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서 친구 만들기

나의 통의동 다이어리 (119)

by 김덕영

무라카미 하루키와 경쟁하듯 시간 싸움을 하고 있다. 그가 7년 동안 도쿄에서 재즈바를 운영했다는 사실보다 나에게 더 자극적인 것도 없다. 그가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막연하고 근거 없는 믿음. 어쨌거나 힘들고 무료할 때마다 그의 ‘7년'은 나에게 바카스 한 병처럼 달콤한 무엇이다. 회사건, 가게 건 간에 무조건 오래 버티는 자가 이기는 불황생계형 경제 패러다임 속에 점점 빠져들고 있는 느낌도 든다.


영화 <300>의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는 야생의 날것들이 판치는 헐리웃 경쟁시스템 속에서 승리하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덕목이 있다는 말을 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능케 하는 바로 그 첫 번째 덕목은 다름 아닌 ‘책상 앞에 앉기'였다. 일종의 ‘오래 버티기'다. 멋진 클래식 콘서트나 크루즈 여행 같은 걸 기대했다면 좀 실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진짜 맞는 말이다. 사실 나의 경우에도 책상 앞에 앉는 일이 제일 힘들다. 손님들이 많을 때는 바쁘다는 이유로, 가게가 텅 빌 때는 가게 앞날을 걱정하느라(?) 이런저런 핑계 대며 책상 주위를 맴돈다. 노심초사, 와신상담의 낙타 등 같은 기복을 몇 번 돌리고 나서 힘겹게 책상 앞에 앉기라도 하면,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우리 고객님들.


작가가 가게를 운영하며 글을 쓴다는 게 이론상으로는 멋져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현실은 그렇게 판타스틱하지 않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장편 소설도 한 권 썼고, 뮤지컬 시나리오도 초고를 완성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벌려놓은 판은 하나 둘이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일 욕심이 많아서일 것이다. 게다가 요즘엔 고양이들까지. 아무튼 그렇게 하루하루 서촌 통의동에서 고양이들과 생활하면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게 지금 나의 모습이다.


아무튼! 지금도 무조건 책상 앞에 앉기 위해서 글을 쓸 소재를 찾고 있다. 그러다 한 가지가 떠올랐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스마트한 중년 남자 한 분이 모임을 예약했다면서 일행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시니컬한 눈빛, 관료적인 몸짓. ‘아! 오늘도 조심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서빙을 시작했다. 일행이 있었던 관계로 그 중년 남자는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곧 모임 속에 합류했다. 지지고 볶고 데치고 다지고 그렇게 좁은 주방에서 최선을 다해 음식을 만들고 서빙을 했다.


와인 한두 잔이 비워질 무렵, 중년 남자가 일행들 앞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가게 일 하다 보면 가끔 이렇게 나이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좀 불쾌 할 수도 있지만, 각자 따로따로 살아온 인생의 행로 속에서 서로의 좌표를 한번 맞춰본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난 뭐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1965년 뱀띠입니다.”

“어라! 나랑 동갑이네!”

“아! 그러십니까?! 반갑네요.”

“반갑네요!”


그렇게 악수를 하고 통성명을 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어가면서 한 가지 어색한 건, 동갑내기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나이 오십을 넘기면서 그만큼 삶이 팍팍해진 탓도 있겠고, 세상을 먼저 떠나는 사람들도 그만큼 많이 늘어났다는 뜻도 될 것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동갑내기 인생을 만났다. 하지만 뭐 그렇다고 우리가 악수 한 번에 갑자기 친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음식과 와인을 서빙하느라 그 동갑내기와의 짧은 대화는 그것으로 그쳐야 했다. 그날따라 손님들이 좀 많다 보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바쁘게 일을 해야 했다. 잠시 후, 가게 안이 좀 조용해질 무렵, 아까 그 동갑내기 중년 남자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 있잖아요. 우리 말 놓읍시다!”


역시 경상도 사나이답다. (맞다! 그날 모임이 부산 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이었다는 말을 안 했다.) 아무튼 갑작스럽게 말을 놓자는 동갑내기 제안에 좀 당황스러웠다. 그렇잖은가! 그래도 손님인데, 갑자기 손님한테 ‘야. 너'를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했다. 그런데 그 동갑내기가 고집이 대단했다.


