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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Nov 01. 2022

등산 명상

인왕산 등반 처음이라서 오버하며 쓰는 후기

 같이 심리학 책 읽기를 하는 친구들과 인왕산에 올랐다. 평소 등산을 자주 했던 친구 한 명, 운동을 좋아하고 두려움이 없는 친구 한 명, 등산 경험이 거의 없고 저마다의 사건으로 오랜 체력 저하 끝에 채식을 시작하며 체력이 좋아진 나와 한 명의 친구가 있었다. 인왕산은 '초초초 초보자'의 등산코스로 유명하기에 함께 가보기로 했다. 날씨도 맑았고 단풍이 예쁠 때 즈음이니, 가볍게 산행한 뒤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인왕산에 오르면서도 우리의 목표는 정상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코스 중에서도 완만하게 성곽길을 따라 오르다가 범바위에서 돌아 내려오는 것이 목표였다. 범바위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이 멋있다는 후기를 보기도 목표를 낮게 잡으면 힘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등산을 잘하는 친구는 앞장서 길을 헤치며 걸었다. 가파른 길이나 모래가 많아 미끄러운 길이 나오면 '내가 밟은 길을 따라오라'라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남들과 같이 있을 때는 '목표지향적' 성향이 많이 발현되는 나는 함께 앞서 걸었다. 뒤따라오는 두 친구는 등산로에 핀 꽃 한 포기, 열매 하나 지나치지 못하고 천천히 감상했다. 이 꽃의 모양새가 얼마나 예쁜지 감탄하기도 하고, 이 열매는 어렸을 때 먹었던 불량식품을 닮았다는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하며 연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기 바빴다. 


 성곽길은 완만해 걸을만했다. 잘 닦여진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갑자가 가팔라지는 구간이 나온다. 그곳에서 위를 쳐다보면 큰 바위 근처에 개미만 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완만한 경사길이었지만, 그 바위까지는 까마득해 보였다. 정점을 찍은 단풍을 구경하며, 단풍의 색이 나무의 본연의 색을 찾은 거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오르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 그 개미가 되어있었다. 


 범바위에서 한 번 더 위를 올려다보면 정상이 보인다. '정상 0.4Km'.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정상이 있었다. 정상에는 초코송이만 한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거리는 짧았지만 꽤나 가파른 돌산을 기어올라가야 하는 것이 보였다. 멀지 않은 거리니 도전해보기로 했다. 여기까지 와서 정상을 가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또한 욕심이었을지 모르지만, 우리 넷의 도가니가 다 괜찮은 오늘 올라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밥도 잘 먹고 등산도 잘하는 멋쟁이들

 올라가는 길에도 온갖 엄살을 부리며 조심스럽게 올라가면서 나는 내려올 길을 걱정했다. '이렇게 가파른 길을 어떻게 내려온담...' 오르기로 했으니 최선을 다해 올라야 했고, 내려오는 것은 오르는 것보다 배로 무서웠지만 내려와야 했다. 정상 직전에 있는 좁은 바윗길은 경사가 무척이나 가파르고 사람이 한 명도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만큼 오르려는 사람도 많았기에 내려 올 사람들이 다 내려올 때까지 오르려는 사람들은 한 줄로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좁고 위험한 길에서 하산은 주의를 요하므로 하산객들은 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그 마지막 구간은 정체가 이어졌다. 


"이걸 다 기다렸다가 어느 세월에 올라가냐! 적당히 하고 치고 나가야지!"

귀를 의심했다. 이태원 참사가 있고 난 다음 날 등산을 한 것이라 그 말이 더 귀에 박혔다. 등산을 와서 빨리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정체구간을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무슨 마음일까. 정상에 가까워지자 맑은 날 서울이 내려다 보이는 전경이며 절정을 이룬 단풍이 더욱 아름답게 눈에 들어왔다. 잠시 눈길을 돌리기도 하며 기다리다가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하산객 중 어떤 분이 내려오기를 중단하고 먼저 올라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덕분에 더 많이 기다리지 않고 정상에 올랐다. 내려올 때는 정말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 몇 걸음이 있었다. 몸을 띄워 '폴짝'하고 뛸 용기는 전혀 없었기에 무조건 주저앉아 조심히 발을 내디뎠다. 그 조차도 할 용기가 나지 않으면 발을 내딛지 않은 채로 한참 어디다 발을 내딛을지 고민하는 시간도 가졌다. 나 때문에 길이 막힐까 걱정되는 마음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그 걱정을 하기엔 내 코가 너무 석자였다. 

룰루랄라 올라올 수 있는 성곽길. 

 범바위에서 정상에 이르는 그 짧은 길을 내려오고 나면 나머지 길은 춤을 추며 내려오기에도 수월한 산책길 정도다. 이제야 '아우 - 뭐 인왕산 별거 없네!'라며 거드름을 피우며 걸음을 재촉했다. 등산을 잘하는 친구 둘은 내려오는 길에 내 앞에 먼저 갔고, 내 뒤엔 등산을 하지 않던 친구가 따라왔다. 

"바위에 몸을 착-붙이고 한 참을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모습을 보고 내가 엄청 용기를 얻었어요. '너는 나의 용기다!' 뭐 그런 것처럼!"

 등산화를 신지 않고 있던 친구가 미끄러지지나 않을지, 내 뒤에 따라오느라 답답하거나 더 겁을 먹진 않았을지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휘발되는 순간이었다. 겁이 많아 운동할 때 특히 몸을 사리고 도전을 하지 않는 내 모습을 통 마음에 들지 않게 여기며 살아왔고, 그날도 내 느린 걸음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비치고 해석될지에 온 신경이 가 있던 것이 완전히 재정립됐다. 졸아서 머뭇거리는 순간보다, 그 머뭇거림 끝에 발을 조심스럽게 내디딘 모습에 집중해 준 친구 덕분이었다. 


서울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이런 날씨, 이런 나무 색을 한 번에 즐기는 날이 일 년에 몇이나 될까?

 내가 바위에 붙어서 머뭇거리는 동안 어떤 아저씨는 등산스틱을 들고 나를 추월해 휘적휘적 먼저 디딜 곳도 없는 미끄러운 바위를 잘도 내려갔었다. 수도 없이 산을 오르내린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인왕산이 대단히 어려운 등반코스가 아니고 '초초초 초보자'용 코스인 점을 감안하면 그 길을 그렇게 머뭇거린 것은 미끄러운 바위보다 내 마음 안의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어딜 가나 남들보다는 조금 더 조심하고 조금 더 천천히 발을 내딛을 것을 알고 있다. 그 두려운 마음 덕에 조금 더 안전하게 등산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이용할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남들이 나 때문에 답답해하면 어쩌지'하는 마음이나 (그럴 가능성은 좀 더 낮지만) 휘적휘적 풀쩍 용기 있게 뛰어내리지 못한 내 모습을 창피해할 일은 없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내디딘 내 발걸음에 용기를 얻는 사람이 앞으로 없다 하더라도 나는 10월 마지막 주말에 함께한 이가 해준 말을 꼭꼭 눌러 기억할 것이다. 


 

정상에선 간단히 대추야자를 나눠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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