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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생 Oct 30. 2022

기후변화 2

 기후 변화에 대해 사실 나는 말할 자격이 없다. 이율배반이나 모순, 가식 같은 말로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텀블러를 씻기 귀찮은 날엔 커피를 사서 출근하기도 하고 플라스틱 일회용품이 잔뜩 나올 것을 알면서도 배달음식을 시키기도 한다. 플라스틱 컵에 담긴 커피를 조금씩 나눠 마시던 엄마의 낙은 캔음료로 바꾸라는 내 잔소리에 중단되었지만 정작 내가 버리는 일회용품의 양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자신의 생활을 철저하게 제한하는 이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나 같은 사람이 감히 기후 변화에 대해 말을 해도 되나, 자격에 대한 의문이 없을 수 없다. 그렇지만 기후 변화는 이제 특별한 의식을 가진 일부만 논의할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닌 것 같다. 모든 곳에서 누구라도 이야기해야 하는 당면한 과제인 것 같다.

 현대 인간의 삶은 대다수 지구 생물과 인간 존속에 너무도 해로워졌다. 우리는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해를 끼친다. 하다 못해 잠을 자는 순간에도 냉장고는 나를 위해 돌아가고 있다. 발전은 편의를 만들고 편의는 쉽게 일상에 스며 그것이 없던 때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예를 들어 온라인 쇼핑은 내가 어릴 적 없던 것이었지만 지금은 일상이 되었고, 여러 이점으로 자주 이용하게 된다. 없던 시절이 있었지만 없어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짐작 가능한 불편보다 짐작조차 못했던 불편이 더 많을 것이다. 온라인 쇼핑을 하면 나는 종이 박스를 받는다. 비닐을 받을 때도 있고 스티로폼 박스를 받을 때도 있다. 현관 앞에 놓인 종이 박스는 하루 이틀 전까지 새것이었다. 운송장과 테이프를 붙인 채 우리 집에 올 때까지만 해도 대개는 아주 멀쩡하다. 집으로 들여와 테이프를 뜯고 내용물을 꺼내면 박스는 더 이상 역할이 없다. 테이프와 송장 등을 떼어낸 박스는 다 헐어 분리수거 함에 놓인다. 때때로 플라스틱이나 캔 등 재활용품을 버릴 때 담아가는 용도로 한 번 더 쓰이는 게 고작이다. 박스의 정확한 제조과정은 잘 모르지만 두 종이 사이 완충을 위한 골판지가 들어있고 쉽게 접히도록 선을 넣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두툼한 새 박스가 한 번의 사용으로 생을 다 한 모습을 볼 때면 온당하지 못하다는 기분이 든다. 종이는 비교적 재활용이 잘 되는 품목이라지만 그렇다 해도 새 박스가 아무 거리낌 없이 며칠 만에 버려져야 하는 것일까? 만들고 소비하고 버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염을 무마하기 위해 드는 비용이 박스 가격보다 비싸지는 않을까? 많은 생각들이 들어도 나는 여전히 온라인 쇼핑을 자주 이용한다. 도보로 장을 보는 내겐 무게가 중요한 고려 요소이고 생필품의 경우 온라인이 더 저렴한 경우가 많다. 가격차이가 크지 않다면 오프라인이나 적어도 직배송해주는 곳을 선택해 포장재를 줄이자 마음을 먹지만 편의와 비용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내 소비는 조금 달라졌다. 냉동식품 주문을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주문 전에 내가 버려야 할 새 스티로폼 박스를 떠올린다. 그것은 망설임으로 이어지고 그러다 주문을 하기도, 미루기도, 포기하기도 한다.

