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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Apr 21. 2016

'17대 0의 차이'

독일 아이들은 왜 17골이나 넣으면서 경기를 끝냈을까?

* 예고한 대로 오늘은 축구 이야기입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기념해서 독일 레버쿠젠 유소년 축구팀과 국내 유명 유소년 축구팀 아이들이 친선경기를 가졌습니다. 경기 결과는 17대 0. 당시 현장에서 있던 저는 승패보다도 과연 무엇이 그렇게 큰 점수 차이를 가져왔는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유치원 아이부터 시작해서 프로 입단 직전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독일 유소년팀의 속내를 며칠에 걸쳐서 취재했습니다. 이 글은 2012년에 발표한 졸저 <세상은 모두 다큐멘터리였다>에 실린 이야기를 재가공했습니다. 전에도 언급했던 실험적 차원의 글쓰기인 'sustainable writing', 작가가 자신의 글을 끊임없이 재가공하고 업그레이드시켜서 독자와 시간을 초월해서 호흡을 같이 하겠다, 는 방식으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차원의 글쓰기인 셈이죠. 취재된 내용은 2006년 5월 EBS를 통해 방송되기도 하였습니다. 



    '꿈에 부풀었던 아이들의 독일 월드컵 원정 여행'



   드디어 구체적인 일정이 결정됐다. 이번에 갈 곳은 독일 북서부의 도시  레버쿠젠(Leverkusen)이다. 레버쿠젠은 독일의 대표적인 공업도시이자, 우리에게는 아스피린으로 유명한 독일 제약 회사 바이엘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할 것이 있는데, 바로 한국인 최초로 분데스리가의 전설적인 영웅이 된 차범근 선수가 활약했던 바이어 레버쿠젠의 홈이기도 하다. 실제로 지금도 레버쿠젠에 가면 '차 붐'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레버쿠젠 구장 옆에 있는 축구박물관에는 차범근을 기념하는 조형물도 있을 정도다. 이미 전설이 된 얘기지만, 차범근 선수가 활약할 당시인 1980년 후반, 레버쿠젠 팀은 최고의 전성기였다. 레버쿠젠 시민들은 동양에서 찾아온 한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는 절묘한 플레이에 열광했고, 차 붐의 활약에 힘입어 레버쿠젠 팀은 1988년 UEFA컵 우승을 차지한다. 여러모로 인연이 많았던 도시  레버쿠젠, 그곳에서 아이들과 나는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한 가지 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레버쿠젠 축구박물관



   월드컵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던 2006년 4월, 국내의 한 유소년 축구팀에 소속된 초등학교 열 살짜리 아이들이 독일을 찾았다. 그들은 두 차례 독일 유소년팀과 경기를 펼쳤다. 경기 결과는 예상의 스코어. 한 경기에서 17골이나 내주면서 패배한 경험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없었다. 좌절과 후회의 장탄식이 들려왔다. 당시 나는 아이들을 소재로 한 방송 다큐멘터리 취재를 하던 중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축구팀 관계자들이 몰려와서 경기 장면을 방송에 내보내지 말라고 요구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나 역시 적지 않은 충격에 빠진 건 마찬가지였다. 자칫 내가 내보내는 방송이 어린아이들에게 유럽 축구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난 내가 현장에서 본 '17대 0'이란 스코어의 차이를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했다. 다음 날부터 난 독일 아이들이 경기장 안팎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들의 연습장면은 물론이고 연습장 밖에서 추위에 떨면서 자식들의 연습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독일 학부모들과도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흔히들 코치나 감독들은 어린 선수들에게 경기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들을 한다. 승패 자체보다는 그것을 얻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무엇을 배울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어차피 배우는 과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시행착오란 늘 값진 교훈이 된다. 결과보다 경기의 과정 속에서 갖고 있던 마음가짐에 주목하는 것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훨씬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경기의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한다고 해서 시합을 하는 동안 경험하게 되는 짜릿한 골맛의 순간이나 점수의 차이가 아이들의 가슴에 쉽게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특히 이긴 경기보다는 진 경기일수록 골을 먹을 때의 아픔은 오래가는 법이다. 그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기억되는 아픔이다. 그래서 스포츠로 교육을 하는 코치나 감독들은 이 미묘한 점수의 차이를 잘 활용해야만 좋은 교육적인 효과를 아이들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들 한다. 때로는 승부나 순위 같은 것으로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이들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그런 게 없으면 자기 안에서 내적인 에너지를 불러낼 수 있는 힘이 약해진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가끔은 주의를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도 점수의 차이, 실력의 차이 그리고 순위의 차이는 의미가 있다. 


