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원동 바히네 Nov 24. 2022

오늘도 거지 같은 나를 마주한다.

남은 2022, 읽은 책들 - 1. 이부영의 분석심리학 3부작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운명 같았다. 누군가는 결과론적 해석이고, 끼워 맞추기라고 할지 모른다. 또 누군가는 정신승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결과론적 해석이고 끼워 맞추기면 또 어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근 몇 년 사이 나에게 일어난 일들이 다 이유가 있고, 연결성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부영 분석심리학 3부작]은 1편 그림자, 2편 아니마와 아니무스, 3편 자기와 자기실현의 세 권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두껍고도 어려운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지 않고 구매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마도 긴 터널의 마지막 몇 미터를 남겨두었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터널의 끝을 코 앞에 둔 지점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깜깜하고 비좁은 터널이 이제 내 일상인 것처럼 익숙해져 갈 때였다. 어두운 곳에 오래 있다 보면 그 안에서 시력을 일부 회복하는 상태가 되는 것처럼,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도 나는 터널이 터널 인지도 모르고 그 안에서 만족스럽게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작년부터 분석심리학과 정신분석, 명상에 대한 책들을 많이 추천받았지만 진심으로 읽은 적이 없다가 올해 여름에서야 갑자기 이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미루고 미루다 무서운 속도로 읽었다기보다 읽혔다는 말이 맞을듯한 독서생활이 이어졌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나'를 이와 같이 보고 있다. 역할에 의해 부여된 '페르소나'를 포함해 '인지하는 나', 즉 의식 영역에서의 '나'인 '자아'는 전체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등의 무의식이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무의식은 대부분 억압되거나 무시되어 '나'의 일부로 인식하지 않는다. 의식 영역에서의 '나'와 달리 무의식에서 그림자로 자리 잡고 있는 '나'는 대부분 몹시 부정적이다. 뒤틀리고 한심하며 부도덕하다. 때문에 나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것은 몹시도 불편하고, 거부감이 강하게 들게 된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의 그림자는 마주하고 인정하지 않아 더 깊이 무의식에 자리 잡게 되고, 결국 더욱 뒤틀리고 한심하게 변형되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다. 대부분 나의 부정적인 그림자가 나타나는 경로는 '투사'다. 남들에게서 불편하고 부정적으로 보이는 부분들, 혹은 객관적이지 않고 신격화에 가깝게 누군가를 우러러보게 되는 것들이 대부분 내 그림자가 투사된 것이다. 그림자는 매우 개인적인 것인 동시에 '집단 무의식'의 일부로서 내가 속한 국가, 연령, 지역, 커뮤니티 등 집단에서 오랫동안 전해져 온 것도 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의존적이지? 본인 몫을 못해내고 여전히 유아적인 태도로 누군가에 의지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니. 정말 한심해.' 


 내 뒤틀린 무의식이 주로 투사되는 것은 '의존성'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어린 나이에 독립해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오롯이 내 몫을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존하고 싶은, 여전히 10살도 안 되는 내 어린아이 같은 면을 무시하고, 억압했다. 이는 곧 회사에서 본인 몫을 못해내는 사람에 대한 얼음장 같은 냉정함으로, 곁을 내어주고 또 받고 싶어 하는 연인에 대한 불편함으로, 상호 의존이 핵심이 되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찝찝함으로 투사됐다. 또한 '존경할 만한 남자'를 이상형으로 꼽으며 지덕체와 사회적 부, 명성을 모두 갖춘 사람을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도 했다. 


 '혼자서 잘 사는 나'를 내 핵심 정체성으로 알고 살아온 성인기의 자아 인식을 모두 무너트려야 하는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일은 때로는 믿을 수 없게 고통스럽기도 했다. 여전히 그렇다. 함께 이 책을 읽는 친구들에게 나는 '오늘도 거지 같은 나를 만났다'라고 표현한다. 그림자는 대부분 내 의식과 대극을 이룬다. 즉, 내가 생각하는 나의 어떤 면과 전혀 반대되는 면이 내 무의식에 틀어박혀 있다는 것이다. '독립적인 나'로 의식하며 사는 동안 '의존적인 나'는 두려워 벌벌 떨며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MBTI' 또한 융의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핵심은 내 표면에서 인식되어 분석된 MBTI가 쌍으로 대극을 이루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기 발랄한 활동가'형의 나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적 성향이 높은 가능성으로 부정적으로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대극의 무의식을 알아주고, 인정하고, 건강하게 승화하지 않으면 이 또한 부정적 투사로 나타난다. '나는 인간 댕댕이!'라며 내 MBTI를 표면적으로만 인식할 일이 아니라, 그 대극이 내 무의식에 어떻게 열등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숙제가 생겼다. 


무의식은 또한 '꿈'을 통해 나타난다. 다만 꿈은 내 무의식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몹시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이 상징성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 꿈을 기록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꿈 일기를 열심히 쓰면 간밤에 꾼 꿈을 잘 기억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의 2편,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읽는 동안 꿈을 자주 꿨다. 사실은 자주 '기억했다'는 편이 맞다. 아무튼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그림자>보다 훨씬 거부감을 가지고 읽었다. 그 의미보다는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말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멋진 비혼 여성'으로서의 페르소나는 '여성성'이라는 말을 소화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 '말'이 문제라면 '남성성'을 '고구마'로, '여성성'을 '감자'로 바꿔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책을 끝까지 읽었다. <그림자>를 읽는 동안 예전에 헤어진 애인에게 계속해서 연락이 왔고, 나는 왜 그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융의 책뿐 아니라 다른 분석심리학과 관련된 책들을 함께 보면서 그를 놓지 못하는 내 마음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때 내가 좋아하던 여자 후배와 그의 남사친이 욕조에서 함께 목욕하는 꿈을 꿨다. 나는 그 둘을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지켜봤다. 편안하고 완전하지 않지만, 아니마와 아니무스, 즉 내 안의 여성성과 남성성이 화해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융 책을 읽다가 가지치기로 라캉을 알게 되었고, 잠시 쉬어가는 책을 한 권 읽은 다음 라캉을 공부해보려고 한다.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나'를 아는 것이 어떤 역할을 해 주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면서 나는 '거지 같은 나'를 마주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두렵고 화가 나고 불편하지만 내 무의식의 열등한 성격들을 마주하고 인식해야만 내 무의식을 남에게 투사해놓고 이 힘든 일이 남 탓이라는 생각을 거둘 수 있다. 또한 의식의 영역과 대극을 이루는 열등한 무의식이 모두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남들에게서 내가 보고 싶은 면만 보며 그를 우상화하거나 무시하는 것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걸 안다고 해서 내가 하루아침에 대단히 득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훨씬 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작가의 이전글 등산 명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