 이것이 꼭 좋은 방법은 아닐 수 있다. 온라인 쇼핑은 이미 산업이 되어 온라인 몰, 택배, 포장재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비중이 적지 않다. 오프라인에 물건이 입고되고 구매를 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는지, 온라인에는 없을 어떤 요소들이 있는지도 나는 잘 모른다. 환경을 위해 무엇이 어떻게 어느 만큼 나은지 가늠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작은 종이컵을 사용하는 것이 컵을 사용하는 것에 비해 얼마나 나은지 수치화하는 것은 전문가에게도 어렵고 복잡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종이컵 대신 일반 컵을 사용한다면 컵이 만들어져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은 미뤄둔다 해도 설거지를 위해 사용한 세제가 끼치는 영향이 종이컵에 비해 얼마나 나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 말이다. 세제 역시 만들어 운반하고 온라인이나 마트에서 구입한다. 세제는 플라스틱에 담겨있다. 단지 세제가 발생시키는 수질오염이 전부는 아니다. 물 역시 소독이 필요하다. 어릴 시절 양치를 할 때 물을 틀어놓고 있다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일상적인 잔소리가 유독 기억에 남았던 것은 엄마가 안타까워하는 것이 수도 요금인지 낭비되는 물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물은 자정작용을 한다는데 내가 발생시킨 더러운 물의 오염도를 낮추는 게 환경에 더 나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자정작용이 되지 않을 만큼 오염되느니 (부모님이)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물을 흘려보내는 게 대의를 위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과연 물은 아껴 써야 하는 것일까? 물론 생각만 했다. 엄마의 교육 속에 물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습관은 들였지만 궁금증은 흘러가지 않았다. 서른이 넘어서야 자정작용은 미생물이 하는 일이고 수돗물은 소독되어 있기 때문에 원하는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생물은 다시 증식할 테고 희석 역시 자정작용을 돕지만 소독 약품을 만들고 처리하는 과정 등 역시 존재한다. 결국은 밸런스의 문제인데 가장 좋은 그 지점을 알아내기는 어렵다고 했다.

 세계는 너무나 복잡하다. 환경도 너무나 복잡하다. 내가 쉽게 영위하는 생활 뒤에는 많은 것이 얽혀있다. 기후 위기를 걱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플라스틱을 거의 원흉쯤으로 생각하게 되었지만 싸고 가공하기 쉬운 이 플라스틱이란 소재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겐 아직도 계급이 존재할지 모른다. 아크릴 대신 유리를 사용하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모든 물건들이 나무나 쇠 등의 재료로 만들어졌다면 흔히 사용하는 물건들을 흔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까? 애초부터 지금과 같은 물질문명을 이루지 못했겠지만 편의를 위한 많은 물건들은 일부 계층만을 위한 특권이 됐을 것이다. 썩지 않고 가볍고 물 세척이 가능한 플라스틱의 이점을 갖지 못한 물건들은 관리가 까다로워 손이 많이 갈 테고 그럴수록 노예를 놓아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주사기를 대량으로 만들어 위생과 안전을 확보할 수 있게 해 준 것도 플라스틱이다. 원흉으로만 지적되기에 플라스틱은 인류의 삶에 큰 역할을 한 꽤 좋은 소재이다. 그저 우리가 어디까지 사용해야 하는지 적정선을 잘 모르고 의존했을 뿐이다. 

 복잡한 것은 어렵다.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을 자주 만든다. 무분별한 플라스틱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려 하면서도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미세 플라스틱을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었다. 형태가 유지되지 않고 흐느적거리는 옷에 플라스틱이 들어있을 줄이야. 비슷한 맥락에서 농업이 환경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정말 충격이었다. 자연을 기반으로 식물을 재배하는 농업이 그렇게나 자연친화적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대량 생산을 위해 기계를 사용하고 농약을 치는 정도, 상품성을 위해 비닐을 씌우는 정도의 해 말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수확량을 위해 논 밭을 갈아엎는 일이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킬 줄은 몰랐다. 충분히 먹을 수 있지만 사람들이 선호하는 모양이나 크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산지에서 갈아 엎어지는 농작물을 보면 그저 아까웠고 보는 사람보다 더 속상할 농부의 마음만 떠올렸지 썩으며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화학 비료와 제철이 아닌 것을 위한 냉난방 등. 막연히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것에도 염두하지 않은 이면이 있었다.