   그날의 경기는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레버쿠젠 유소년팀의 압승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볼을 다루는 개인기나 조직력에서 차이가 난 것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17 대 0'이란 점수차는 독일 축구와 한국 축구의 수준 차이가 아니란 뜻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독일 아이들이 받아온 스포츠 교육과 한국 아이들이 받아온 스포츠 교육의 차이였다. 경기장의 볼이 아니라 책가방 속에 담겨 있던 차이던 것이다.  


   경기 당일 레버쿠젠 유소년 경기장에는 봄비가 촉촉이 내렸다. 그렇게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다가 다시 햇살이 나오자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기온이 올라갈 정도로 레버쿠젠의 봄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두꺼운 외투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 운동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 아이들을 지켜봤다. 경기 전날, 경기를 예측해 달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 팀 관계자들은 대략 3대 2 정도의 스코어를 예측했다.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제일 잘 나간다는 축구클럽에 속한 선수들인데다, 어릴 적부터 많게는 4,5년씩 호흡을 맞춰왔기 때문에 아무리 원정경기의 약점이 있다 해도 대등한 경기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 있던 어느 누구도 '17대 0'이란 점수의 차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상을 빗나간 경기 결과에 선수들은 물론이고 팀 관계자, 현장에 같이 있던 기자들까지도 모두 말없이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애초부터 시합보다는 좀 뭔가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고 있던 나에게는 경기의 점수 차이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어떻게 이런 점수차가 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경기장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죽치고 앉았다. 


   한국팀과의 경기가 끝나자,  이어서 다른 또래의 유소년 선수들이 훈련을 시작했다. 레버쿠젠 유소년 축구클럽에는 U-6부터 U-19까지 나이별로 다양하게 팀이 짜여 있다. 유치원 아이들부터 프로 입단 직전의 청년까지 단계별로 훈련과 교육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시설고 좋고 교육 방식이 탁월해서 유럽은 물론이고 아시아 각국에서 실력 있는 아이들이 이곳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유소년 팀 입단은 하늘의 별따기다. 우선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은 레버쿠젠 스카우터들이 부여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동네 축구장에서 실력을 보여야 한다. 그런 아이들을 발굴하는 것이 스카우터들의 역할이다. 그들의 눈에 띄면 아이들은 입단 테스트 제의를 받는다. 날짜를 정해서 부모와 함께 경기장을 방문하고 간단한 메디컬 테스트와 경기력 테스트를 받는다. 

  

   그렇게 해서 입단이 결정되면 활동에 필요한 경비는 구단이 책임을 진다. 축구 선진국이라는 게 다 이렇게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미래의 축구 스타를 키우기 위해서 구단이 아이들 육성에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독일 분데스리가 거의 모든 프로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구단에서는 축구만 가르치지 않는다. 선수들의 학과 공부가 뒤처지지 않도록 개인교습도 동시에 진행된다. 이렇게 생활은 물론이고 공부까지 책임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는 이민자들 중에는 독일 사회로의 진입을 위해서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기도 한다. 


