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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곧 Jul 03. 2024

호구된 이야기 (1)

내가 호구였던 순간에 관한 고찰


“호구네.”


내 이야기를 들은 선배가 가차 없이 평했다. 동아리 선끼리 졸업 후 10년 만엔가 만난 자리였는데도 선배는 단호했다.


호구라고 단박에 평가받은 내 일화는 이러했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데 도로에 누가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놀라서 다가가보니 휠체어가 쓰러져있고 행색이 남루한 중년의 남자가 바닥에 넘어져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도 분명한 신체적 결손이 있는 듯했다. 휠체어를 일으켜주고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자, 그는 무척 예의 바른 태도로 내게 고맙다며, 휠체어가 망가지면서 넘어졌고 집에 돌아가려면 택시비가 필요해서 곤란하다고 하였다. 택시를 타려면 현금이 필요하고 자기 아내는 일을 하는 중이고 자신은 몸이 불편하여 돈을 찾으러 갈 입장이 못 되니 도와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현금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일단 있는 돈을 — 몇 천 원 정도 — 꺼내 주고, 지나쳐가려다가 다시 마음이 쓰여서 현금인출기에 가서 돈을 — 이번에는 몇 만 원 정도 — 찾아다 주었다. 그는 내 연락처를 받아 적으며 자기 아내에게 말해서 내게 돈을 입금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 순간에도 사실 이 돈을 돌려받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내 연락처를 제대로 적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음에도 굳이 다시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출발하는데 얼마 못 가 완전히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순식간에 너무나 불쾌해지면서 화가 났다.  


물론 (?) 결국 돈은 돌려받지 못했다. 그런데 돈을 못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은 줄 때부터 이미 했지 않나? 그럼 도대체 내가 무엇에 속았다는 말인가?




1. 나는 무엇에 화가 났나


나조차 내 감정 흐름이 단박에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나는 공학도 답게 스스로를 디버깅*해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우선 버그의 위치를 알아야 하니까 여러 조건을 실험해 보기로 한다. 그래서 나는 ‘만약 상황이 ___ 였다면 그래도 화가 났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 프로그래밍에서 오류가 나는 부분을 버그라고 하고, 이 버그를 알아내어 없애는 과정을 디버깅이라고 한다.


1) 만약 그의 휠체어가 정말로 부서졌고 내가 준 돈을 써서 집에 갔다면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가 돈을 돌려주겠다는 부분은 진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휠체어가 망가졌다는 그 상황 자체가 거짓이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상황을 벗어나서 생각해 보니 사람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하여 일부러 거기에 그러고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긴 하다.) 


2) 만약 내가 쓴 돈만큼 식료품, 의약품 등 꼭 필요한 물건을 사서 전달했더라면 기분이 이렇게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그가 돈을 그런 곳에 썼다는 확신이 있었더라면, 처음 이야기한 대로 택시비에 쓰지 않았더라도 이렇게까지 속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을 술이나 마약 등에 쓸 거라고 생각하면 용납하기 어려웠는데 그럴 확률이 더 높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3) 만약 그가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돈이 너무 필요하다고 해서 준 돈이었더라면 기분이 이렇게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상황이었다면 내가 돈을 그만큼 주지 않았을 확률도 높지만.)


4) 만약 내가 준 돈의 1/3 정도만을 주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내가 쓴 돈은 내 경제적 수준에 비추어 보아서 편안하게 쓸 수 있는 금액을 넘는 액수였기에 내 마음이 더 흔들린 것이다. 대학원생 월급이 많은 편도 아닌데 말이다.


5)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만약 그가 이 일을 고맙거나 하다 못해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것도 진실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멍청하고 순진한 녀석을 속여서 쉽게 돈 벌었다며 나를 비웃었을 거라고 상상했더니 더욱 불쾌했던 것 같다. 게다가 굳이 현금 인출기에 가서 돈을 찾아다 준 노력도 문득 창피했다. 즉 내가 상대의 악의를 상상해서 그렇다.

그리고 이런 의혹은 나의 불안감을 자극하기도 했던 것 같다. 나와 나름대로 친절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한 사람이 — 그것도 나보다 육체적으로 강할 것 같은 남성이 —  실은 나에게 악의를 품고 있었으리라는 의혹 자체가 무의식 중에 안전에 대한 감각을 해치는 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선의로 자신을 대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이용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누군가를 상상하면 가엾다. 원래도 상대방의 마음까지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2. 나는 왜 속았을까


그다음 생각해 본 것은, 그 상황을 벗어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속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상한 점이 많았는데도 그때는 내가 별 의심 없이 돈을 주었다는 지점이었다. 이게 스스로 납득이 안 갔다. 그런 한편으로는 ‘아, 이래서 사람들이 보이스 피싱 등 사기를 당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 흔히 ‘뭐에 홀린 것처럼’ 당한다고 하더니 내가 딱 그랬다. 내 친구도 전화로 개인 정보를 술술 답해주고서 끊자마자 당했구나 했다고 했다.


