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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생 Oct 30. 2022

기후변화 1

 한 장의 사진이 인류에게 큰 영감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면 보이저호가 보내온 지구 사진이 그렇다. 1990년 밸런타인데이에 받아든 '창백한 푸른 점'은 인간들에게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지구의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 20~30년 전 달에서 찍은 크고 선명한 지구 사진이 있었다. 달에서 찍은 지구 사진은 우리가 살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음에도 아름다웠다. 생명체에게 물은 근원이고 우리의 물, 바다는 푸른색이기 때문에 푸른 지구가 우리의 눈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해도 적어도 인류의 보편적 관점에서 심미적 만족을 주는 사진이었다.(파란 사막 행성에 사는 외계인은 지구 사진을 보며 황폐하다고 느낄까?) 반면에 보이저가 찍어온 사진은 달랐다. 검은 배경에 잘못 들어간 것 같은 빛줄기들이 있고 지구인지 먼지인지 알 수 없는 점이 찍혀있다. 누가 찍었는지(보이저 1호) 구도고 뭐고 아무 생각 없이 찍은 게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 내 사진을 그렇게 찍는다면 나를 지독히 싫어하는 사람이라 판단하여 멀리하거나 그런 의도가 아님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 가서 사진은 찍지 말라고 애정 어린 조언을 할 것이다. NASA는 저 사진을 마지막으로 보이저 1호의 카메라를 꺼버렸다. 동의한다. 카메라를 빼앗아가기 마땅한 사진이었다. 가지러 가기엔 보이저가 이미 너무 멀리 가 있었으니 꺼버렸으리라. 물론 카메라를 끈 것에 대한 NASA의 공식 발표는 사진 실력이 아닌 보이저 1호의 에너지 절약이었다.

 보이저 1호가 찍어온 사진은 정말 보잘것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칼 세이건의 의도였을 것이다. 수많은 반대와 높은 실패 위험에도 보이저 1호의 카메라를 돌려 지구 사진을 찍자고 주장한 칼 세이건 역시 아주 운이 좋아 사진이 제대로 찍힌다면 먼지처럼 보일 거란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거대하고 온갖 아귀다툼이 일어나는 지구가 한 발짝만 물러나면(61억 킬로미터) 얼마나 작은 먼지에 불과한지, 우주는 얼마나 넓고 광활한지, 그 차이를 감각하고 인정한다면 인류가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했던 것 같다. 한 장의 사진은 아름답게도 충분한 역할을 했다. 

 몇 해 전부터 대형마트 포장대에서 박스 테이프와 노끈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마트까지 걸어가는 나로서는 애초에 장바구니나 종량제 봉투에 담아올 정도의 양만 구입하기 때문에 피부에 와닿지 않는 일이었다. 다만 테이프 붙은 박스의 재활용이 어렵다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 박스를 버릴 때마다 가능한 모든 테이프를 제거하는 습관이 생긴 정도가 달라진 점이었다. 때문에 박스 테이프와 노끈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기사로 접했을 땐 좋은 정책이고 조금 불편하겠지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박스를 사용하지 않는 나의 생각이고 이해당사자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기사에서부터 불편을 우려하는 논조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 생각이 궁금해 댓글을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많은 이들의 생각 역시 비슷했다. 주로 불편을 우려했고 탁상행정이라 비판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비슷한 기사들을 더 찾아봤지만 댓글은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자주 가는 소규모 커뮤니티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찬성하는 사람이 없진 않았지만 시민들의 불편이 너무 크다는 의견과 장을 본 적 없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정책이라는 의견이 더 컸다.

 몇 달이 지나 다시 비슷한 기사가 나왔다. 기사의 논조는 여전히 가중될 불편에 대한 우려였다. 나는 다시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했다. 그러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의외로 이번에는 사람들 의견이 달라져 있었다. 물론 이 주제의 기사를 가지고 정량적으로나 정성적으로 분석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주 단편적이고 주관적이겠지만 느끼기에 정말로 여론이 달라져 있었다. 정책에 대한 찬성이 대부분이었다. 불편을 토로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기사에 동의하지 않고 불편을 감수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예전에 반대하던 사람들의 비율만큼 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후로 예전과 같은 반대의견이 줄줄 달렸을지 모른다. 혹은 반대하는 사람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미 여론이 형성되어 예전과 같은 댓글을 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사에 달린 댓글 여론은 달라져 있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긴 했었다. 우리가 산채로 불에 탄 캥거루 사진을 보았다. 새끼 캥거루는 철조망에 매달려 잠을 자는 듯한 모습이었다. 호주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된 산불이었다. 건조한 계절에 산불이 나는 것은 흔한 일이고 호주는 멀고 먼 나라였기에 큰 뉴스가 아니었지만 산불의 지속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 뉴스에도 더 잦고 주요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산불은 6개월 만에 진화되었다. 잦아진 뉴스는 몹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는데 그것이 현실이었다. 동물을 구조해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불에 쫓겨 사람들에게 물을 얻어먹는 동물들의 모습은 호주에서 일어나고 있던 현실이었다. 구조도 자력 탈출도 어려워 무생물이 된 많은 생명들은 사진에 다 담기 어려운 숫자였고 그것도 현실이었다. 아무리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도 근심이 늘고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그래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다 우리는 자는 듯 가만히 타버린 새끼 캥거루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부터 산불은 더 이상 호주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게 된 것 같았다. 산불은 지구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트 포장대에 대한 여론이 불과 몇 달 사이 뒤집힌 건 분명 그 사진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류를 읽지 못했던 기자만이 몇 달만에 두둔에서 항의를 받게 되었다.

