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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틀릴 수도 있을 거라는 믿음'

'김PD의 인문학 여행'(32)

by 김덕영

나는 인문학, 그것도 철학을 전공했다. "철학과에 입학하겠습니다"라는 이 한마디가 부모님께는 '운명 철학관을 차리겠습니다'라는 말과 동급으로 들렸던 시절이었다. 결사반대라는 피켓이라도 있었으면 아마 며칠을 방문 앞에서 들고 계실 분위기였다. 오죽했으면 그런 냉랭한 집안 분위기가 싫어서 대학 원서 접수를 며칠 앞두고 친구 집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있다가 귀가를 했던 적도 있다. 일종의 저항이었다. 그건 '내 인생은 내가 살겠다'는 결사항쟁의 각오 같은 거였다. 부디 그런 내 앞길을 가로막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항의 시위였다. 늘 그렇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그게 단지 장난감 고르기에서 직업이나 결혼 같은 조금 난이를 달리할 뿐이다. 결국 난 그렇게 저항에 성공했다. 철학과 입학에 성공한 것이다. 그땐 그랬다. 1984년 2월 겨울의 이야기다.


미리 고백하지만 철학과에 입학해서 나는 그다지 공부엔 관심이 없었다. 그냥 남들처럼 노는 게 좋았고, 그게 아니면 선배들과 함께 정치경제학이나 사회구성체 논쟁 같은 것에 참여하는 것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시절엔 그렇게들 대학 신입생의 낭만과 특권을 누리며 자유롭게 살았다. 나의 경우엔 정도가 조금 심했는데, 그건 그 당시 내가 학교로부터 받은 5장의 '학사 경고장'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한 학기에 두 장씩 꼬박꼬박 두 학기 반을 받았다. 참고로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는 성적표가 한 학기에 두 장씩 나왔다. 어쨌든 그 정도면 아마 퇴학을 받아도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이전 학기 성적보다 0.1포인트라도 오른 경우에는 형의 집행(?)이 유예되는 예외 조항 덕분에 다행히도 비극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 예외조항이 나를 구제해준 것이다. 역시 예외 없는 법은 없다.


그런데 도대체 철학과에 입학하겠다고 그 난리를 펴놓고, 대학 1년을 내리 학사경고를 받은 그 당시의 일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나도 그것에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일종의 미스터리다. 집에서 데모까지 해가면서 시작한 공부인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서는 그것과 담을 쌓고 살았으니 당시 부모님 심정이 오죽했을까. 또 그런 부모님을 매일 바라봐야 하는 내 입장은 또 어땠겠고. 하지만 인생이란 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가끔씩 벌어져서 재밌는 것이기도 하다. 그 모순된 시기에 대한 질문은 나에겐 언젠간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것으로 남겨져 있었다. 오늘은 그 숙제를 좀 풀어보려고 한다.


'5장의 학사 경고장'


사실 연거푸 5장의 학사 경고장을 받았던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도 가물가물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단서 같은 것이 남아 있을 리도 없다. 생존자의 증언을 어쩌니저쩌니 할 일도 물론 아니다. 이건 어쨌거나 그 학사 경고장에서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학사 경고란 성적이 많이 모자라서 받는 것이고, 결국 시험 성적이 엉망이었다는 뜻이다.


많이 틀린 사람은 아주 소심한 자가 되거나 아니면 조금은 틀리는 것에 대해 관조적이 된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많이 틀리면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돌이켜 보면 5장의 붉은 도장이 찍혀 있던 학사 경고장 덕분에 나는 좀 더 내가 사는 세상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얻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틀리면 안 된다'라는 신념을 갖고 세상을 사는 것보다는 조금 느슨하고 널널하고 또 그래서 자유롭다. 그 모든 시작에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그건 단지 시험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와 만나 사랑을 나눌 때도 그랬고,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도 그랬으며, 한 아이의 아버지로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늘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내 삶의 줄기였다.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학사 경고장을 4장쯤 받았을 때 일이다. 봄이 되면서 새로운 신입생들이 학교에 들어왔다. 후배들이 생긴 것이다. 그때 나는 대학 방송반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세상을 좀 더 재밌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선택한 동아리였다. 당시엔 오디오 방송이라서 녹음기를 들고 1년 내내 취재를 다녔던 기억이 난다. 방송반에 있다 보니 학교의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일도 많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한 남자가 떠오른다. 검은 안경테, 곱습머리, 오이를 닮은 길쭉한 얼굴형의 남자. 그에 대한 기억은 대충 그렇다.


신입생 수백 명이 한꺼번에 참여하는 제법 큰 행사다 보니 행사 당일, 교정 곳곳엔 관광버스들로 가득했다. 목적지는 수안보, 가는 곳까지는 대략 3시간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버스 안에는 내가 속한 방송반을 비롯해서 합창반과 노래 동아리 몇몇이 함께 동승했다. 검은테 안경을 쓴 곱슬머리 남자를 처음 본 것은 그때였다. 버스 앞쪽 창가에 자리를 잡고 묵묵히 스쳐가는 창밖 경치를 바라보고 있던 모습. 삼삼오오 짝을 이뤄 이야기 꽃을 피울 때도, 점심으로 제공된 도시락을 먹을 때도 그는 묵묵하게 혼자 모습 그대로였다.


3박 4일의 일정 동안 그 '검은테 곱슬머리'는 숙소도 같은 곳을 사용했다. 공연과 방송으로 같은 방을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 함께 같은 공간에 모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래도 아침이 되면 부스스한 모습으로 이부자리를 걷어올리던 '검은테 곱슬머리'. 처음 봤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마치 세상의 마지막 땅끝이라도 온 사람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는 우리들과 어울려 사흘 밤을 보냈다. 나의 시선 속에 그는 늘 합창반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고, 쉬는 시간이면 통기타를 치면서 같이 유행가를 불렀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연히 나는 그가 합창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버스 안. 그 '검은테 곱슬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하얀 수증기를 내뿜으며 시동이 걸린 버스들 사이로 얼핏 그의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착각일 수도 있고. 버스가 출발을 하고 나서 합창반 선배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외쳤다.


