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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늘 Nov 18. 2024

이토록 말랑하고 유연한

김소영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 그리고 나의 세계



1. 사랑하는 사이엔 '말'이 생긴다. 둘만 아는 말. 둘이서 재미있는 말. 때때로 말은 놀이이자 암호이기도 해서 남들은 모르는 견고한 테두리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만의 세계다. 그 세계에서 말은 원래의 의미를 벗어난다. 서사가 깃든 말은 두고두고 사라지지 않는다.


2. 네 살 수는 작은 동물원 동요를 자주 불렀다. '삐약삐약 병아리 음메음메 송아지 따당따당 사냥꾼'으로 시작하는 노래. 수는 '음메음메 송아지'를 '꼭 무에무에 송아지'라고 불렀다. 시간이 훌쩍 흘렀어도 이 작은 에피소드를 기억하는 건 '무에무에' 덕분이다. '무에무에'를 생각하면 그렇게 부르던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재미있어서 웃던 나와 서투른 대신 치열했던 한때가 줄줄이 따라온다. 서투름과 틀림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야 한다면, 아이의 말은 당연히 전자에 가깝다. 아이를 통해 서투른 말도 특별하다는 걸 배운다.


3. 윤과 수는 '빵째'라는 말을 자주 쓴다. '0번째'라는 뜻이다. 어쩌다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말을 만들고, 기꺼이 즐거워한다. 순서가 중요한 건 아니야, 누누이 강조해도 아이들은 이유도 없이 치열하다. 손을 씻을 때 혹은 차에서 내릴 때조차 '빵째'가 되려는 건 물론. 윤은 '언니, 나 빵째 맞아 아니야?'하고 수에게 묻는다. 엄마는 말도 놀이가 되는 현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관찰자다.


4. "쿡쿡 카테요, 쿡쿠!" 아이들이 흥얼거리길래 무슨 노래인가 싶었다. 물어보니 밥 할 때 못 들어봤냐고 한다. 밥솥에서 밥이 잘 될 때 마지막으로 나는 그 소리였다. 아이들은 이렇게 알아서 밥솥 홍보를 해준다. 관리 사무실 방송도 쉴 새가 없다. "딩동댕동~ 관리사무실에서 알려드립니다. 부엌에선 뛰면 안 돼요! 해적선 같은 검정 버스를 봤나요? 지금 엄마 코를 먹고 있습니다. 발도 먹었습니다." 이사 후에 전에 없던 방송이 신기했는지, 한동안은 딩동댕동 하며 온갖 말을 갖다 붙였다. 때때로 말은 현실과 상상 사이에 경계가 없다.


5. 수와 윤 그리고 나, 우리 사이엔 비밀 놀이가 있다. 별안간 눈이 마주치면 그대로 응시하기. 빤히 쳐다보다 말고 내 눈이 게슴츠레 풀리면, 아이들은 씰룩씰룩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수와 윤이 '왁!' 하면, 나는 차례대로 똑같은 말을 해준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햄. 사랑햄~" 이 말은 윤이 어느 날부터 엄마를 '사랑햄~'으로 부르면서 시작됐다. 암. 사랑햄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햄이지!


6. 얼마 전부터 윤은 칫솔질을 할 때마다 '애'도 닦아야 한다고 했다. 보통 '아' 하고 있으니 그건 이를 닦는 거고, '애'는 말 그대로 '혀'를 닦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키즈카페를 '키즈파케'라고 하는 아이는 언니가 그랬듯이 말랑한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김소영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 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너 그거 잘못된 거야. 틀렸어. 옳지 않아. 이건 이렇게 고쳐야 돼. 그렇지. 이 모든 말들이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나를 만난다. 바로잡아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본다. 내가 내버려 둬야 할 건 바로 이 마음이다. 아이는 머지않아 이 세계를 빠져나갈 테니까. 잊지 않을 쪽도 내가 될 확률이 높다. 그러니 부드럽고도 연한 말들로 나 또한 유연해질 수 있는 건 지금 뿐이다. 나는 지금만 누릴 수 있는 행복에 의지적으로 머물기로 했다. 이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에 의한, 나를 위한 변화다. 아이만큼 내 마음을 기민하게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함께 자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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