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PD의 인문학 여행' (19)
10월 초에 발간할 예정인 신작 <하루키에겐 피터캣, 나에겐 통의동 스토리가 있다>의 후반 작업으로 분주하다. 서촌, 통의동 작은 작업실 겸 까페에서 진을 치고 작업 한 지도 벌써 몇 달째. 나처럼 혼자서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사람의 경우에는 뭐든 도움 받는 일이 많다. 조금은 외로운 작업이다 보니, 누군가의 조언이 힘이 될 때도 많다. 탈고를 하고, 인디자인으로 본문 디자인을 마쳤다. 포토샵으로 표지까지 완성시킬 정도로 이제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다. 물론 즐거우니까 즐겁게 일을 하고 있다.
낮엔 커피 내리고, 밤엔 와인 서빙하고, 그리고 남은 시간들은 모조리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데 투여하고 있다. 이런 일상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궁금하기도 하다. 애초부터 전문가라는 소리를 듣기 보다는, '참 재밌게 사시네요'란 말을 듣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다. 그에 따르는 댓가도 어느 정도는 지불했다. 표를 사기 위해선 어차피 돈을 내야 하니까. 이제부터 또 달려야 하는데 갈 길은 물론 멀다. 전업작가의 꿈을 키워 보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니, 어쨌든 끝장은 내야지. 오늘 이야기는 이렇게 며칠 전 각오를 다지고 오타를 잡으며 원고의 교정을 하고 있던 중에 가게로 찾아왔던 한 후배에 관한 이야기다.
'모든 책에는 고유한 운명이 있다', 나의 생활형 밀착형 주문이다. 신기하게도 이번 책은 남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두 발로 2년 동안 직접 서촌을 걸어 다니며 제작되었던 '서촌 보물 지도'에서부터 우연히 통의동 골목길을 걷다 예쁜 까페가 있었다,며 가게 앞 이미지를 일러스트로 그려서 선물로 주셨던 분에 이르기까지, 참 다양한 사람들이 도움을 주고 있다.
어제는 서촌에 살고 있는 동네 후배(?)가, (처음엔 모르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진짜 내 어릴 적 살던 동네 후배였다) 달이 하도 커서 생각이 났다면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 달이 너무 커요. 달빛 하면 여기 통의동 스토리잖아요."
한국경제신문에서 오랫동안 글을 쓰고, 다듬는 일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편집기자 출신의 후배였다. 신간 준비로 테이블에 널린 게 원고 뭉치들이다. 그걸 보더니 갑자기 불쑥 한 마디 더 꺼낸다.
"제가 오타 정도는 봐드릴 수 있는데..."
눈은 벌써 원고로 가 있다. 아무 생각이 없이 원고 몇 장을 그녀에게 건넸다. 교정이라기보다는 그냥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떤 느낌으로 읽히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여기 '빌어서'라는 단어는 많이 틀리는 단어예요. 그건 거지가 빌어먹다,할 때처럼 뜻도 좋지 않아요. 빌려가 맞아요. 자주 틀리는 표현이죠."
역시 기자답다. 두어 장 원고 속에서 벌써 찾아낸 오타만 서너 개는 되는 것 같다. 회사에서 신입사원들에게 편집 교육을 시키고 있는 베테랑이 오죽하겠는가!
"와인 한 병 사주시면 본문 전체 교정도 봐드릴 수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320페이지나 되는 많은 분량이다. 그걸 와인 한 병으로 퉁치다니! 누구나 그렇지만 한 번 일을 손에 잡으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9월 말에 자신이 쓴 설을 응모할 계획까지 갖고 있단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지......'
그래도 말 안 듣고 옆에 있는 원고들을 들춰보기 시작한다. 프롤로그다. 제목은 '나의 통의동 다이어리'. 벌써 원고를 손에 쥐고 읽기 시작했다. 교정이란 단지 글자의 오타 정도를 찾는 일이 아니다. 글의 완성도를 높이고,독자들의 반응도 미리 가늠해 볼 수 있는 게 교정이란 작업이다.
따라서 모든 책은 교정을 제대로 거쳐야 책의 질이 높아진다. 그걸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혼자서 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버텨왔다. 옆에서 보다 못한 임대표가 교정이다 수정이다 참견하면서 같이 작업한 지도 벌써 두 달째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서 편집기자 출신 후배의 말 한마디가 달콤할 수밖에.......그러는 사이 프롤로그를 다 읽었나 보다. 역시 흰 원고 위에서 빨간 자국들이 선명하다. 오타를 찾은 흔적들이다.
"이거 재밌네요. 제가 그냥 다 할게요."
그렇게 해서 어젯밤 그녀는 320 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원고 뭉치를 들고 집으로 갔다.
"조금만 더 하면 정말 좋은 책이 될 것 같은데.......그래서 이번엔 제가 좀 거들어 드릴게요."
서촌, 통의동 우리 가게 안에서 낸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아쉬운 게 많았단다. 프롤로그를 읽고서 신선했단다. 하루키처럼 재즈바를 운영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그랬고, 낡고 오래된 골목길 한쪽에 자리 잡고 3년이란 시간을 버텨온 것도 그랬다고 한다. 그것이 그녀가 원고를 가져간 이유다.
'모든 책에는 고유한 운명이 있다. 읽어주는 자의 능력에 따라서.......'
이 한 권의 책은 또 어떤 운명을 맞이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벌써부터 그 운명이 궁금해진다.
"아무튼 너무 고마워. 혜숙씨! 책도 책이지만, 빨리 좋은 사람 만나서 보름달 소원도 같이 빌고 그랬으면 좋겠다."
달빛에 물든 서촌의 밤, 어젠 정말 달이 크고 무척이나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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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 다큐멘터리 PD
작가의 책들, 시계방향으로 <그리스의 시간을 걷다> (책세상, 2012년), <세상은 모두 다큐멘터리였다> (당대, 2011년), <유레일 루트 디자인> (오프하우스, 2010년), '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 (다큐스토리,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