“말 놓자! 동갑내기 오랜만에 만났고 여기 가게도 분위기 너무 좋다. 너도 인상 무지 좋고!”


그래. 남이 자기를 칭찬하는데 기분 나쁠 사람 없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그처럼 쉽게 ‘야. 너'가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난 최선을 다해서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게 뭘까 고민했다. ‘대학생으로 돌아가서 친구를 사귈 때 내가 즐겨했던 일은 뭘까?’ 아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문득 책을 한 권 선물했던 일이 떠올랐다. 돈도 많지 않고, 뭐 하나 여유롭지 않았던 대학 시절, 나는 친구를 사귀면 꼭 책을 선물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쓴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소설과 에세이 중에서 고민하다. 결국엔 그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보고 그냥 나이 들어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열심히 살자는 뜻에서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정성껏 사인을 하고 낙관을 찍었다. 아마 책 안쪽에 이렇게 썼던 것 같다.


“OO에게... ‘모든 책에는 고유한 운명이 있다.’ 오늘 친구가 된 너에게 이 책을 선물할 수 있어서 참 기쁘다. 반갑다! 친구야!”


내가 줄 수 있는 아주 작은 선물이었다. 난 책을 들고 그가 있는 자리로 갔다. 그리고 불쑥 책을 내밀었다.


“이게 뭐꼬?”

“내 책이야! 내가 쓴 책.”

“그래?!”

“친구된 기념으로 주는 거다.”

“야! 정말 고맙다. 친구야! 정말 고마워.”


덥석 내 어깨를 껴안는 동갑내기 때문에 그 순간 조금은 나도 속으로 맘이 짠했다. 의자에 앉자마자 그 동갑내기는 내 책을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다.


“자! 봐라! 내 친구가 줬다 아이가! 니들은 이런 거 읎제!”


책 한 권 갖고 자랑을 하는 내 동갑내기가 참 천연덕스럽게만 보였다. 자리를 벗어나고 있는데 옆자리에 있던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고맙심더! 오늘 사실 저분 때문에 모였는데... 기분 좋게 해주셔요.”

“뭘요.”

“사실 저분 저희 회사 상무님이셨거든요.”

“상무요?”

“네. K은행 상무요. 근데 오늘 새로 친구 하나 만났다면서 무척 기뻐하시네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국내 굴지의 은행, K에서 온 상무 한 사람이 지금 가게에 있다는 말이다. ‘뭐, 상무가 대단한가?’ 하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무가 뭐 쉽게 오를 수 있는 자린가?!


“그럼. 내가 오늘 K은행 상무랑 친구한 거네요!”


그날 모임은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끝이 났다. 나야 뭐 서빙만 한 것이지만, 괜히 그날은 내가 그들과 와인 한 잔 한 것처럼 이유 없이 취기도 올랐다. 기분에 취한 탓이겠지. 그날 동갑내기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자리를 떴다. 내가 선물한 그 책을 두 손에 꼭 쥐고서 말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던 것 같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난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아마도. 어쩌면 그는 늘 최고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다. 비록 오늘 그를 처음 봤지만, 오늘 그는 진짜 행복해 보였다. 어쩌면 사람들의 진심이 그리웠던 건 아닐까? 그래. 그날 난 진짜 순수하게 동갑내기 친구를 하나 만나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를 K은행 상무가 아니라, 그냥 1965년 같은 해에 태어났던 동갑내기 친구로서 말이다. 그에겐 그런 내가 참 고마웠던가 보다. 나도 고맙다. 언제 내가 또 K은행 상무랑 말을 놓고 친구를 먹을 수 있겠는가.’


참고로 그날은 K은행 상무의 퇴직을 위로하며 선후배들의 마련한 술자리였다. 참, 복도 없다. 퇴직한 상무라니...T.T 그래도 현직 K은행 상무보다는 백 배는 더 마음이 편하다. 왜인지는 아마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글쓴이: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 다큐멘터리 PD / 서촌의 복합창조문화 공간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뒤늦게 표지.jpg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100세 시대, 늦은 나이에 두 번째 인생에 도전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김덕영 지음 (다큐스토리, 2013)


스크린샷 2016-04-12 오전 9.52.23.png '중년의 사랑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다.' 49금 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 김덕영 지음
kimpdcafe.jpg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독자들과 만나면서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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