   최근에는 독일 축구계에서도 순혈주의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유색인종이나 이민자 출신들에게도 많은 기회가 열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축구팀의 유소년 선수로 뽑힌다는 것은 그가 어디 출신이고 어떤 피부 색깔을 가졌든 상관없이 밝은 미래를 향해 한발 다가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습과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자세가 진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우리 유소년팀이 맞붙었던 팀은 U-10 유소년팀, 열 살 이하의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다. 체격 조건은 우리 아이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볼을 다루는 솜씨나 기량 면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신체적인 조건이야 이제 우리 아이들도 다른 나라 아이들과 비교해서 별로 뒤처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유소년 축구클럽도 많이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열 살짜리 아이들의 볼 다루는 수준만 놓고 본다면, 사실 거기서 거기다. 그렇다면 도대체 '17대 0'이라는 엄청난 점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체격 조건이나 기술도 아니라면 그 원인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나의 초점은 바로 거기에 맞춰져 있었다. 


독일 레버쿠젠 유소년 축구팀 선수들

나는 가급적이면 선수들을 가르치는 코치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했다. 그들의 입을 통해서 그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들보다 약한 팀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끼는 것이 그들의 코칭 스타일이기도 했다. 이런 과묵한 사람들에게는 우선 진심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장에 나가 무조건 독일 아이들이 연습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처음에는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독일 코치들도 찬바람 부는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 훈련 장면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조금씩 마음을 열어주었다. 제일 먼저 말문을 열어준 사람은 우리 아이들과 시합을 벌였던 바로 그 유소년팀의 코치였다. 


   독일에서 유소년팀만 지도한 지 10년이 넘었다는 그는 경기를 통해 자신이 느낀 점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들도 경기를 통해 드러난 양팀의 객관적인 전력이나 선수들의 기량에는 차이가 없었다는 걸 인정했다. 그 점에서는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 아이들의 기본기나 체력이 예전과 다르게 향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코치의 눈에는 한 가지가 달랐다. 독일 아이들에게는 있었고,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부족했던 그것, 그것을 가리켜 그는 '볼(Ball)에 대한 존경심'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선수든 최선을 다해서 경기에 임하고 승리를 향해 의지를 불태우는 것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그날 아이들을 차이 나게 만든 것은 '볼에 대한 존경심', 바로 볼에 대한 태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 말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경기에 임하는 진지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 코치의 말을 그대로 빌린다면, 유소년팀을 교육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은 바로 경기에 대한 진지함이고, 그건 볼을 다루는 기술과는 무관하다.  볼에 대한 태도는 볼에 대한 생각과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을 당시 경기 상황과 비교해서 설명해 보겠다. 


   초반 경기가 접전을 거듭한다. 그러다 첫 골이 들어간 순간부터 연이어 두 번째, 세 번째 골이 들어간다. 어느덧 점수 차이가 5대 0까지 벌어졌다. 스코어 차이가 커지기 시작하자 우리 팀은 눈에 띄게 허둥대기 시작했다. 이미 전반이 끝나자마자 경기를 포기하려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를 게 없으니까. 그런 심정은 독일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뛰나 안 뛰나 어차피 이긴 경기니까 말이다. 바로 그 순간부터 독일 팀 코치들의 역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새로운 지시를 경기장의 선수들에게 내린다. 물론 경기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몰랐다. 


   그것은 각자 마음을 냉정하게 다스리라는 주문이었다. 이기고 있건 지고 있건 축구공은 언제나 둥글게 굴러간다. 그날 코치는 아이들이 골을 많이 넣는 것에 도취해서 우쭐한 기분에 휩싸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틈 날 때마다 코치는 끊임없이 냉정을 유지하라고 아이들에게 주문했다. '볼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말라'고 소리쳤다. 왜냐하면 정반대의 경우도 언제나 있을 수 있다는 걸 그들은 잘 알기 때문이다. 


   보통 축구에서 세 골 정도면 승패는 갈렸다고 말들 한다. 이기고 있는 팀의 경우 서너 골 정도 차이가 벌어지면 이미 경기를 이겼다는 마음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그쯤 되면 이기는 팀 선수들은 몸을 사리거나 대충대충 경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바로 이런 대충대충하는 마음 자세가 축구를 배우는 유소년 선수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이다. 그날 독일 아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자세로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코치들이 지도한 것은 바로 '골을 대하는 자세'였다. 첫 골이 들어갔을 때나 마지막 골이 들어갔을 때나 똑같이 볼에 대한 집중력을 유지했다. 그랬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골은 계속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코치들이 그날 집중적으로 강조한 부분이었다. 