"잠깐만요! 한 사람이 안 탄 것 같은데..."


버스 기사가 백미러로 자리에서 일어선 선배의 모습을 신경질적으로 바라봤다.


"누가 안 탔어요?!"


선배는 머릿수를 세 보면서 합창반 단원들의 인원수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우리 방송반 선배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원수를 셌다.


"이상하다. 우리는 다 탔는데..."


"그런데 여기 한 자리가 비었는데..."


분명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버스 안에 빈자리가 없었다. 당연히 돌아갈 때도 빈자리가 없어야 맞다. 빈자리가 있다는 건 누군가 버스를 안 탔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수안보에 버려두고 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버스 안에 탄 행사 참가자 인원수가 정확히 맞다는 것이다. 몇 번을 다시 세봐도 인원수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안 탄 거지? 저 빈자리는 뭐고...


순간 나의 머릿속에 그 '검은테 곱슬머리'가 떠올랐다.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검은테 곱슬머리 선배가 안 보여요!"


"누구?"


"아니 그 얼굴 길쭉하고 검은색 안경테 쓴 곱슬머리 형 말이에요."


"걔 방송반 애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너네 합창반 애 아니었어?!"


"미치겠다. 난 노래동아리 앤 줄 알았는데..."


"그럼 도대체 걘 누구였어......?"


기억을 하나로 정리해 보면 이렇다. 3박 4일 동안 합창반, 방송반, 노래 동아리가 같이 합숙을 했다. 같이 밥 먹고 자고 샤워하고 노래하고 그랬다. 늘 그 한가운데 '검은테 곱슬머리'가 있었다. 방송반 입장에서는 그 '검은테 곱슬머리'가 합창반과 같이 노래도 하고 밥도 같이 먹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저 사람은 합창반 사람이구나', 반면에 합창반 사람들은 그 '검은테 곱슬머리'가 방송반 행사 때 마이크 치우는 걸 도와주는 걸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쟨 방송반 애구나', 통기타를 잡고 숙소 구석에서 노래를 하는 모습을 본 합창반과 방송반 사람들은 동시에 '아. 노래 동아리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다. 결국 그 '검은테 곱슬머리'는 모두의 아무도 아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때 누군가 '당신은 누구세요?'라고 직접 물어봤다면 금방 신원이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가 누구일 거라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냥 '저 사람이랑 같이 있으니까, 저 사람과 같은 멤버겠지'라는 막연한 추측에 머물렀다. 추측이나 가정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오해와 오판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검은테 곱슬머리'의 사례는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겠지만, 추측이나 가정만으로 사람과 사물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1985년 봄, '검은테 곱슬머리'에 대한 기억은 대충 그렇다. 나는 그를 통해서 안다는 것, 확신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얻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무엇은 정말 확실한 것일까, 무언가 안다는 것이 곧 올바른 일이라는 것을 보증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아무튼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검은테 곱슬머리'의 신비는 나에게 내가 안다는 것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가 되어 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틀릴 수도 있을 거라는 믿음'


스무 살의 앳된 청년에서 쉰 살을 넘긴 중년에 이를 때까지 늘 그 붉은 도장이 찍혀 있던 학사 경고장에서 자유로와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내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다음부터 조금씩 그 비밀과 마주설 용기가 생겼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비밀의 서랍을 갖고 있다. 때론 그 비밀 서랍을 꺼내서 아무 생각 없이 넣어두었던 잡동사니들과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어차피 비밀 서랍 안의 잡동사니 하나하나에도 내 무의식의 지문이 묻어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내가 틀릴 수도 있을 거라는 믿음'에 가까이 다가갔다.


어느 유명한 사상가가 한 말도 아니다. 그냥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이 그렇게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아마도 머리보단 가슴께 어느 구석에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았다. 난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내가 틀릴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의 경우 글을 쓸 때 검색창이 수십 개가 열린다. 하나하나 뭐든 일일이 확인하지 않으면 단 한 줄도 쓰기가 겁난다. 그래서 의심이 가는 부분은 일일이 검색창을 열어 사실관계 확인을 하고 나서야 마음이 편하다. 어떤 때는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던 적도 있다. 어찌 보면 나의 경우엔 좀 집착이 심한 경우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살면서 늘 그런 건 아니다. 단지 글을 쓸 때만 그렇다.


그런데 이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말이다. '뭐가 좋으냐'라고 묻는다면...... 글쎄......

어찌 보면 '넌 참 소심하구나', 하고 핀잔 듣기 딱 좋은 말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좋은 점도 있다. 적어도 '내가 틀릴 수도 있다'라는 생각 덕분에 난 지금껏 거짓된 인생을 살진 않은 것 같다.


글: 김덕영




자신의 스토리와 콘텐츠로 단골을 만들어라! '왜 레드오션,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하는가?' 인적도 드문 서촌 골목길에서 3년을 살아남은 한 까페 이야기.


나이 들었다고 인생을 포기할 순 없다. 오히려 그때부터 재밌는 인생이 시작된다. 그렇게 멋진 인생을 살다간 30명의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부제: 뒤늦게 발동걸린 사랑이야기. 가슴 절절한 중년들의 사랑이야기. '당신은 지금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뭔가 특별한 인생, 재밌는 일상을 같이 공유하길 원하는 분은 언제든 서촌의 골목길로 발걸음을 한 번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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