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화평론가로부터 받은 메시지 하나 때문에 울컥했습니다.
'개봉 다이어리' 2020년 6월 14일
극장 개봉까지 이제 10일 정도가 남은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할 텐데 조금 걱정도 앞선다. 뭘 해야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오늘 아침에는 문득 그런 고민도 들었다.
이건 진짜 솔직한 고백이지만, 나한테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두 가지' 생각이 없었다. 그 두 가지가 뭐냐면...
첫째, '2020년이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영화를 만들었다.
2019년 1월 5일 뮌헨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에서부터 동유럽 곳곳을 누비며 촬영을 하고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영화가 완성되고 개봉되는 2020년이 갖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를 인식하지 못했다.
뭐. 나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어떤 욕심 같은 게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한국전쟁 70주년'이라는 의미를 영화에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것 같다.
두 번째로 갖고 있지 않았던 생각은 '극장 개봉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욕심 같은 거였다.
내가 아는 한 후배 이야기를 하자면, 영화판에서 10년을 넘게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7,8편 정도 굵직굵직한 상업영화에서 열심히 땀 흘렸지만 막상 자신의 이름을 건 영화를 극장에 올리지는 못했다.
글쎄, 그런 분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수많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극장이란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얼마 전 한 후배로부터 격려 메시지를 받았는데 열어 보니까 첫마디가 '극장 개봉 영화감독이 되신 것 축하합니다'라는 문구였다. 한국 사회에서 극장에 영화를 개봉하는 감독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무튼 나에겐 '한국전쟁'을 기념해서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도, 극장에 영화를 개봉하는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생각 같은 것들이 없는 상태에서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 영화가 바로 6월 25일 개봉하는 '김일성의 아이들'이다.
아무리 처음이라지만 그래도 극장에서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는 순간이다. 떨리고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어제부터 큰 맘먹고 유명한 사람들한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물론 그들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결코 아니다.
'코로나 때문에 정식으로 시사회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이렇게 불쑥 문자로 먼저 연락을 드립니다. 혹시 저희 영화에 대해서 짧은 코멘트라도 한 마디 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영화 광고 같은 거 보면 유명한 연예인들이 짧게 한 마디씩 하는 예고편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참 좋아 보였다.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생면부지 전혀 일면식도 없는 영화 평론가, 작가, 유명인들에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답장은 없다. 어떤 사람 전화번호는 수신 불가로 나오기도 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서 내가 그들이라면, 나 역시 그리 반갑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불편함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일종의 스스로에 대한 다짐.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약속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계속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답장 하나가 도착했다. 말만 들어도 다들 아는 유명한 영화 평론가였다. 솔직히 답장이라도 온 게 어딘가. 다른 사람한테 보내던 메시지를 멈추고 먼저 그가 보낸 답장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보내주신 문자 읽었습니다. 그리고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영화에 관한 리뷰는 어떤 경우에도 (그 영화가 걸작이라 할지라도) 제안을 먼저 받아서 쓰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원칙 중의 하나입니다. 제 입장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조금은 부끄러웠고 또 조금은 부러웠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다 아는 평론계의 원칙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조차 모르고 무턱대고 머리를 디밀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서둘러 대화를 마치려고 할 때 그에게 다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공들여 만드신 <김일성의 아이들>은 꼭 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잘 쓸 수 있는 영화라면 제가 공개할 수 있는 지면에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그의 메시지를 받고서 눈물이 났다. 글쎄 무슨 이유였을까... 우선 나는 그의 소신과 원칙이 부러웠다. '그래. 세상은 그렇게 자신이 믿는 것들을 향해 끝까지 도전하고 노력하는 거야. 중간에 타협은 없는 거야.' 내 마음속으로는 그런 목소리들이 울렸다. 그리고 자신의 영화적 세계관을 지키기 위해서 그가 평생토록 유지해왔을 그 소신과 믿음이 부럽기만 했다.
'아. 우리나라에도 이런 분들이 계시는구나.'
어쩌면 1950년 전쟁으로 모든 게 초토화된 땅에서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한 사람 한 사람들의 소식과 원칙,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에게 그런 마음까지 담아서 메시지를 보냈다.
'제가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는 게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원칙, 개인적으로 존경합니다. 나중에라도 인사드릴 기회가 있다면 꼭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서둘러서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 곧바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늘 그와 나눈 짧은 대화는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고 적지 않는 강렬한 인상으로 앞으로도 계속 남아 있을 것 같다. 무엇이 나를 울렸고, 또 무엇이 나를 가슴 뛰게 했을까. 앞으로 계속 질문의 답을 찾아볼 생각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영화, 한국의 문화가 발전한 바탕에는 이런 남이 알아주건 말건 자신의 원칙과 소식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던 진정한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숭고한 정신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걸 깨닫는 과정은 나에게 너무나 드라마틱했고 가슴 뛰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멋지고 근사한 추억을 가슴에 안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영화감독이 되면서 얻게 된 가장 큰 기쁨이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 그런 기쁨과 영광을 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은 코로나 사태로 힘든 상황일지라도 6월 25일 정상 개봉할 것이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마스크 두 장 쓰고서라도 반드시 보러 가겠다'는 분들만 있으면 두려울 것도 없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되고 극장의 어느 좌석일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글. 김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