   잠시 당신이 독일 유소년팀 선수가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전반 10분쯤 첫 골이 들어갔다. 그리고 연달아서 서너 골이 또 들어갔다. 이미 스코어는 5대 0, 이 정도면 이겼다는 느낌이 온다. 슬슬해도 이길 수 있다는 조금은 나태한 마음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런데 그 순간, 경기장 밖에 있던 코치들이 소리친다. "Respect the Ball!"(볼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라!), "냉정한 플레이!". 이미 아이들은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들어왔던 코치들의 명령이다. 훈련받은 그대로 아이들은 골이 들어갔어도 또 골을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이들의 머리 속에는 숫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골은 16대 0까지 들어간 다음에도 또 한 골이 더 들어갔던 것이다. 


   이제 반대로 우리 팀 선수가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경기가 시작되고 처음 얼마 동안은 호흡도 잘 맞고 슈팅도 잘된다. 독일 아이들 실력이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이길 수 있어. 자신감이 생긴다. 그런데 수비진의 실수 한 번에 독일 팀이 먼저 골을 넣는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뭐, 첫 골쯤이야' '우리도 빨리 만회하면 되지 뭐' 하며 다시 힘을 낸다. 하지만 방심하는 사이 또 한 골을 먹었다. 그리고 연이어서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골이 들어간다.  5대 0, 이건 한 번도 뒤집어본 적이 없는 스코어이다. '아! 대충 이렇게 지겠구나.' 이런 생각을 품자 몸이 더 무겁게 느껴져 온다. 발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고  볼을 차도 멀리 나가지도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독일 애들은 또 골을 집어넣는다. 어느새 10대 0이 되었다. '졌다', '경기야 제발 빨리 좀 끝나라.' 멀리서 코치가 소리를 친다. "한 골만이라도 넣고 끝내자!" 아이들도 같은 생각이다. '그래 한 골 정도는 넣어야지.' 골에만 집착하는 사이에 전술이나 전략 같은 것은 제대로 가동될 기미조차 없다. 오직 제 각각 운동장에서 허둥지둥 뛰어다닐 뿐이다. '저 독일 애들은 어떻게 저렇게 냉정할 수가 있지?', '좀 살살 봐주면 안 되나... 무슨 결승전 경기도 아닌데 말이야...' 


   그렇게 볼에 대한 생각보다 점수에 대한 생각에 몰두한 사이, 공교롭게도 점수 차이는 계속 늘어간다. 아이들은 오늘 같은 경기를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더욱 당황스럽고 난감하다. 경기장에서 뛰고 있다는 자체가 고역이다.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해본 것 없이 경기는 끝이 난다. 17대 0이란 점수차에 고개조차 들 수 없을 정도다.  오직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독일 코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당시 현장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본 이야기이긴 하지만, 당시 상황과 아마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단순한 해프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아이들이 먼 미래에 나라를 대표하는 대표팀 선수가 된다. 독일의 경우,  '볼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주는 작업은 이미 U-6, 즉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되고 있다. 월드컵에만 나가면 승승장구하는 독일 축구대표팀의 '위닝 멘탈리티'(winning mentality)는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건 원래부터 이기는 것에 익숙해진 팀이 갖는 아주 고유한 특권이기도 하다. 그 출발은 바로 적어도 나의 관점에서 봤을 땐, 테크닉이 아니라 볼(Ball)에 대한 관점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멘탈리티라는 개념은 정신력이나 사고방식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흔히 강인한 멘탈리티를 만드는 방법이 강도 높은 훈련이나 엄격한 규율에 있다고 믿는다.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면 멘탈리티도 올라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건 그릇된 생각이다. 앞서 소개한 독일 유소년팀의 '볼에 대한 존경심'이라는 멘탈리티를 잘못 이해하면 엄격한 규율 같은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멘탈리티는 규율이나 강제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체험과 경험 그리고 반성에서 비롯된다. 바탕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즐겁게 하고 있다는 자존감이 깔려 있다. 바로 여기에 '17대 0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나는 문화적으로도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진다고 해도 그것이 곧바로 문화의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꼭 돈이 많아서 문화의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것도 아니다. 문화의 빈곤과 풍요로움은 그 사회의 고유한 메커니즘에서 차이가 난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문화적으로 유럽 사회는 좋은 멘탈리티를 소유하고 키워나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들이 어려서부터 시작해서 성인이 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성숙한 멘탈리티를 찾아나가는 방법 중에 가장 선호하는 수단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책과 여행'이다. 