 세상은 정말 복잡하고 무엇이 옳은지 구분하기도 어렵다. 기껏 분리배출을 했지만 딱지 모양으로 접은 비닐, 플라스틱 병뚜껑, 변색된 스티로폼은 재활용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뒤늦게 허탈했던 적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 배출해야 하는지 좀처럼 알 수 없는 복합재질도 많이 있다. 모든 것을 알아보고 확인하기엔 바쁘고 피로하다. 나는 게으르고, 편한 것이 좋다. 그래서 나는 남에게 책임을 돌리기로 했다. 환경은 기업이 생각해야 한다고. 나는 그저 내 생활과 소비를 결정할 때 하나의 기준만 더 두기로 했다. 환경에 끼치는 영향이 어떠한가. 그간 디자인이나 성능, 취향, 가격 등을 고려해 소비했다면 거기에 하나만 더했다. 이 소비 후 버려질 쓰레기의 종류와 양, 그리고 포장의 정당성. 그것이 늘 환경에 유리한 선택만을 하겠다는 다짐은 아니다. 그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인지하려는 노력이다. 잘못된 분리배출처럼 틀릴 수도 있고 내 이득을 위해 환경에 해가 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 고려의 한 요소로는 설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필 특가 세일까지 하는 계란의 뚜껑이 플라스틱이면 급여일에 따라 종이로 포장된 계란을 슬쩍 내려놓기도 하지만 적어도 내가 사려는 물건 포장의 미래를 예상하고 큰 차이가 아니라면 더 나은 것을 선택한다. 이것은 매우 안일한 방법이고 고작 이 정도로는 아무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고려 요소 하나가 더 생긴 것만으로도 나는 그 이전에 비해 환경에 덜 해로워졌다. 대나무로 만든 칫솔과 플라스틱 재질에 담지 않아도 되는 고체 치약을 꾸준히 사용하게 되었다. 몇 가지를 사용해봐도 내게 맞지 않았던 린스는 다시 플라스틱 통에 담긴 액체형으로 돌아갔지만 샴푸와 바디워시, 폼 클렌저는 고체를 사용한다. 매번 용기를 가지고 다니지는 않지만 두부를 사야 한다는 목적이 분명한 경우에는 크기가 맞는 그릇을 가지고 나간다. 비닐이 씌워져 있지 않은 호박을 사기 위해 시장을 더 돌기도 하고 재사용이 가능하다고 하면 양해를 구한 뒤 포장재를 반납하고 바나나만 가져오기도 한다. 선택지가 있다면 빨대가 없거나 종이 빨대가 붙어있는 두유를 고르고 플라스틱 컵에 담겨 있는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땐 컵을 하나 버릴 만큼 마시고 싶은지 자문한다. 철저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선택하던 것은 줄었고 대체제를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해서 내가 줄인 플라스틱이 환경에 큰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일 년을 애써 모아봐야 어지간한 아파트 단지에서 설이나 추석 하루에 배출하는 양보다 적을 것이다.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합심해서 줄인다면 의미 있는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책임을 기업에 넘겨야 한다. 개인이 하기에는 어려운 영역이다. 우리는 그저 물건을 구입할 때 한 가지 요소만 더 고려하면 된다. 그리고 불평하면 된다. 지금도 기업은 소비자 요구에 맞춰 종이 빨대를 사용하고 불필요한 플라스틱 포장을 줄이기도 한다. 모든 소비자들이 가격 경쟁력만큼이나 환경 경쟁력을 따진다면 기업은 우리가 요구하지 않아도 앞다투어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그저 지켜만 보면 된다. 포장재를 줄이고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기업들의 노력을 독려하면 된다. 노력하지 않는 기업을 도태시키면 된다. 환경이 기업의 마케팅 포인트 중 큰 요소가 되게 만든다면 우리는 애써 요구하지 않아도 환경에 덜 해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리고 기업들이 제품 및 패키지의 분리배출 방식을 의무적으로 고지해줬으면 좋겠다. 쓸모없는 것을 잘못 배출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선별에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 애써 분리해놓은 것들이 쓰레기가 된다는 이야기는 마음이 아프니까. 에너지 소비 효율 등급이나 영양성분 표처럼 환경 유해도에 따라 점수를 매겨 포장에 적어놓는다면 더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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