 지구가 운동선수라면 인류가 등장한 이래 지구의 전성기는 분명 지금일 것이다. 지구는 최근 들어 계속 기록을 세운다. 기록적인 폭염, 기록적인 한파, 기록적인 태풍, 기록적인 기타 등등 세계 곳곳을 종횡무진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기록적이라는 것은 비정상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조금 다행인 면이 있는데 진짜 문제는 그 기록적인 상황이 기록할 필요 없는 일상이 되는 것이다. 매번 갱신하는 기록에 더는 누구도 놀라지 않다 기록할 누구도 남지 않게 되는 수순이 우리에게 펼쳐질 미래들 중 가장 큰 확률일 수도 있다. 지구를 기록하고 측정하는 것은 적어도 지구 내에서는 인류가 유일하다. 지구야 기록되고 측정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겠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사라진 후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 지구가, 그간 우리가 해왔던 기록이 안타깝다. 우리의 유산은 한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구는 아무 생명도 키우지 않는 행성이 될 수도 있다. 인류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만 사라진다면 지구 생명체는 평화롭게 번성하여 살아갈 것이라고들 하지만 파멸해 떠날 우리의 뒷모습이 아름다울 리 없다. 우리가 멸종시킨 종의 수를 생각한다면 더 그렇다. 우리에게 지구를 산산조각 낼 기술과 힘은 없을지 몰라도 다른 종을 멸종시킬 어리석음과 힘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지구 온난화를 음모론이나 틀린 것으로 치부하는 시선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철 좋던 시절이었다. 인류가 철이 없었다. 이상 한파를 들이밀며 지구 온난화가 틀렸다고 주장하던 건 일부 학자들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산업이 규제를 피하기 위함이었지만 기후가 지금처럼 미쳐 날뛰지 않아 그런 눈 가리고 아웅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위기감이 덜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상 한파가 왜 지구가 뜨거워진 결과이며 과정인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지구가 멸망하는 건 두려운 일이니 예년보다 추운 겨울에 기대 지구의 안전함을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때 지구 온난화라는 단어의 꼬투리를 잡는 대신, 그래서 기후 변화라는 새 단어를 만들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모두가 함께 위기감을 갖는 노력을 했다면 어땠을까? 지금쯤은 꽤 고비를 넘겨 괜한 기우였다고 여기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과학자와 정치가들이 공포 마케팅을 통해 이득을 도모했다는 음모론으로 먹고사는 이가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럴 수 있던 시기는 지나간 것처럼 보인다. 기후 변화는 이제 눈속임이 통하지 않을 만큼 피부로 느껴진다.

  내 어린 시절에는 대한민국이 뚜렷한 사계절을 가진 나라라 배웠다. 우리가 노력하여 획득한 것은 아니고 그런 위치에 나라가 있을 뿐이지만 꽤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게끔 배웠던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의 계절을 어떻게 배울까? 맛만 보여주고 사라지는 봄과 가을을 그래도 뚜렷한 사계절로 배울까? 혹은 우리가 한 때 그러한 나라였다고 배울까? 지금부터 모든 노력을 다 해도 짧아진 봄과 가을을 다시 내 어릴 적의 계절로 돌리는 건 어려운 것 같다. 망치는 걸 멈춘다면 회복하거나 적어도 그 상태에서 멈출 것이라 생각했는데 망쳐진 관성에 의해 얼마간 더 망가질 것이라 보는 의견들이 많았다. 담배를 끊는다고 발생한 병의 진행이 당장 멈추는 것은 아닌 것처럼. 우리가 현명하고 운도 따라준다면 내 또래나 그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사는 내내 봄, 가을이 너무도 짧아졌다며 투덜대다 사라질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아무 위화감 없이 여름과 겨울 사이 몇 없는 좋은 날이라 여기는 어른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노력을 하고 운도 따라준다면 말이다.

 어떤 학자들은 인류가 무슨 짓을 해도 이미 늦었다고 말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개인의 노력 정도로는 아무 소용없다고도 말한다. 조금씩 의견이 다르겠지만 몹시 낙관적인 전망은 거의 없어 보인다.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살얼음 위에 선 기분이다. 기후 변화로 수많은 빙하와 만년설이 녹은 참이다. 기후의 이상한 점은 가속이다. 우리가 저지른 문제만큼 등속으로 나빠지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빙하만 해도 그렇다. 햇빛을 반사해주던 빙하가 줄어들면 바다가 흡수해야 할 열이 더 많아진다. 그 열은 다시 빙하를 녹인다. 인류에게 위협적인 이 순환은 가속된다. 막막한 일이다. 어쩔 수 없어 보이니 멸망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자고 할 수도 없고 모든 문명을 버리고 원시 시대로 돌아가자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가는 살얼음조차 다 녹아 잠길 것이다.

 코로나 19로 세계의 일상이 멈췄을 때 바라던 것이 있었는데 뉴턴 같은 천재의 등장이 그것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뉴턴은 페스트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에 돌아왔다. 그가 이룬 대부분의 업적이 이 시기에 이루었거나 시작된 것이라 했다. 그러니 지구 어딘가에 코로나 19로 고립된 천재가 무해하고 완전한 탄소 포집 및 처리 기술을 개발해주지는 않을까? 무엇보다 그런 천재의 탄생이 제일 간절했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그런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곳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효율 높은 탄소 포집과 처리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언젠가는 문제 없이 사용할 기술을 개발할 테고 점점 더 보완해 기후 변화를 멈추는데 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그때까지 버텨야 한다. 누군가 나타나 한 번에 해결해 줄 테니 괜찮을 거라는 낙관도 말고 합심해야 한다.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상황을 아는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그러다 운이 좋다면 미래의 아이들에게 지금 정도의 봄, 가을은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가을의 하늘과 구름은 경이롭고 봄의 생동감은 따스하다.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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