   멘탈리티는 단기간에 성숙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숙성의 과정을 거쳐서 맛과 향을 더하는 와인처럼 멘탈리티는 시간이 제일 중요한 요소다. 아이가 자라면서 좋은 멘탈리티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 부모들은 '책과 여행'을 권장한다. 유럽의 유소년팀 아이들이 축구 경기장에서 연습을 하거나 경기를 하는 시간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교양을 쌓는 일이다. 그들의 눈에는 아무리 천재적인 스포츠 기질을 타고난 아이라도 인문학적 교양을 쌓는 일을 게을리하면 그 아이에게 미래는 없다. 아무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멘탈리티'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버쿠젠의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책가방을 맨 축구 선수, 인문학적 교양을 쌓는 일에 엄청난 시간을 할애하는 유소년 클럽, 그리고 참을성 있게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부모들, 바로 이것이 '멘탈리티'를 통해 하나로 집약되고 구체화된다. 책을 든 축구선수는 원정경기를 위해 다른 지방에 갈 때도 단지 경기만을 생각하고 버스를 타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여행의 체험을 얻도록 최대한 배려한다. 새로운 경험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 결합되면서 자신들만의 문화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곧 팀의 멘탈리티이고, 팀의 독특한 개성을 형성한다. 축구를 배우는 아이들에게 '전통'과 '개성'보다 더 강력한 자극도 없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배들을 따라 배우려는 의지가 생기면서 자신감도 싹튼다. 그렇게 어린 선수들의 자신감을 통해 독일 국가대표팀의 '위닝 멘탈리티'도  무르익어 간다. 레버쿠젠의 레전드 가운데 차범근이 있다는 건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들처럼 우리 팀의 고유한 레전드는 누구인가. 아니 우리에게도 레전드가 있는가.


   책을 읽는 선수는 경기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진행한다. 새로운 정보를 얻고 자신의 내면을 심화시키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한다. 책을 읽는 선수는 여행을 통해서 자신과의 진지한 대화의 끈을 놓지 않는다. 볼과 책으로 가득한 여행가방 속에서 세상 어디에 가도 주눅 들지 않는 강한 멘탈리티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나저나 벌써 10년이 지났다. 문득 그때 독일 원정에 함께 했던 아이들이 보고 싶어 졌다.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자라났을까. 십 년이 지났으니, 이제 그들도 스무 살 청년이 되었을 텐데. 지금쯤 그라운드를 누비며 17대 0, 그날의 패배를 설욕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 어쩌면 축구와는 무관한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무엇이 됐든 그들의 멋진 인생을 기원한다.


2006년 독일 원정대 선수들



지은이: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 다큐멘터리 PD / 서촌의 복합창조문화 공간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김덕영의 작품들. 왼쪽부터 장편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세상은 모두 다큐멘터리였다>


글을 읽고 작가의 책을 응원하고 싶거나 책을 구입하고 싶으신 분은 아래 연락처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Tel: 070-8987-0408  / e-mail: docustory@gmail.com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매일 같이 창작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작가에게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26-5번지, 복합창조문화공간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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