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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Nov 30. 2022

엄마를 이해하게 되어버렸어

'너 같은 딸 낳아 키워봐라'는 말을 거부했지만...

 "너도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엄마는 지금은 그런 소릴 안 하지만 5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와 갈등이 극으로 치달았을 때 꼭 이 카드를 꺼내었다. '너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원망과 분노, 저주의 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고, 작년 이후로 물리적으로 진짜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엄마의 말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에 모종의 후련함 같은 것들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말을 반한다는 그 자체로도 그렇지만, 정말 '엄마'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해 낼지 두고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했었다. 


 엄마와의 갈등은 작년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본인의 인생이 왜 힘든지에 대해 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쏟아냈다. 그것이 곧 내가 엄마와 나를 동일시하도록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나는 다 크고 나서야 깨달았다. 20대까지만 해도 나는 엄마와 마주 앉아 '엄마'라고 대화를 시작하려고만 해도 눈물이 났다. 남들에게 우리 엄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종종 '엄마가'라는 말만 해도 눈물을 쏟았다. '아니 왜 매번 엄마 얘기를 하려고 하면 눈물이 나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 답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나 스스로가 엄마와 나를 동일시하게 되어 엄마의 슬픔과 고통이 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엄마의 고통을 없애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더해졌다. 그러다 작년에 내가 두 번의 수술을 받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엄마의 간병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면서 나의 불편함은 최고조에 달했다. 엄마는 각각 3주씩 두 번 우리 집에서 지내며 삼시세끼 밥을 해주고 청소를 해줬다. 매일매일 시장에서 재료를 사 와 매 끼니를 다른 밥을 차려주고, 화장실과 싱크대마저 반짝거리도록 청소를 했다. 하루의 일상을 보내면서 중간중간 엄마는 혼자 한강에 나가 운동을 했다. 만보를 빠르게 걷고 운동기구를 이용해 근력 운동을 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 엄마의 운동 루틴을 서울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낯선 환경을 극도로 힘들어하는 엄마지만, 어느 순간 동네 미용실을 찾아 머리를 자르고 오기도 하고, 혼자 합정역 근처로 산책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동네 빈티지 숍에 들러 마음에 드는 소품들을 사 오기도 했다. 


 나는 나 때문에 엄마의 일상을 모두 포기하는 것과 아빠를 돌보는 엄마의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사실에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꼈다. 그때는 그 죄책감이 다인 줄 알았는데, 최근에서야 그 죄책감은 나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만들어낸 감정이었으며, 그 죄책감 아래에 엄마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가 서울에서도 나름의 재미를 찾아가는 것이 너무 기쁘고 뿌듯하면서도, 서울에서 즐겁게 지내는 와중에 원래 엄마가 지내던 곳에서의 일상으로 끊임없이 돌아가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화가 났었다. '어떻게 아픈 딸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에서 시작해서 '애초에 내가 엄마의 간호가 필요 없다고 했잖아'로 생각의 꼬리가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엄마를 잃고 싶지 않았던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를 보냈다. 보내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지만 엄마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남은 나는 홀로 서기 시작했다. 결국 엄마를 잃어야만 다시 홀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이 또한 갑자기 닥친 일이었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나는 엄마와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다시 두고 나서야 고요히 나의 힘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지나고 나니 그랬다. 오히려 엄마를 보내고 난 뒤로 엄마와 나의 관계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신체적 회복을 마치고 나니 정신적 회복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그 기간이 길어지는 동안 엄마는 어떤 것도 묻지 않으며 내가 필요한 것들을 적시에 제공했다. 엄마가 내 옆에 없어지만, 살면서 엄마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 적도 없다고 느꼈다. 


 예전에 엄마와의 관계 때문에 상담을 받을 때마다 '내면 아이 명상'과 '엄마의 인생을 이해하기'라는 숙제를 받았었다. 나는 이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내 안의 내면 아이의 존재를 부정했고, 엄마의 인생을 왜 내가 이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숙제가 없어지고 나서야 엄마의 인생이 이해됐다. 엄마의 엄마를 잃은 상실을 결혼과 육아로 채우려고 했던 엄마가 경험한 상실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런 엄마의 과거를 잘했다, 잘못했다 판단하지 않게 된 것은 나 또한 나의 좌절과 상실을 누군가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였다. 나는 내 내면 아이의 못난 면을 엄마에게 투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받아들이게 됐다. 박우란 선생님의 책들을 읽으며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것이 비단 엄마나 딸뿐 아니라 서로에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모녀관계의 갈등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꼭 우리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픈 친구를 집에 들여 돌봐주는 일이 길어지면서, 작년에 엄마와 보내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엄마가 일상으로 얼마나 처절히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 그것이 엄마 스스로를 보호하는 일이었는지를 깊이 이해하게 됐다. 그런 와중에 동시에 엄마의 끓는 사랑이 보였다. 엄마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어주고 있었는지,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욕구를 지키고 싶어 했는지, 이 두 가지를 오가며 혼란스러워 하는 엄마가 보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시간들을 엄마와 나는 서로를 견디고 있었던 것이었음을. 


 최근에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은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다 큰 딸들이 있는 엄마들이다. 이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꼭 한 번씩 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딸의 입장이 아닌 엄마의 입장들을 들으며 마음이 저릿해졌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이기에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런 와중에 '엄마'로서의 페르소나는 매번 좌절하고 불안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 딸들도 다 크고 나면 엄마를 '엄마'로서가 아니라 그 이면의 다양하고 입체적인 역사를 이해할 것이라고, 내가 그랬다고 말해주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위로가 없었다. 


 이렇게 나이가 드는 건가. 


[추천하는 책]

* 박우란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여자의 심리코드>

[이번주에 읽을 책]

* 박영진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캉 정신분석과 여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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