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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무작정 떠난 여행이 두 번 있다

'김PD의 인문학 여행' (31)

by 김덕영


'난 무작정 떠난 여행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평생토록 15,000점의 작품을 썼다는 일본의 괴물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인물을 취재하기 위해서 일본 기타규슈 지역의 고쿠라라는 작은 도시를 찾았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 그리스의 돌무더기 유적지를 여행했을 때의 일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고쿠라'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우선 '무작정'이라는 개념이 계획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곳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거나 '그곳에 갈까?'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부터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의 시간이 아주 짧다는 뜻이다.


여행가방을 싸고 비행기 표를 들고 어느새 창문 너머로 펼쳐진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들 사이로 날아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건 마치 순간이동을 경험하는 착각도 든다. 무작정이란 그렇게 무언가를 어떻게 하리라 마음 정한 것 없이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몸이 먼저 움직인다. 지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삶의 한 방식이다. 머리를 많이 굴리거나 생각을 오래 한다고 답이 발 밑에 툭하고 떨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아무튼...무엇이 그토록 나를 고대 그리스의 돌무더기 땅으로 이끌었을까? 사실 우연히 발견한 한 마디의

문장 때문이었다.


“전쟁터에 나가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아들아! 방패를 들고 돌아오거라. 만일 그럴 수 없다면, 방패 위에 실려 오거라…”


이디스 해밀턴의 <고대 그리스인의 생각과 힘> 중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과연 세상 어떤 어미가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면서 이런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차라리 '죽어서 돌아오라는 말'이 조금은 덜 비감하게 느껴진다. 영화 <300>의 소재가 되는 테르모필레 전투를 비롯해서 BC 5세기경 고대 그리스 땅에는 피를 부르는 무수히 많은 전투가 있었다. 대부분이 침략자 페르시아를 방어하는 전투였기에 어떤 면에서 보면 전쟁에 관한 우리네 정서와 비슷한 구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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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방패를 들고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말에 담긴 비장함 때문에 며칠을 잠 못 이뤘다. 그 어머니의 감춰진 눈물, 그래도 다행히 기어코 승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의 죽음과 삶의 경계를 지켜줬던 핏자국이 선연한 방패를 닦아주었던 어머니의 심정이 가슴으로 전해졌다.


살아 돌아온 자가 있으면 그렇지 못한 자도 있는 법. 불행히도 삶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고만 전사의 유해가 실린 빛나는 방패, 어미의 말은 예언이 되었고, 어디선가 그 방패 위에 실린 아들의 주검을 바라보고 있을 여인의 심정이 가슴 저리게 느껴졌다.


무작정 고대 그리스의 유적지로 발걸음을 옮긴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어떤 정신의 소유자들이 살았던 세상인지 두 군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나의 고대 그리스 돌무더기 무작정 여행은 '방패' 때문이었다.


그렇게 고대 그리스를 한 달 동안 미친 듯이 달렸다. 남들이 가는 관광지엔 발걸음조차 딛지 않고 오로지 덩그러니 황무지 위에 남겨진 고대 그리스의 유적지들만 찾아다녔다. 남은 건 돌무더기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 돌덩이에 손을 대고 수 천 년 전 고대 그리스인들의 온기를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러다 며칠 전 우연히 ‘방패’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자기희생을 통해 공동체의 운명을 개척해야 했던 비장함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방패, 아스피스에는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내가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정신이었다.


기계화된 전투 기술이 발달하기 전, 그러니까 전사와 전사, 군단 대 군단이 칼과 창으로 전투를 벌이던 고전적인 전쟁사에서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는 매우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이 촘춤히 밀집대형을 이루면서 적과 근접전을 벌이는 전투 방식으로써,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대열을 맞춰 전진하므로 방패를 든 전사는 자신의 몸을 옆에 있는 동료의 방패에 의지하게 된다.


방패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내 옆의 동료를 보호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가 전투에서 투구나 가슴받이를 잃어버린 전사는 용서를 했지만, 방패를 잃어버린 전사에게는 시민권 박탈이란 엄벌을 내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작정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 하긴 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일 년에 여행 한 번 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이번엔 꼭 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 '무작정 여행', 그 세 번째가 어디가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세 번째에는 또 어떤 바람이 불어올까...


글: 김덕영



하루키에겐피터캣(표지).jpg 자신의 스토리와 콘텐츠로 단골을 만들어라! '왜 레드오션,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하는가?' 인적도 드문 서촌 골목길에서 3년을 살아남은 한 까페 이야기.


뒤늦게 표지.jpg 나이 들었다고 인생을 포기할 순 없다. 오히려 그때부터 재밌는 인생이 시작된다. 그렇게 멋진 인생을 살다간 30명의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내가 그리로 갈게 표지1.jpg 부제: 뒤늦게 발동걸린 사랑이야기. 가슴 절절한 중년들의 사랑이야기. '당신은 지금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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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뭔가 특별한 인생, 재밌는 일상을 같이 공유하길 원하는 분은 언제든 서촌의 골목길로 발걸음을 한 번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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