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은 많아졌고, 질문은 사라졌다
안개가 흐린 것은 시야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안개 낀 아침은 세상을 흐리게 했지만,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는 우리가 얼마나 정형화된 선택 속에 살고 있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겨울 새벽 출근길은 늘 버겁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지만, 솔직히 말하면 기겁할 정도로 추운 날씨는 견디기 힘들다. 게다가 이른 새벽 출근까지 겹치면, ‘싫다’는 감정은 금세 ‘차라리 결근하고 싶다’로 바뀐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자욱한 안개가 도로를 덮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춥지 않았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불안보다는 포근함이 먼저 느껴졌다. 마치 하루가 먼저 “오늘은 조금 느슨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 기온은 생각보다 높았다. 초봄이 벌써 와버린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겨울답지 않은 하루가 그렇게 시작됐다. 그날의 안개는 세상을 가린 것이 아니라, 내 상태를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 그대로 본다.” – 아나이스 닌
퇴근길, 아무도 없는 아파트 단지 안을 천천히 걸었다. 해가 기울면서 족구장 안으로 구조물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철제 난간, 둥근 프레임, 반복되는 구멍들.그림자는 구조물을 그대로 닮아 바닥 위에 얹혀 있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그림자를 바라봤다. 움직이지 않는 구조물보다,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떠오른 단어는 ‘틀’, ‘정형화’, ‘획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하지만 막상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오면, 많은 사람들은 이미 누군가가 지나간 길을 고른다. 안전해 보이고, 설명하기 쉬우며, 실패 확률이 낮아 보이는 길.
정작 스스로도 알고 있다. 그 길이 내가 진짜 원하는 방향은 아니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선택을 해야만 하는 현실을 너무 오래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틀은 눈에 보이지 않을수록 더 단단해진다.
“가장 위험한 길은 언제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이다.” – 파울로 코엘료
대한민국은 작은 나라다. 면적도 작고, 인구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세계 수학경시대회나 각종 국제 대회에서 늘 상위권에 오른다. 이건 분명 대단한 성취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정답을 잘 맞히는 법’만 배워온 건 아닐까?
정해진 답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찾는 훈련에는 능숙하지만, 문제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힘에는 얼마나 투자해왔을까. 지금의 교육 방식은 학업 성취도를 높이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 정답을 찾는 능력만은 아닐 것이다.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방향을 설정하는 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상상해보는 용기, 그리고 틀 밖으로 나설 때 감당해야 할 불안을 견디는 태도. 그림자는 늘 구조물을 닮는다. 하지만 빛의 각도가 바뀌면, 전혀 다른 형태가 된다. 문제는 구조물이 아니라, 빛을 비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나는 틀을 완전히 부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틀은 우리를 가두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출발선이 되어주기도 한다. 문제는 틀의 존재가 아니라, 그 안에만 머무르려는 태도다.
그날 족구장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분명한 사실 하나를 보여주고 있었다. 정형화된 구조물도 빛의 각도가 달라지면 전혀 다른 모습을 만들어낸다는 것. 틀은 그대로였지만, 그림자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다. 다만 그 가능성을 꺼내 쓰지 않았을 뿐이다. 누군가 정해준 답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방향을 설정하는 삶은 지금 이 순간부터도 시작할 수 있다.
앞으로의 삶에서 나는 정답을 빠르게 찾는 사람보다는,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남들이 이미 지나간 길을 따라가며 안도하기보다, 조금은 느리고 불안하더라도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고 싶다.
안개 낀 아침이 포근했던 것처럼, 불확실함은 반드시 두려움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우리를 감싸는 온기와 방향을 가늠하게 해주는 빛은 분명 존재한다. 틀 밖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다. 그리고 한 걸음만 나가도, 삶은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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