나는 그 상황에서 무엇에 홀렸던 걸까. 생각해 보니 내가 돈을 주는 방향으로 작용한 여러 공교로운 점들이 있었다.  


1) 내 마음이 마침 그랬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이게 어떠한 종류의 우연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마침 나는 이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세상을 선한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누군가를 제대로 도와본 적은 없지 않은가 하는.

내가 여성이라 그런지 겁이 많은 편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길거리에서 누군가 다가오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을 돕겠다는 생각보다는 괜히 엮여서 봉변을 당할까 봐 걱정하고는 했다. 그렇다고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딱히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나도 세상을 위해 좀 더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길에 쓰러진 누군가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무언가 해줄 것이 있는지 보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일부러 속인 거라고 생각하면 나는 참으로 준비된 호구였다. 너무 쉬워서 그쪽에서 오히려 당황스러웠을지도.) 


2) 그 사람이 넘어져 있는 풍경에 내 마음이 동요되었다. 그곳은 깔끔하고 넓은 주택가였고 주변에는 큰 교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넘어져있는 곳 바로 옆에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멋진 승용차 운전석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그 모든 배경과 쓰러진 남자가 한눈에 들어오면서 순간적으로 그 대조가 마치 어떤 거대한 부조리의 — 빈부격차와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면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그런 것들 —  상징 같이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일부러 속인 거라고 생각하면 교회 주변, 잘 사는 동네라는 그 위치 선정에도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3) 자전거로 가파르고 높은 언덕을 오른 직후였기 때문에 나는 그때 생리적으로 몹시 들떠있었다. 언덕을 오르느라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온몸에 피가 돌았고, 집중해서 언덕을 오르면서 다소 고양된 상태였다. 그 사람을 만난 곳은 언덕 직후에 이어지는 기분 좋은 직선 구간이었는데, 바람을 맞으며 호흡을 고르면 기분 좋은 피로감과 성취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나는 마침 그 언덕에 좋은 기억이 많았다. 연구실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로 언덕을 올랐던 기억, 그들과 서로 등을 밀어주며 깔깔대고 웃었던 기억, 그 언덕길에 있었던 공사장 인부와 매일 아침 명랑하게 인사를 나눈 기억. 언덕을 오르면서 그런 순간들이 떠올랐고 그래서 어떤 막연하고 따뜻한 연결감 같은 것을 느꼈다.

요약하자면 나는 운동 직후에 들떠서 평소보다 성급해진 상태에 더해 평소보다 훨씬 더 사람에 대해 열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주 잘 준비된 호구였다.


4) 그가 뭐랄까, 이런 표현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쉽게 말해 염치를 아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일단 사람이 땅에 쓰러져 있으니 도울 것이 있나 하고 다가갔던 것인데, 휠체어를 일으켜주고 도움이 필요한지 묻고 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니 점잖고 염치를 아는 사람 같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거듭 고맙다고 했고 택시비에 관한 도움을 구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돈을 강하게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조금 사양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그런 한편에선 근처 마트에 현금인출기가 있다느니 하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나중에 반성해 보니 그의 정중한 태도가 그의 행색에 대비되는 면이 있어 오히려 과하게 그의 설명을 믿은 것도 같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상황을 의심하고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무례한 일 같이 느껴졌다.


5) 나와 그의 상황에 별로 논리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나의 환경이 상대적으로 넉넉하여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고 나의 몸이 건강하여 자전거를 타고 힘차게 지나가는 그 상황이, 이유 없이 불공평하고 민망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좀 당혹스러웠고 그래서 평소보다 과하게 행동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 판단이어서 나중에 생각해 보고서야 그때의 내 대응에 이런 면도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날은 마치 하늘의 천체가 일직선 상에 놓이는 드문 날처럼 나에게 호구의 기운이 여럿 중첩되어 쬐어진 그런 날이었다고나 할까. 내가 살면서 누군가를 도운 일이 무엇이 있었나 하는 반성, 마치 사회의 불평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만 같았던 그 순간의 장면, 운동 후에 오는 고양감과 성급함, 그 장소와 연관된 좋은 기억, 의외로 정중했던 상대의 태도, 그리고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있는, 나는 상대적으로 안락하고 넉넉한 환경에 있어서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는 어떤 막연한 부채감과 부끄러움 같은 것. 쓰고 보니 이 정도면 어떤 식으로든 호구가 되어야만 넘어갈 수 있었던 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호구된 이야기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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