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픈 해외 유학 생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락다운, 박사과정 말년차에 봉변당하고 연구실 옮기기. 여러 일을 겪으면서 주화입마와 무기력이 찾아왔을 때 운동을 배우기로 했다. 어차피 연구를 못 할 거라면 그냥 연구를 못 하는 사람보다는 튼튼하고 연구를 못 하는 사람이 낫지 않은가.
내가 다닌 곳은 규모가 작고 오래된 편인 동네 헬스장이었고 개인 강습 (PT) 전문인 곳이었다. 관장님도, 트레이너도, 그들과 10년 넘게 함께 운동했다는 회원도 나보다 체중이 3배쯤 나가는 근육질 고인물*들이었는데, 할아버지 관장님은 단백질 보충을 위해 아침마다 달걀을 10개씩 먹는다고 하였다.
(*고인물: 무엇을 아주 오래 계속해서 통달해 버린 사람들을 뜻한다.)
그들은 나를 좀 귀여워했던 것 같다. 운동이랑은 거리가 멀게 생긴 쪼끄만 애가 성실하게, 꾸준히, 군말 없이 운동을 했으니까. 근육근육 할아버지 관장님도 나를 볼 때마다 Hi dear! 안녕 얘야! 어서 오렴! 하며 몹시 다정하게 맞아주곤 하였다.
운동을 배운 적이 없다 보니 헬스장에 처음 갈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인터넷에도 검색해 보고,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도 물어보고, 가볼 체육관을 하나 정하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거기서 또 나름대로 큰 용기를 짜내서 전화를 걸었는데 아무도 받지 않았다. 여러 번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마다 용기가 줄어들어서 사실 거의 포기할 뻔했다.
이런 사정을 들은 친구가 그럼 그냥 찾아가라고 하였다.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어하는 나는, 그랬다가 누구 수업하는데 방해하면 어떡하냐고 물었다. 친구는 다들 뉴비(초심자)를 좋아하게 되어 있으니 그냥 가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가 등을 떠밀어줘서 다행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되어 어느 주말 오후에 헬스장에 무작정 찾아가 보았다. 문을 열자 팔뚝 두께가 내 다리보다 굵은 근육질 트레이너가 어서 오라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무서웠지만 운동을 배워보고 싶노라고 말했다. 체험을 시켜 줄 테니 며칠 후에 오라고 한다. 여전히 무서웠지만 공짜니까 한번 가보기로 했다.
트레이너는 나중에도 그때 일을 여러 번 회상하곤 했다. 어느 주말에 네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지 뭐야! 우리가 전화 안 받는다고 포기하지 않고 찾아와줘서 정말 다행이다.
그래서 처음 운동을 배우러 간 날.
“운동을 시작하려는 목표가 뭐니?”
“나는 강해지고 싶다. I want to get stronger.”
근육근육 트레이너는 솔깃하는 눈치다.
“혹시 체중을 늘리거나 줄이고 싶진 않니?”
“아니. 체중은 상관없다. 나는 그저 강해지고 싶다.”
음, 그렇지 그렇지. 고인물 트레이너는 무척 만족하는 표정을 했다. 나는 이때다 하고 냅다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듣자 하니 강해지려면 무게를 들어야 한다더군!”
그렇지, 그렇지!!
트레이너는 대만족 하여 갑자기 나에게 이리 좀 와보라며 이것저것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관장님이 대회에서 어마어마한 무게를 들어 올리고 있는 사진도 보여주었는데, 알고 보니 관장님은 세계 무슨 운동 연맹의 부회장이라서 대회 심사 차 여러 나라로 출장도 다니는 진정한 고인물이었던 것이다.
한참 자랑을 한 트레이너가 나를 불렀다.
“자 그럼 벤치프레스를 해보자!"
뭐라고? 원래 초심자랑 벤치프레스부터 하는 거였나?*
“벤치프레스? 내가? 나? 이걸? 들어?”
(*빈 봉도 20kg이기 때문에 초심자 여성은 벤치 프레스 빈 봉도 들기 어려움)
하드코어한 곳이었기 때문에 쇠사슬 벤치 프레스를 하기도 했다.
얼떨떨해진 나는 여러 번 되물었다.
“나는 벤치프레스 하는 나 자신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어.”
그 말을 들은 트레이너는 왠지 몹시 신나 하더니 관장님을 불러 내 말을 전했다.
“얘는 벤치프레스 하는 걸 상상도 해본 적 없대!”
그 말을 들은 근육질 관장님도 신났다.
“하지만 하고 있죠!”
나만 심란했다.
“벤치 프레스를? 내가? 갑자기? 으…….”
나의 심란함에 고인물 트레이너도 고인물 관장님도 몹시 만족하였다. 고인물들은 뉴비를 좋아하게 되어 있다더니.
첫 운동이 벤치 프레스라서였을까? 나는 지금도 벤치 프레스를 꽤 잘한다.
처음에는 헬스장에 찾아가는 것도 좀 무서웠는데 다니다 보니 점점 편해졌다. 고인물 회원들과도 안면을 익혔고 간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나의 트레이너는 가끔 근육근육 팔로 오렌지를 까서는 내게 나눠주곤 했는데, 식단 챙기는 근육맨에게 음식을 나눠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헬스장의 근육질 고인물들은 내가 연구실에서 당한 이야기를 듣고 함께 분노해 주었다. 우리가 같이 가서 손 좀 봐줄까? 누군지 얘기만 해. 진짜지? 언젠간 꼭 좀 부탁할게. 그럼 그럼, 말만 해! 근육질 덩치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상상만 해도 좋았다.
집에는 소파가 없었기 때문에 운동 전후로 헬스장 소파에 앉아 놀다 오기도 했다. 헬스장 커피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가져간 초콜릿을 트레이너와 나눠 먹고 (식단은 별로 신경 안 썼고 나에겐 늘 뭐든 더 먹으라고만 하였다) 소파에 앉으면 등 뒤 창문을 통해 햇빛이 비치곤 했다. 최종 발표를 준비 하면서 마음이 힘들 때는 노트북과 키보드를 싸들고 가서 헬스장 소파에 앉아 학위 논문을 쓰기도 했다.
마음이 힘들어서 정말 가기 싫은 날도 있었지만 일단 가면 나은 기분으로 헬스장을 나설 수 있었다.
헬스장 소파에서 간식에 커피 마시며 학위 논문 쓰기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그걸 뜻밖에도 동네 고인물 헬스장에서 발견하다니 인생, 참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