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의 관절과는 달리, 인간의 관절에는 이것이 담겨 있다.
힘겨웠던 해외 대학원 후반부. 그 시간을 돌파하려면 생활에 뭔가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대 대학원에서는 주로 첫 1-2년 동안 수업 이수 요건을 다 채우고 후반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일정으로 자기 연구를 하게 되는데, 프로젝트가 중간에 엎어지고 랩을 옮기고 하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나니 나로서는 자유롭기보다는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졸업 요건을 다 채웠음에도 새로운 수업을 듣기로 했다. 매주 규칙적으로 수업에 가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았고, 너무 내 연구만 들여다보지 말고 새로운 지식도 배우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 새로 옮긴 연구실이 의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그 상황의 좋은 점을 찾아보자는 생각이었기도 했다.
지도 교수님께 이런 상황이라고 말씀드리고 무슨 수업을 들으면 좋을까 여쭈어 보았다. 교수님의 추천은 해부학. 그래서 나는, 공대 박사 과정 마지막 연차에 약간 뜬금없게도 해부학 수업을 듣게 된 것이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때 들을 수 있었던 수업 중에 신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난도가 높은 과목이었던 것 같다. 하하! 정신적으로 힘들 때는 다른 어려운 일을 끼얹으면 된다!)
한편 공대생인 내가 어떻게 꽤나 진지한 해부학 수업을 들을 수 있었는가 하면, 애초에 의대생은 아니되 관련된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여는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의료 기기나 인공 관절 등을 개발하는 의공학 대학원생과 병리학 관련 전공자가 많았다.
내 경우에는 사람의 움직임에 관한 연구를 하기는 했지만, 로봇 제어나 수학적 계산 등에 더 관심이 많은 기계과 출신 공대생이었기에, 연구와 해부학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다른 친구들 보다는 낮은 편이었다.
가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한탄하며 주변을 둘러보면, 공룡 연구하는 친구가 나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눈이 마주치고는 했다.
(화석에 남은 근육의 흔적과 골격 구조 등을 바탕으로 공룡의 움직임을 연구한다나.)
다른 친구들은 공룡 연구자와 로봇 연구자가 반에 있어서 즐거워했던 것 같다.
내가 들은 해부학은 강의실 수업과 실습이 합쳐진 과목이었는데, 거꾸로 수업 (flipped classroom) 형식이라 강의실에서는 주로 토론을 하곤 했다. 학생들이 각자 강의 영상을 보고 공부해서 미리 질문을 제출하면, 수업 시간에는 그 질문을 중심으로 토론을 하는 것이다. 토론 중에 누구든 자유롭게 말을 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꽤 많이 듣기도 했다.
누구 사촌 동생이 심장을 제외한 모든 장기의 배치가 보통 사람과는 좌우 반대였다는 걸 나이가 꽤 들고서야 알았다든가 (배탈이 나서 병원에 갔는데 촉진을 하던 의사가 어??? 이게??? 어??? 이럴 리가??? 하며 당황하다가 추가 검사 끝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나라에서 미라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연구를 했다든가 (미라 성대를 CT 스캔하여 3D 프린트하고 바람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런 흥미로우면서도 이상한 연구는 대체로 영국에서 하는 감이 있다), ….
근골격계에 대해 배울 때 내가 제출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인간의 관절과 로봇의 관절은 어떻게 다릅니까?”
별로 질문할 것도 생각이 안 나고 내가 로봇에 관심이 있으니까 그냥 한번 물어본 건데, 사실 나는 쇠와 뼈의 차이나 모터와 근육의 차이 같은 대답을 들을 줄 알았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아주 멋진 대답을 들려주셨다.
“로봇의 관절과는 달리, 인간의 관절에는 진화의 역사가 담겨 있다.”
사람이 로봇보다 구조적으로 훨씬 훌륭한 부분도 많지만, 또 자세히 들여다보다 보면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으로 생긴 부분도 꽤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꼬리뼈는 왜 있어야 하고, 맹장염이나 일으키는 충수 돌기는 도대체 왜 달려 있다는 말인가?
교수님은 무릎을 예시로 들며 이렇게 표현하셨다.
“만일 신이 나에게 인간의 무릎을 설계하라고 하신다면,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같이 걷는 로봇을 만든다고 해도, 로봇 무릎이 인간 무릎과 같은 구조일 필요는 없다.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에 만성적 무릎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으며, 무릎인대 파열을 겪는 운동선수와 일반인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나라에서만 1년에 10만 건이 넘는 무릎 인공 관절 수술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우리 몸이 정말로 모든 면에서 잘 디자인된 시스템이라면, 무릎이 이렇게나 쉽게 상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편, 우리 몸에서 ‘잘못 디자인된’ 것 같은 부분을 설명하는 책과 연구 자료가 많으니 관심 있는 분은 찾아보시길 바란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4족 보행에서 2족 직립 보행으로 넘어오면서 생긴 문제로 보기도 한다. 2족 보행은 진화의 역사에서 보면 비교적 최근에 생긴 변화였는데, 인간의 평균 수명과 체중은 그보다 더 급격하게 증가했다. 그러면서 각 무릎이 버텨야 하는 하중과 세월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하지만 무릎의 인대와 연골 등은 아직 적절하게 변화하지 못했기에 무릎 부상이 이렇게 흔하다는 것이다.
자연선택설은 생존에 보다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고 했지만, 살아남은 쪽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거나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완전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생명체는 어느 날 세상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조의 몸 구조를 물려받아 태어난다. 염색체에 돌연변이가 일어나기는 하나, 우연히 생긴 돌연변이 대부분은 생존에 불리하고 심지어는 그 부분이 전혀 작동하지 않을 확률도 크기에 변화는 조금씩 일어난다. 진화는 지금 있는 구조를 완전히 폐기하고 새로운 구조로 대체해 넣는 식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지금 있는 토대 위에서 아주 조금씩 변화하며 일어난다.
생각해 보면 생물의 진화 말고도 많은 일이 그렇다. 백지에서 시작해서 처음부터 설계할 수는 없고, 지난 역사를 아우르는 해법을 찾아가야 할 때가 많다.
어느 도시에서 도로망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도시 전체의 집과 도로를 다 허물고 새로 지을 수는 없다.
자원 분배가 올바르지 않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모두의 재산을 다 빼앗아 새로 나눌 수도 없다.
우리는 몇 살이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지만,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살 수는 없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완벽하게’ 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나라면 이렇게는 설계하지 않았을’ 무릎을 달고 태어나는 것이 우리 인류인 걸 어쩌겠는가? 공학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래도 이만하면 잘 작동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무릎 건강은 다들 잘 챙겨야 하겠지만 어느 날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개선해 보는 수 밖에는 없다. 우리는 진화의 역사가 담긴, 이렇게 생긴 무릎을 가지고 태어나서 걷고 뛰고 일하고 놀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