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오래된 돌무더기 속에서 발견한 '시간'에 대한 독특한 해석
'김PD의 인문학 여행' (33)
평소 나는 '개념'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여기서 개념이란 일차적으로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뜻하는 말이다. 이럴 때는 보통 우리가 쓰는 단어라는 말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의미로 개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철학적인 의미로는 현상을 경험하면서 얻은 관념들 사이에서 뭔가 핵심적인 것을 뽑아내서 얻어낸 응축물 같은 것들이다. 핵심에서 추출된 것이기에 그렇게 얻어진 개념들은 그 적용 범위가 매우 넓다. 보편성을 얻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2011년에 내가 쓴 <그리스의 시간을 걷다> (책세상)란 책의 경우에는 원래 제목이 '개념의 여행'이었다. 얼마나 개념을 붙들고 여행을 다니고 싶었으면 그런 제목까지 지었을까. 지금 생각해봐도 좀 안쓰럽고 우습다. 당시 출판사에서 크게 반대만 하지 않았어도 아마 그 책의 제목은 '개념의 여행'으로 그냥 나갔을 것이다. 아쉽지만 그때는 출판사 편집장과 다투면서까지 내 생각을 고집할 정도로 확실한 자신감 같은 게 없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개념에 주목하게 된 것은 단지 사변적인 목적보다는 현실적인 요구도 존재한다. 다큐멘터리를 하며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시절, 나는 한 가지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개념'이었다. 우리의 생활공간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개념들에게도 국적이 존재한다는, 뭐 조금은 치기 어린 호기심에서 얻은 결론이랄까.
그런데 사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단지 우리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회피하고 있던 사실이다. 과연 우리가 만들어 세상에 수출한 개념이 얼마나 있을까? 무역으로 치자면 수출보다 수입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문명이란 게 어차피 돌고 도는 거라지만, 그대로 압도적으로 수입을 하는 나라와 과감하게 수출하는 나라의 운명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 아무도 개념을 수출하지 못하는 나라에 살면서도 그걸 문제 삼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나의 고대 그리스 여행이 애초에 '개념의 여행'이란 제목으로 출발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각설하고 오늘 주제인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우리와 다른 시간의 개념이 존재했다. 어쩌면 그런 독특한 시간에 대한 해석 덕분에 고대 그리스 문명이 자신들의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독창적인 시간에 대한 개념 덕분에 지혜와 용기로 무장한 전사와 철학자들의 도시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내 호기심은 이 둘 사이 중간쯤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그당시 고대 그리스의 돌덩이를 여행하면서 얻은 시간에 대한 그들만의 해석을 나는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와 달랐던 그들만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
애초부터 시공간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정의는 남달랐다. 과거를 떠올릴 때, 우리는 보통 등 뒤로 멀리 사라져 가는 어떤 것으로 과거를 생각한다. 반대로 미래는 우리가 서 있는 지금 현재의 위치 앞으로, 우리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과거와 미래에 대한 개념은 우리와 정반대다.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다. 그들은 과거란 ‘우리의 눈 앞에서 멀어져 가는 어떤 것’이라고 여겼다. 미래는 ‘등 뒤쪽에서 다가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는 정반대였다.
잠시 눈을 감고 그들의 생각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지금 당신의 눈 앞에는 작별의 아쉬움을 나누는 두 사람의 연인이 있다. 그들 앞으로 기차가 도착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태우고 갈 기차다. 곧이어 서서히 바퀴가 움직이고, 기차는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철길 저편으로 점점 멀어져 간다. 사랑하는 연인을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기차를 바라보는 듯한 심정, 그런 심정으로 그들은 과거를 바라보려고 했다. 그들에게 과거란 등 뒤로 사라져 버리는 어떤 것이 아니다.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눈 앞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다.
미래를 생각할 때도 생각의 방식은 우리와 정반대다. 우리가 미래를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등 뒤에서 다가오는 존재로 생각했다. 등 뒤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아예 미래가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미래는 어차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합리적이었다.
이렇게 시공간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개념을 현실의 삶에 적용시켜 보면 의외로 재미난 부분이 많다. 우선 과거를 살펴보자. 사실 과거는 이미 우리가 체험한 순간이기에 우리가 모를 리 없다. 애써 잊고 싶어도 쉽게 잊히지 않는 것들이 과거에 우리가 경험한 것들이다. 좋았던 것은 오래 간직하고 싶지만, 살다 보면 좋았던 기억들보다는 안 좋았던 기억과 경험들이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두뇌라는 것은 참 묘해서 과거를 잊고 싶어서 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것이 기억의 패러독스다. 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자체가 이미 기억을 자극하는 일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시달리는 우울증이나 불면증은 대부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아픈 것을 기억하면 기억할수록 기억은 더욱 또렷해지고 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하면서 점점 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다면 비극적인 삶에 유달리 의연하게 적응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무엇이 달랐을까? 시간에 대한 개념, 시간을 인식하는 사고방식의 차이 하나로 많은 것이 변하게 된다. 그들에게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과거란 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기억의 파노라마다. 멀리 있는 것은 그만큼 잘 안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은 그만큼 더 잘 보이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과거를 규정했을 때, 과거는 더 이상 회피하고 싶은 대상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결말로 기억된 것일지라도, 그들에게는 영원히 눈 앞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과거와 마주했다. 자신들이 원한다면 언제나 과거로 눈을 돌려 기억의 서랍 속에서 꺼낼 수 있는 것들이다. 때로는 그 과거의 기억을 벗 삼아 오늘을 사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미래에 대한 생각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미래를 그저 흐르는 강물처럼 언젠가는 우리 앞에 다가와 흘러가 버리는 시간이라 믿고 있다. 이럴 때의 미래는 그저 기다림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미래는 정확히 등 뒤에서 밀려온다. 알 수도 없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는 환상도 갖지 않는다. 어차피 미래는 전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미래는 등 뒤에서 자신의 삶을 힘차게 밀어주는 원동력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미래를 등 뒤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밀어주는 어떤 힘으로 믿고 의지했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삶의 지혜였다. 어쩌면 그런 독특한 인생관이 있었기에, 그들은 죽음이나 비극적인 운명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것이 전쟁터에 나가서 '방패 위에 실려 돌아오라'며 아들을 독려했던 고대 그리스 어머니들의 숭고한 자식과 국가에 대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개념이 사회에 주는 울림과 역할은 이렇게 막대하다. 개념을 부여잡고 여행이라도 다니면서 일일이 그 근원을 확인하고 싶었던 그 시절의 애틋함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쨌든 개념이 있는 나라가 세상을 지배하고 문명의 리더가 된다는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개념을 만들어서 수출했을까. 무엇이든지 녹여버릴 듯한 기세로 불타오르는 거대한 사회적 용광로 속에서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개념은 과연 무엇일까. 그 무엇도 뚫을 수 없을 강철일까, 한 줌 잿빛 먼지일까. 그 속에 우리의 미래가 담겨 있다 말해도 그리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 같다.
글: 김덕영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뭔가 특별한 인생, 재밌는 일상을 같이 공유하길 원하는 분은 언제든 서촌의 골목길로 발걸음을 한 번 옮겨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