에 놓인 절망에 빠진

사업가에게도 우연한 귀인이 나타나

인생을 짠하고 변화시킨다.


아직은 글을 써서 먹고 살기엔 부족한 상태라서

아침엔 커피를 내리고 밤에는 와인을 서빙하면서

그렇게 틈틈이 글을 쓴다.

구질구질하게 살긴 싫다는 각오로 나름

열심히 잘하려고 하지만 막상 장사라는 게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고충들이 있다.


결국 그날 그날의 글쓰기도 그날 그날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에 따라서

결정되는 묘한 운명이다.


얼마 전 아무 생각 없이 컴퓨터에서

메일을 하나 열었던 기억이 난다.

뜻모를 한자 이름이 적힌

낯선 사람에게서 온 이메일 한 통.  


대만에서 여행을 왔다가 우연히

우리 가게에 들렀다는 황** 씨로부터 온 편지였다.

그녀가 함께 첨부해준 사진을 보고서야

그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유난히 책 한 권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책 때문에 인연이 되는 경우는 많았지만,

대만에서 온 관광객이 내가 쓴 책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가져줄 줄이야...

그녀가 관심을 보인 책은

중국어로 번역되었던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였다.
그날 황** 씨는 앉은자리에서

거의 절반 정도를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이 책 정말 좋은 책이네요.

감동적인 스토리들입니다.”

그리고는 지갑을 꺼내서 책 값을 지불했다.
젊은 여성이 그렇게 관심을 가져주는 게 고맙고

신기했다.

처음엔 그냥 서촌 관광 온 기념으로

한 권 사가려나 싶었다.

그녀의 메일은 바로 그 한 권의 책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대만에서 온 메일에 함께 첨부된 사진들. 가만히 보면 대만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바코드도 선명히 보인다.


“안녕하세요? 김작가 님.

잘 지내셨지요?....
사실 그 책은 저희 엄마한테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 샀어요.
저희 어머니는 퇴직과 이혼으로

많이 힘들어하시거든요.
얼마 전에는 자신의 생을 빨리 끝내고 싶다며

자식들을 슬프게 하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외로움도 더 큰 것인지,

아니면 오래 다니시던 직장을 그만둔

공허함 때문인지 저희로서는 짐작만 할 뿐이었죠.

그런데 그 책이 어머니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다시 용기를 얻고 뭔가를 하시고 싶은

마음이 드셨다고 하니 저로서는 참 고마울 뿐입니다."


글을 쓰면서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은

바로 이럴 때가 아닐까 싶다.

삶이 힘들고 괴로운 사람들에게 뭔가
위안이 되고 용기가 되어주는 글.

그런 순간이면 한 권의 책은

그 어떤 보약이나 처방보다 도움이 된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덕분에 오랫동안 알고 있던
사람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그걸 정성스럽게 사진을 찍고

메일로 보내준 마음이 고마웠다.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가

바다를 건넜다.
낯선 고장, 이름 모르는 누군가의 인생에

다가가고 있다.

그들의 닫힌 마음의 문이 열리고

삶의 희망이 된다니.

나로선 감동이고 감격할 만한 일이다.

무엇보다 나로 하여금 더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된다.

이런 가슴 벅차게 멋진 경험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글쓰기의 매력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오늘은 그렇게 그녀의 작은 글 하나가

나에게 감동을 선물했다.


결국 모든 것은 그 옛날 약숫물 뜨러

졸린 눈 비비며 잠에서 일어나

앞동산에 오르곤 했던 새벽별 보기 운동 같은

매일매일의 글쓰기가 시작이 아니었을까.


국사봉에 오르면 남산에서부터 북한산,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아마 서울에서 이런 멋진 뷰를 감상할 곳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불과 30여 분 만에 걸어서...


얼마 전 한 블로그 기사를 보고

알았는데, 그 약수터가 아직도

정상 운행(?) 중이라고 한다.

이름만 약수터가 아니라

다양한 미네랄을 포함한 식용가능한

물을 제공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자연의 생명력이란 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강인한 생명력으로 약수터를 지키고 있을

국사봉 주민들과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의 옛 친구들에게 멀리서

안부의 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더불어서 오늘 아침,

'오늘은 또 뭘 쓸까?'하고 고민하던

나에게 아주 근사한 글쓰기의 소재를

제공해준 대만에서 온 황** 씨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다들 안녕하신지요?'


저렇게 멋진 대만의 서점에 내 책이 팔리고 있다는 걸 상상하는 것도 글쓰는 즐거움 중 하나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 올 겨울 다큐멘터리 한 편을 찍기 위해서

현재 기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매우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협조를 부탁드리며...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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